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아내 에델 케네디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손자인 조 케네디 3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엑스(X·옛 트위터)에 10일(현지 시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한다”라고 밝혔다. 뇌졸중과 관련된 합병증이 사망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1928년 4월 11일 시카고에서 일곱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에델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네덜란드계 개신교도인 그녀의 아버지 조지 스캐켈은 석탄과 석유 코크스 거래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진다. 에델 가족은 1930년대 중반에 미국 동부 코네티컷주로 이사해 그리니치 근처의 저택에서 살았다.
에델과 로버트 F.케네디가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크리스마스 연휴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에델은 로버트의 형제 중 한 명인 진 케네디와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다. 당시 진 케네디가 에델에게 크리스마스 휴가 때 퀘벡의 몽트 트렘블랑으로 스키 여행을 가자고 꼬셨고, 그곳에서 에델과 로버트 F.케네디는 처음 만났다. WSJ은 “에델은 나중에 그것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었다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둘은 5년 뒤인 1950년 6월 그리니치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순탄한 삶을 사는 듯 보였다. 에델은 남편의 정치 활동을 적극 지원하며 내조했다. 1963년 11월 존 F.케네디가 암살된 후 에델은 남편을 위해 선거 운동을 벌였다. WSJ은 “에델은 부유한 부모의 공화당 신념을 버리고, 남편의 민주당 의제를 채택했다”면서 “그녀는 남편의 정치 경력에 필수적인 지원자로 발전했다”라고 평가했다. 아내의 내조 덕에 로버트 F.케네디는 1964년 뉴욕주 상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으며 1968년에는 민주당 대선 예비선거에 출마했다. 1968년 6월 4일 로버트 F.케네디는 캘리포니아(州) 민주당 대선 예비선거에서 승리했는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그는 호텔 근처에서 총 세 발을 맞고 사망했다.
당시 옆에 있던 에델은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면에는 과거의 슬픔이 있었다고 미국 언론들은 평가했다. AP통신은 “에델은 40세까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겪을 죽음보다 더 많은 죽음을 견뎌냈다”라고 했다. 에델의 부모는 그녀가 27세이던 1955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오빠는 1966년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자기 아들과 손녀 등이 약물 과다 복용, 사고 등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에델은 남편이 암살된 후로 재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에델은 남편 사후 로버트 F.케네디 인권 재단을 설립해 전 세계 표현의 자유 옹호 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에델은 남편의 죽음 이후 그가 옹호했던 대의를 위해 일하는 데 헌신했다”라고 전했다. 에델은 지난 201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로부터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았다.
케네디 가족 성명에 따르면 에델은 9명의 자녀, 34명의 손자, 24명의 증손자와 수많은 조카를 이끈 ‘케네디가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다. 에델은 11명의 자녀를 출산했으나 2명의 자녀를 먼저 떠나보냈다.
NYT는 “에델의 정치에 대한 열정은 너무나 강렬해서 종종 ‘케네디 가문보다 더 케네디 가문에 가깝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에델은 케네디 가문의 유산에 대한 열정적인 후원자였다”라고 전했다. CNN은 “에델은 남편이 사망한 후 환경 및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비영리 단체인 ‘로버트 F.케네디 인권재단’을 설립해 남편이 추진한 대의를 옹호했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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