중동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져 왔던 살육이 지난 10월7일로 딱 1년을 맞았다. 알자지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4만2,500명, 부상자까지 합치면 14만 5,000명에 이르렀다. 그 1년 동안 세계는 그저 지켜만 봐왔다. 최근에는 레바논 공습으로 2,100명쯤의 사망자가 나왔다(부상자 1만여 명).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희생자의 대부분은 비무장 민간인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잠자리에 들어 (그날 낮에 읽었던) 동화 속 꿈나라로 떠나던 어린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들을 겨냥한 공습과 살육은 제네바협약(1949)과 국제형사재판소(ICC) 규정(1998년 제정, 2002년 발효)을 비롯한 전쟁에 관한 국제법에서 ‘전쟁범죄’로 못 박고 있다.
‘광기의 네타냐후’ 뒷배는 미국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제네바협약이든 ICC 규정이든 그 어떤 국제법상 제약을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지금의 중동 상황에 딱 맞는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도 문제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하산 나스날라(1960-2024)을 비롯한 레바논 헤즈볼라 지도자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 바이든 대통령은 비판은커녕 ‘정의로운 조처’라고 이스라엘을 감쌌다. 그 말을 듣는 중동사람들은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제아무리 ‘광기의 네타냐후’라 하더라도 초강대국 미국이란 든든한 뒷배를 없다면 마구잡이 공습은 삼갔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미국은 최대동맹국인 이스라엘에 군사적 지원을 퍼부었다. 미 브라운대 부설 왓슨연구소(Watson Institute)는 9.11 테러 뒤 벌어진 여러 전쟁(테러와의 전쟁, 아프간전쟁과 뒤이은 이라크전쟁 등)에 든 비용에 초점을 맞춰 ‘전쟁비용(Costs of War)’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이어왔다. 왓슨연구소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2023년 10월7일 뒤 1년 동안 팔레스타인과 기타 지역(레바논, 이란, 예멘)에서 이스라엘이 벌이는 군사 작전을 돕기 위해 179억 달러(약 24조원)를 지출 승인했다. (보고서 전문 바로 가기 : 클릭)
‘안보 지원’이란 명목 아래 이뤄진 지출은 이게 다가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군사 지원금 179억 달러에다 이스라엘과 관련된 미군 작전(지중해에 미 항공모함․순양함․구축함으로 이뤄진 항모전단 파견 등) 비용을 더할 경우, 227억 6000만 달러에 이른다. 미국 시민이 세금으로 낸 돈 가운데 무려 31조원에 가까운 돈이 이스라엘 ‘안보 지원’에 쓰인 셈이다.
이토록 미국이 엄청난 군사적 지원을 이스라엘에 퍼부어 어떤 결과를 빚었는가. 왓슨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대규모 인명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공 인프라와 생계 수단이 파괴되었다. 그야말로 문명 파괴다. 지금 이 시각에 가자 인구(215만 명)의 96%는 심각한 수준의 굶주림을 겪고 있다(2024년 10월2일 미국 의사들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가자지구에서는 이미 6만2413명이 굶어 죽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히틀러 닮은 네타냐후의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자로 이미 낙인이 찍힌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비리 정치인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기도 하다. 2019년 11월 이스라엘 검찰로부터 개인비리(사업가들로부터 뇌물수수, 사기, 배임 등)로 기소돼 2020년 5월 법정에 섰다. 재판이 질질 끌며 시일을 보내다가 1년 전 하마스의 기습으로 전쟁이 터지자, 재판 얘기는 쑥 들어갔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이지만, 네타냐후에게는 기회로 다가왔다.
