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필리핀에서는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극단적으로 엇갈린다는 말이 있었다. 드라마와 K-POP과 같은 한류를 기반으로 한국문화에 대해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한국인에 대해선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는 것이다. 1990년대말 이후 필리핀으로 간 한국인 관광객과 어학연수생들의 부정적인 행태가 지적된 적이 많은 데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불법이민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류의 확산이 다른 아세안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늦었다는 평가도 있다. 반전을 만든 것은 넷플릭스를 비롯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였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며 OTT 시청 인구가 늘었고, 한국 드라마가 필리핀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최근 필리핀에서 한류 열기가 만만치 않다. 필리핀의 한류에 대한 관심은 이제 한식과 K푸드로 향하고 있다.
2018년 1억6213만달러를 기록한 한국의 대(對)필리핀 가공식품 수출액은 지난해 2억6614만달러를 기록했다. 연평균 13.2% 성장했다. 주요 수출품목으로는 라면과 아이스크림, 김이 꼽힌다. 최근 들어선 농축산물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2019년 1억3300만달러에 그쳤던 축산물 수출액은 2023년 2억3900만달러로 늘었다.
무역 일선에서 뛰는 K상인들의 눈에 필리핀이 기회의 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 75년 업력의 식품 수입 회사인 후아산을 경영하는 데이비슨 고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0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기자와 만나 “최근 종영한 ‘눈물의 여왕’이 필리핀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면서 “드라마만 인기를 끈 게 아니라, 드라마에서 나온 한국 식품에 관심을 보이는 필리핀인들이 많아졌다. 드라마 감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드라마에 나온 문화를 경험하고 소비하려는 욕구가 그만큼 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고 CEO는 “필리핀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 제품은 불닭볶음면과 같은 라면 제품”이라고 했다. 그는 “원래 필리핀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최근 드라마와 유튜브 등의 영향으로 매운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필리핀 내 최대 한국 식품 수입업체인 페어그라운드의 박가혜 대표 역시 K푸드 유행의 일등 공신으로 ‘넷플릭스’를 꼽았다. 페어그라운드는 1년에 약 3000만달러어치의 한국 제품을 수입한다. 연간 매출은 800억원 규모다.
박 대표는 “필리핀은 동남아 국가치고 한류가 없다시피 한 국가였다.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에서 런닝맨 등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 때도, 필리핀에선 일부 K팝 가수만 인기가 있었다”며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OTT 플랫폼을 통해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영향력이 커졌다”고 했다.
박 대표는 이어 “현지에서 한식을 즐기는 방식이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김치·비빔밥·불고기 같은 메뉴 자체가 인기가 있었다면, 이제는 여러 반찬을 놓고 먹는 ‘반찬 문화’, ‘치맥 문화’, ‘분식 문화’ 등 음식 문화를 즐기는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예전에는 K팝 가수가 좋아하는 메뉴에만 관심을 보였다면,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 등 콘텐츠에서 나온 한국인의 삶의 방식과 문화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진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두 대표는 K푸드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배경으로 ‘고품질’을 꼽았다.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짧은 문화 현상에 그쳤을 것이란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박 대표는 “한국 식품의 강점은 가격 대비 품질이 좋다는 점”이라며 “현지 식품과 비교하면 비싸지만, 소비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대에서는 품질이 좋다. 나름 가성비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응이 빠른 품목으론 라면과 아이스크림을 꼽았다. 박 대표는 “라면은 현재 판매량이 연 평균 20%씩 증가하고 있다. 수출 증가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면서 “메로나와 붕어싸만코 등 한국 아이스크림의 성장세도 꾸준하다”고 했다.
고 CEO도 “품질이 좋다고 인정을 받으면 반응이 빠르게 온다”면서 “올해 한국산 어묵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수입량을 두 배로 늘렸다”고 했다.
미래 성장세가 주목받는 품목은 무엇일까. 고 CEO는 고품질의 한국산 농산물을, 박 대표는 건강보조식품과 밀키트를 꼽았다.
고 CEO가 경영하는 후아산은 현재 한국산 파프리카를 수입해 필리핀 마트에 납품 중이다. 한국산 파프리카는 현지산의 2배 가격에 판매되지만 품질이 좋아 재구매율이 높다고 한다. 고 CEO는 “한국 농산물을 수입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라며 “지난 7월부터 파프리카 판매를 시작했는데, 재구매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품질 덕분”이라고 말했다.
고 CEO는 “한국산 농산물을 더 수입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산 딸기와 포도는 맛이 매우 뛰어나다. 이처럼 좋은 품질의 과일을 사고자 하는 수요는 필리핀에도 있다”며 “현지 과일보다는 당연히 비싸겠지만, 고품질이라면 충분히 가격을 지불하겠다는 소비자가 필리핀에도 많다”고 했다.
박 대표는 “필리핀에서도 건강식품을 찾는 구매력을 갖춘 구매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젊은 층에서 프리미엄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며 “건강식품이나 이너뷰티 제품의 성장 가능성을 주목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식 기반 밀키트 제품도 필리핀 시장에서 먹힐 가능성이 크다. 특히 장기 보관이 가능한 냉동 밀키트 제품은 수출입에도 유리하다. 일부 한국 식품 회사는 아예 현지에 공장을 짓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제작지원: 2024년 FTA이행지원 교육홍보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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