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지부동이던 기준금리가 연 3.25%로 내려오면서 ‘금리 인하기’의 신호탄이 쏘아진 가운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앞으로) 어떤 속도로 인하하는지도 중요한 문제”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부동산 가격과 가계부채 문제가 완벽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인 만큼, 향후 금리 인하의 ‘속도 조절’에 신경 쓸 것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위원 대부분도 향후 석달 동안은 이번에 내린 금리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내다봤다.
이 총재는 11일 금통위 회의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가계부채 증가세는 여전히 유의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번에 25bp(1bp=0.01%p)를 인하한 뒤 대내외 영향을 점검해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번 인하 결정은 ‘동결’이 바람직하다고 바라본 장용성 금통위원 1명의 소수의견이 존재하는 가운데 나머지 위원들의 찬성으로 이뤄졌다.
◇ “해외와 같은 속도로 금리 떨어진다 생각 안 돼”
다만 금통위원들은 향후 연속해서 금리 인하를 단행할지 여부에 대해선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금통위원 6명 중 5명은 ‘포워드 가이던스’(향후 3개월 내 기준금리에 대한 위원들의 전망을 취합한 것)를 통해 ‘연 3.25%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고, 나머지 1명은 ‘연 3.25%보다 낮은 수준으로의 인하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5명은 ‘이번 인하로 인한 부동산과 가계부채 등 금융 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고, 미 대선 결과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도 살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며 “나머지 1명은 ‘정부의 거시건전성 정책의 작동이 시작한 상황에서, 내수 하방에 대응하기 위해 추가 인하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의견이었다”고 소개했다. 이 총재는 포워드 가이던스의 소수의견에 대해선 “익명으로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인플레이션’과 ‘가계대출’ 두 측면에서 금리를 인하할 여건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앞서 지난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6%, 근원물가 상승률은 2%를 기록해 한은의 안정 목표(2%)를 모두 충족한 바 있다. 이 총재는 “인플레 부담이 덜어진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너무 불필요하게 긴축적인 수준으로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봤다”고 했다.
이어 “9월 아파트 거래량이 7월 대비 2분의1 수준이고, 수도권의 가격 상승률도 8월의 3분의1 수준”이라며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이 2~3개월 전 주택 거래량에 후행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미뤄볼 때, 11월쯤 되면 대출 규모도 내려갈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의 거시 안정성 정책 강화 이후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속도 조절’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50bp 내렸다고 해서, 우리도 해외와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우리는 해외에는 없는 ‘금융 안정’이란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이번에도 금융 안정에 대한 고려를 상당히 했기 때문에 ‘매파적(긴축 선호) 인하’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런 내수·수출·금융 안정 사이의 상충관계는 과거 인하기엔 살펴볼 수 없었다”고도 덧붙였다.
◇ ‘인하 실기론’엔 “내수 말고 금융 안정 측면도 봐달라”
그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통화정책 ‘실기론’에 대해선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이 총재는 “내수 상황에 방점을 두고 지난 8월 금리 인하를 해야 했다는 시각도 있는데, 금융 안정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8월 인하가 옳았다고 주장한) 기관이나 전문가에게 그 이후 가계부채가 10조원 가까이 늘었는데, 그건 예상했는지를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는 지난 2년 고물가 대응 과정에서 한은의 정책 선택 과정과 관련해서도 “일각에선 한은이 금리를 더 올리지 못하고 좌고우면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며 “금리를 더 큰 폭으로 인상했다면 지금 자영업자의 고통과 내수 부진은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주요국보다 작은 폭의 금리 인상으로 빠르게 물가를 안정화하는 데 힘쓴 한은 직원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우리나라 국채 시장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확정 소식에 대해서 이 총재는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그는 “여태까지는 우리 부채를 외화 표시 부채로 모두 조달했는데, 이를 원화로 다시 환산할 때 환율을 더 변동시킬 부담이 생겨 ‘신용 디폴트’ 위험이 있었다”며 “WGBI를 통해 우리 채권을 원화로 외국인에게 판다면, 환율 변동으로 인한 손실은 투자자가 지게 돼 그런 리스크가 줄어든다. 통화정책 측면에선 변동 환율제를 좀 더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이 총재는 앞으로 통화정책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우선 고려 요인에 대해 “당연히 물가가 가장 중요하다. 중동 사태 등 큰 변동성이 발생하지 않는지 봐야 한다”면서 “다음은 가계부채·부동산 등 금융 안정, 그다음은 성장률이 예상대로 유지될 건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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