네타냐후는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전쟁밖에 답이 없다고 여기는 모습이다. 중동 전역으로 전선을 넓히고 긴장을 높여야 자신의 정치생명이 안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스라엘 군 장성들이 반대하는데도 이란 핵시설과 석유 시설물 공습으로 전쟁 규모를 키우려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11월5일 미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유대인 표와 돈을 챙길 욕심에 이란 핵시설 공습을 부추기고 있다. 네타냐후와 트럼프의 이런 행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광기’다. 이 단어를 빼고 다른 적절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다뤄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제법 관련 법전(法典)에 없던 새로운 용어였다. 지금 중동에서 네타냐후가 (미국의 지원 아래) 벌이는 범죄도 ‘반인도적 범죄’다.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 공습으로 죽고 다쳤고, 군사작전을 이유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 다른 곳으로 내몰렸다.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평화적 생존권을 빼앗겼다. 그렇기에 “히틀러의 광기를 네타냐후가 이어 받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중동 전쟁이 그치지 않을 경우 광기의 네타냐후가 일으킬 인도적 대재앙이 걱정스럽다. 다른 한편으로 네타냐후가 제 무덤을 파서 파멸할 것이란 전망도 없지 않다. 외교전문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판은 10월 들어 ‘이스라엘이 잃은 것'(What Israel Has Lost) 또는 ‘이스라엘 패배의 역설'(Israel’s Paradox of Defeat) 등의 경고성 칼럼을 내보내고 있다. 네타냐후로선 반갑지 않은 제목이다. 언젠가 아침에 눈을 뜨면, 네타냐후가 히틀러처럼 권총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
히틀러, “나는 정치판의 로베르트 코흐”
‘광기의 네타냐후’의 80년 전 버전이 ‘광기의 히틀러’가 벌인 유대인 학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군이 승리를 거듭하던 때인 1941년 7월10일 이른 아침, 히틀러는 나치 경찰과 친위대(SS)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1900-1945)를 만났다. 그 무렵 힘러는 늘어난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게토(ghetto)에 몰아넣느라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힘러의 보고를 듣고난 뒤 히틀러는 그 자신을 로베르트 코흐(1843-1910)에 버금가는 인물로 치켜세웠다. ‘세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과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신을 ‘정계의 코흐’라 했다(독일의 미생물학자 코흐는 잘 알려졌듯이 결핵․탄저병․콜레라 등의 병원균을 찾아내 우리 인간의 수명을 크게 늘렸다. 그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아무래도 나는 정치판의 로베르트 코흐가 아닌가 싶다. 코흐는 결핵균을 알아내서 그것으로 의학의 신기원을 열었다. 나도 사회가 부패하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균과 효모 때문이라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유대인 없이도 나라가 존속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경제․문화․예술 따위도 유대인 없이 건재하다는 것을, 아니 유대인이 없으면 더 좋아진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것이 내가 유대인에게 먹인 치명타다](이언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577쪽).
힘러에게 히틀러가 이런 말을 했던 시기는, 스탈린과 맺었던 독소불가침조약(1939년 8월23일)을 깨고 소련 쪽으로 쳐들어간(1941년 6월22일) 직후였다. 독일군은 전격전을 펼치며 탱크를 앞세워 매우 빠르게 진군하면서 많은 소련군을 포로로 붙잡았다. 점령지역이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과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으로 늘어나면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유대인 숫자도 크게 늘어났다. ‘유대인 문제’를 끝장낼 해법(나치들이 말하는 ‘최종 해결’)을 저울질하느라 조금 고단하긴 했지만 즐거운 나날이었다. ‘정계의 코흐’라는 발언도 자만심으로 뭉쳐진 히틀러의 우쭐한 심리상태를 짐작하게 만든다.
‘유대인 보호구역’이란 이름의 게토
1939년 9월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은 유대인 대학살로 가는 문을 열어젖혔다. 히틀러는 전쟁 중에도 그의 오랜 강박관념처럼 자리 잡은 ‘유대인 문제’를 놓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모든 관심사에 우선했다. 이를테면, 전투에 유용하게 쓰일 자원(병력을 비롯한 인적 자원, 기차 등 수송수단을 포함한 물적 자원)을 유대인 처리(수용과 감시, 학살)로 돌렸다.
히틀러의 재가를 받은 뒤 하인리히 힘러(경찰과 친위대SS 우두머리)는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포함한 보안경찰과 보안부를 합쳐 하나의 독립적인 행정기구인 ‘제국보안본부'(RSHA)를 만들었다. 힘러의 최측근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904-1942)가 RSHA 본부장을 맡았다. RSHA의 제4국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 중령을 책임자로 한 ‘유대인 문제부’가 만들어졌다. 힘러-하이드리히-아이히만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이 히틀러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유대인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됐다.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학살정책의 핵심이었다. 1942년 5월 체코 프라하에서 출근길목을 지키고 섰던 저항요원의 폭탄 공격으로 중상을 입고 8일 뒤 죽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유대인 학살은 더 체계적이고 가혹한 방식으로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아이히만은 패전 뒤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가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게 붙잡혔다. 1962년 아이히만에게 교수형을 내린 예루살렘 재판은 여러 논란을 불렀다. 그 재판 논쟁점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전쟁 초기 독일군의 점령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처리해야 할 유대인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폴란드의 유대인만 300만 명에 이르렀다. 나치 지도부는 독일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 ‘유대인 보호구역’을 만들어놓고 유대인들을 강제로 그곳에 모아놓으면 처리가 쉬울 것이라 여겼다(보호구역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보호’가 아님은 물론이다. 19세기 미국에서 척박한 황무지를 ‘인디안 보호구역’이라 이름 붙여 그곳에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몰아넣어 굶어죽게 만든 것과 똑 같다).
하이드리히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 1차적으로 유대인 보호구역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다. 1939년 말부터 폴란드 유대인들은 주요 도시 안의 특정 지역을 벽돌담으로 둘렀다. 이른바 ‘게토'(ghetto)다. 유럽 중세시대에 있던 게토는 프랑스혁명(1789)의 영향으로 19세기 중반 무렵엔 거의 없어졌으나, 20세기 중반 나치에 의해 되살아났다.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티머시 스나이더(예일대, 동유럽사)의 글을 보자.
[1939년 10월 독일인들은 모든 폴란드 유대인들의 재산을 강탈했다. 유대인의 전문직 종사는 금지됐고 유대인 남성은 노동을 신고해야 했다. 유대인은 살던 곳에 계속 머물 권리를 빼앗겼다. 하이드리히와 한스 프랑크(히틀러가 임명한 폴란드 총독) 둘 다 유대인을 게토에 몰아넣으라고 명령했다. 1941년 말이면 대다수 폴란드 유대인은 게토의 장벽 뒤에 갇혔다](티머시 스나이더, 「블랙어스: 홀로코스트, 역사이자 경고」, 열린 책들, 2018, 163쪽).
폴란드 곳곳에 모두 1,000개쯤의 게토가 만들어졌다. 가장 큰 것이 바르사뱌 게토였다. 그곳엔 바르샤바 도시인구의 30%에 해당되는 35만 명의 유대인들이 도시 총면적의 2.4%에 지나지 않는 좁은 구역에 자리 잡았다. 바르샤바뿐 아니라 우치, 크라쿠프, 루블린, 르부프(리보프) 같은 주요 도시의 게토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인구 밀집도에 견주어 위생은 최악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티푸스 같은 전염병으로 죽어나갔다.
처음엔 말살보다는 추방에 무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독일의 세력범위 안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놓이게 되었을 때 나치 히틀러 정권이 곧바로 유대인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치 정권이 입으로는 유대인 ‘세균’박멸을 떠들었지만, 이렇듯 처음부터 학살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초기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유대인들을 동유럽과 소련 쪽으로 쫓아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이 지닌 재산을 갈취해 나치 독일의 재정에 보탰다.
말살보다는 추방에 더 무게를 둔 정책안에 따라 아프리카 마다카스카르(프랑스령)로 대량 이주를 기획하기도 했고, 유럽 동부와 특히 소련의 독일군 점령지역(우크라이나, 시베리아) 등으로 유대인들을 쫓아내려 했다. 나치 지도부는 게토를 처음엔 대규모 추방을 위한 임시 거주지쯤으로 여겼다(하지만 전쟁 상황이 독일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면서 유럽 밖으로의 추방안은 물거품이 됐다. 학살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히틀러도 한때나마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유혈사태 무렵 괴링을 만난 자리에서 마다가스카르에 유대인 보호구역을 만드는 방안을 허용한 것으로 알려진다(이언 커쇼, 404쪽 참조). 히틀러는 아프리카의 큰 섬으로 유대인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굳이 ‘학살자’소릴 듣지 않고 유대인을 보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경찰과 친위대(SS)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도 그 무렵 ‘유대인이라는 개념의 완전한 소멸’로 마다가스카르를 떠올렸다. 영국 역사가 이언 커쇼에 따르면, 유대인을 아프리카 식민지로 보내는 방안을 처음으로 꺼낸 사람은 경찰과 친위대 우두머리인 하인리히 힘러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유대인을 아프리카 같은 식민지로 한꺼번에 보내서 ‘유대인’이란 말을 아예 없애버리고 싶다”(이언 커쇼, 405쪽).
마다카스카르 이주 계획
국가 차원에서 유대인을 마다카스카르 섬으로 집단 이주를 시키는 문제를 먼저 고려한 것은 나치 독일이 아니라 폴란드였다. 마찬가지로 반유대 정서가 강했던 폴란드 정부는 1926년 땅이 없는 가난한 폴란드 농민들을 마다가스카르로 보내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그저 검토 단계에 그쳤다. 10년 뒤인 1936년 폴란드는 프랑스 총리 레옹 블룸에게 “폴란드 유대인을 집단 이주시키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폴란드 정부는 프랑스의 허가를 얻어 3인 조사단을 보냈고, 곧바로 5만 명의 유대인을 정착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마가카스카르 주민들의 생각은 무시된 논의였다. 원주민들은 유대인이든 아니든 유럽에서 이주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는 것을 당연히 반기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은 마다가스카르가 폴란드 땅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이래저래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1940년 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뒤 필리프 페텡을 국가수반으로 비시를 행정수도로 삼은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프랑스 괴뢰정부 안에서도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 같은 먼 곳으로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널러 퍼져 있었다(티머시 스나이더, 344쪽). 독일군의 초기 승세로 봐서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길이 곧 열릴 것이라 기대했다. 힘러의 지시를 받아 세부계획을 세운 이가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이었다.
[(1940년) 8월 중순 아이히만은 400만명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옮기는 세부계획을 14쪽 길이의 문건으로 작성했다. 이 보안국 계획에는 유대인에게 자치행정권을 준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마다가스카르로 집단 이주한 다음에도) 유대인은 친위대의 철저한 통제 아래 두어야 했다](이언 커쇼, 405쪽).
히틀러가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한 한스 프랑크(1900-1946, 변호사 출신의 나치당 간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뒤 교수형)는 자신의 관할 아래 놓인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로 실어 보낼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제해권을 쥔 영국 해군력이었다. 영국 해군에게서 대서양 제해권을 빼앗아오지 않는 한 마다카스카르로 대규모 수송선을 띄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치 지도부는 마다카스카르 이주안을 폐기했다. 유럽 밖으로의 대규모 유대인 이주(추방)안이 휴지가 되자, ‘유대인문제의 최종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은 곧 대량학살 쪽으로 옮겨갔다.
대우와 마다가스카르
이름이 ‘섬’이지 마다가스카르는 한반도의 거의 3배쯤 넓다. 히틀러가 한때나마 탐을 내던 이 섬에 한국기업이 뛰어들었다. 2008년 한국의 대우 기업이 마다가스카르 농경지의 절반((130만 헥타르. 서울 면적의 21배)를 무상 임대 받기로 비밀협약을 맺었다. 대우 기업이 그곳의 부패한 정권을 어떤 방식으로 설득했을까는 독자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스테파노 립르티가 쓴 책(Land Grabbling: Journeys in the New Colonialism, 2013)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이 계약으로 한국의 다국적기업 대우는 99년 동안 마다가스카르 전체 농경지의 절반을 양도받아 옥수수와 팜유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계약에 따르면, 고용을 창출하고 사회기반시설(인프라)을 건설해준다는 약속을 대가로 토지를 무상 임대한다고 한다. 「퍼이낸셜 타임스」가 이 거래를 폭로하면서 거리 시위가 일어났고, 불과 몇 주일 만에 마르크 라발로마나나의 인기 없는 정부가 무너졌다](스테파노 립르티, 「땅뺏기: 새로운 식민주의 현장을 여행하다」, 레디앙, 2014, 116쪽).
마다가스카르는 인구의 90%인 2,000만 명이 빈곤선 아래에 있는 가난한 나라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다. 외국 기업과의 정경유착으로 농경지를 수출용 상업작물 생산으로 돌린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가 됐다(미 식품회사들이 중남미에서 대규모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우가 맺은 밀실 계약은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에 바탕한 ‘악마의 계약’이란 비난을 받았다. 반정부 시위가 커지면서 170명이 목숨을 잃는 유혈사태 끝에 정권이 무너졌다. 만에 하나, 제주도에 중국인 또는 일본인들이 몰려와 섬의 절반을 빌리거나 사들여 맘대로 땅을 파헤치고 상행위로 이익을 좇는다면, 누구라도 좋게 보기 어렵다.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의 분노는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의도주의냐 구성주의냐
지난 주 글에서 히틀러는 문서로 전쟁범죄의 증거를 남기지 않고 주요 결정사항을 입으로만 지시했다는 점을 짚었다. 히틀러에 충성 경쟁을 벌이던 나치의 파괴기계(친위대, 보안경찰,나치당원 등)들은 히틀러의 말 한마디로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챘다. 곧바로 무자비한 행동 계획이 세워졌고 현장에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추방이나 감금, 학살)에 나섰다. 이언 커쇼의 분석을 보자.
[히틀러는 별로 앞으로 나서지 앉고 막연한 말로 바람만 넣어 주었을 뿐인데도 이제 한때는 폴란드였던 점령지에서 대규모 학살을 벌일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1940년에는 반(反)유대정책이 명확하고 일관된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친위대와 보안경찰 지도부 안에서는 암암리에 학살을 저지르는 쪽으로 쏠렸고 계획도 그런 쪽으로 짰다. 히틀러는 뚜렷한 지시를 내리기보다는 변덕스러운 정책에 그때그때 대응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유대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포괄적인 원칙을 던지고 전쟁으로 ‘유대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예언’을 내놓는 것을 충분했다](이언 커쇼, 409쪽).
홀로코스트 연구자 로버트 위스트리치(헤브루대, 근대유럽사)에 따르면, 1938년과 1939년 사이에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려는 보다 급진적인 정책 전환이 이뤄지긴 했어도, ‘그 다음 단계로 어떠한 조치가 잇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일종의 논리적 단계로 (탄압 정책이) 행해졌다’고 했다(로버트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119쪽).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단계인 홀로코스트에 대해선 적어도 독일 관료들 사이에선 처음부터 체계적인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과정을 두고 연구자들 사이에선 크게 두 가지 견해가 맞선다. 의도주의와 구성주의(또는 기능주의)다. ‘의도주의’란 독일 보통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간직해온 뿌리 깊은 반유대적 감정에 바탕을 두고 유대인 절멸을 외쳐온(‘의도해온’)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그를 우두머리로 한 전체주의 체제에서 유대인 학살이 ‘의도적으로’이뤄졌다는 분석이다. 이런 시각을 지닌 연구자들을 학계에선 ‘의도주의자'(intentionalist)라 부른다.
이와는 달리 ‘구성주의자'(functionalist)는 나치 정권에게 처음부터 유대인을 대량학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나치 2인자였던 괴링이나 선전장관 괴벨스, 친위대장 힘러를 비롯한 측근들이 히틀러에 대한 충성경쟁과 권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여러 유대인 억압 정책들이 점점 더 과격한 쪽으로 ‘구성’되기에(‘기능’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가 홀로코스트의 비극이라고 본다.
앞서 살펴본 대로, 나치 정권이 입으로는 유대인 박멸을 떠들었지만 처음부터 대량학살을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 프랑스령 마다카스카르로 대량 이주를 기획하기도 했고, 유럽 동부와 소련 시베리아 쪽으로까지 유대인들을 쫓아내려고도 했다. 구성주의자들은 유대인 처리문제가 1941년 말부터 1942년 사이에 추방보다는 학살 쪽으로 점점 구체화되면서 학살 프로그램이 제도화됐다(‘구성’됐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나치 히틀러 정권이 꾀한 유대인 대량학살의 최종적 ‘구성’품인(최종적으로 ‘기능’한) 셈이다.
무엇이 대량학살을 불렀나
의도주의냐 구성주의(기능주의)냐의 논의는 전문 연구자들의 영역이기에 이쯤 해서 그친다. 다만 이진모(한남대, 독일 노동운동사)의 글을 참고로 소개하고 싶다. 이교수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뒤 인종학살의 현상적 측면, 즉 희생자 관점과 도덕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반유대주의 전통에 바탕을 둔 의도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 연구의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나치 권력체제와 정치적 결정구조의 문제점(혼란)에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구성(기능)주의적 접근이 활발해졌다.
[의도주의자들은 모든 주요한, 특히 홀로코스트 같은 사안의 결정 과정에 히틀러가 비중 있게 개입했다고 보았으며, 기능주의자들은 나치의 주요 정책은 다양한 권력집단과 권력자들의 혼란한 경쟁구조에서 태동한 ‘누적적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해석하여 히틀러의 비중을 평가 절하했다](이진모, ‘민주주의의 몰락과 독재국가의 출현’, 「역사비평」 2012년 가을호).
유대인 대량학살을 불러온 ‘그 무엇’에 초점을 맞춘 각각의 접근에는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 히틀러 권력집단의 ‘의도’에 집중하면 히틀러 정권의 침략정책을 지지하고 실제 침략에 참여했던 다수 독일인들은 면죄부를 받게 된다. 독일인들의 전쟁 책임을 묻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구조’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히틀러를 비롯해, 유대인 학살 책임을 져야할) 행위자들이 사라져 버린다. 이즈음 연구자들의 흐름은 의도주의냐 기능주의냐로 딱 가르기보다는 둘 사이를 잇는 접합점을 찾아 늘려가는 중이다.
의도주의냐 기능주의냐를 떠나, 유대인 대량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의도주의적 해석처럼) 유대인을 절멸시켜야겠다는 ‘의도’를 갖고 나치 히틀러 정권이 홀로코스트를 밀어붙였든, (기능주의적 해석처럼) 히틀러가 ‘유대인문제의 최종해결’에 대한 확정적인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나치 체제의 폭압적 ‘기능’이 대량학살을 낳았든, 유대인이 겪은 비극은 운명적으로 피하기 어려웠다고 여겨진다. 글의 분위기가 어둡다. 한편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다음 주에도 유대인에 얽힌 음울한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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