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음악을 어찌 감히 여기에 비하랴”
쇼군부터 백성까지 들썩였던 ‘한류 원조’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오사카 엑스포
때맞춰 선상박물관 추진 중, 예산이 변수
사누키노카미(讃岐守·당시 에도 막부의 로슈 사카이 다다카츠酒井忠勝)가 와서 우리나라 음악을 듣고자 하며 “관백(関白·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이 친히 듣지 못했으므로 날더러 듣고 오라고 했다”고 했다. 즉시 악공을 시켜 음악을 연주하게 했더니 사누키노카미가 칭찬하기를 “오늘 귀국의 음악을 들으니 참으로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일본 음악이야 어찌 감히 여기에 비하겠느냐”고 했다.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1643년 8월 3일
(대마)도주가 “대군(大君·역시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가리킴)께서 마상재(馬上才)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고자 해서 나와앉을 관광청(觀光廳)을 외성 위에 만드는데, 아직 공사가 끝나지 못하고 사신의 돌아갈 날짜는 이미 내일로 정해졌다. 이것 때문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마상재를 할) 사람을 뒤에 떨어지게 해서 구경시켜 주신다면 추후 교토와 오사카 사이로 보내겠다”고 했다.
-계미동사일기, 1643년 8월 5일
조선 인조 때인 1643년, 사행길에 올랐던 통신사 사절단의 ‘계미동사일기’에 담긴 기록이다. 조선통신사는 근세 시기 ‘한류의 원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 번 파견되면 일본인들 사이에서 폭발적 반응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계미동사일기’에도 “오사카를 지나서부터는 왜인들이 종이를 가지고 와서 글씨나 그림을 요구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 글씨 쓰는 관원이나 그림을 그리는 관원은 잠시도 쉴 새가 없었다(6월 15일)”는 내용이 남아 있다.
단순히 일본의 백성들만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집권층도 조선의 문화와 문물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악공들이 내방했는데도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쇼군이 조선의 음악을 미처 직접 듣지 못하자, 재상 격인 로슈를 보내 “따로 듣고 오라”고 할 정도였다.
쇼군은 조선의 마상재(말을 타고 펼치는 기예) 또한 보고 싶어해, 에도의 외성 위에 마상재를 보기 위한 ‘공연장’을 따로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공사가 기한 내에 완공되지 못하자, 사절단에 사정해 ‘마상재 예능인을 두고가면 보고 빠른 길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이 ‘계미동사일기’에 남아있다.
조선의 문화와 기예가 현해탄을 넘어 한일 양국에 명성을 떨쳐, 한 번 통신사 행렬이 오면 쇼군조차도 사정을 해가면서까지 꼭 보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행 행렬에서 얻을 수 있는 글씨나 그림에 일본인들이 열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는 막부 고위층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통신사는 막부의 요청으로 에도 막부의 개창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묻힌 닛코(日光)에 가서 제례를 행했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에서 쓴 축문을 가지고 갔는데, 일본 측은 제례를 마치고나서 축문을 불사르지 말 것을 특별히 요청했다.
즉, 사신이 뜻을 전하기를 “제사 지낸 뒤에 축문은 태우는 게 제례(祭禮)”라고 하자 분고노카미(豊後守·에도 막부의 또다른 로슈 아베 다다아키阿部忠秋)가 말하기를 “대군께서 분부가 있었다. 어축(御祝)은 만대의 보물이므로 자손에게 전하려 한다”고 한 뒤, 축문을 닛코에 두어 보배로 삼겠다고 했다(계미동사일기, 7월 26일)는 내용이다.
조선 음악 못 듣자 로슈 보내 “듣고오라”
마상재 보겠다며 따로 ‘공연장’ 짓기도
‘원조 한류’ 260년만에 시모노세키 상륙
광장 가로지른 행렬식에 구름 인파 몰려
한마디로 조선통신사 사행은 당대 일본의 상하를 뒤흔들던 대규모의 문화교류이자 일생일대의 ‘빅 이벤트’였으며, 현대 ‘한류 열풍’의 원조로 볼 수 있다. 원활한 문화교류를 위해 통신사 행렬에 지극한 접대가 뒤따랐다는 점도 사행록마다 담겼다. 그 중에는 쇼군이 접대가 부실했던 번주의 석고를 깎는다 해서 일본측 관계자가 전전긍긍하는 기록도 있다.
뉴진스의 도쿄돔 공연 전석 매진 등 일본에서의 ‘한류 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거세게 이어지고 있고, 한일 양국의 상호 관광객 1000만 명 시대가 예상되는 올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와 같은 모양, 같은 크기로 재현한 통신사선을 조선시대와 같은 항해 루트로 실제 타고 가서 통신사 행렬을 재현하는 ‘조선통신사선 뱃길 재현 행사’가 지난 8월 시모노세키에서 열렸다. 조선통신사선은 조선 영조 때인 1764년의 사행 이후 260년만에 시모노세키에 상륙했다.
8월 24일, 조선통신사선의 시모노세키항 입항 환영 행사에 이어, 재현 사절단은 광장을 가로질러 행렬식을 갖고 도심에서 친서 교환식을 가졌다. 인구 24만 명의 평범한 지방 소도시인 시모노세키에는 엄청난 구경 인파가 몰렸다.
“오가키를 떠나 부교(浮橋)를 건너니 물 양쪽 언덕에 구경꾼이 무수히 많았다”(계미동사일기, 6월 23일) “관백의 집에 갔다올 때 구경 나온 남녀들이 옷깃을 서로 접해서 장막을 이뤘다”(7월 19일)는 옛 사행록의 묘사마저 저절로 재현된 것이다.
시모노세키 시에서는 환영 만찬에 이어 이튿날 오찬까지 베풀었다. 우리 측에서는 김석기 국회 외교통일위원장과 배현진 의원, 위성락 의원, 최응천 국가유산청장, 김성배 국립해양유산연구소장, 임시홍 주히로시마 총영사가 참석했으며, 일본 측에서는 에지마 기요시(江島潔) 참의원, 마에다 신타로 시장, 가가와 마사노리 시의회 의장, 오츠카 츠요시 주부산 총영사,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친선협회중앙회장 등이 나왔다.
통신사는 조정·막부가 심혈 기울였지만
지금 재현행사는 국비 지원 1억원도 안돼
배현진 “세계인 주목 끌 역사문화콘텐츠
정부 차원서 관심 가지고 지원 노력해야”
이렇듯 ‘원조 한류’ 조선통신사 사행이 잘 재현된 것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통신사는 조선의 조정과 일본의 막부 양측이 심혈을 기울여 기획하고 준비한 행사였던 반면, 지금의 조선통신사 재현 행사는 국가 차원의 지원은 극히 미비하고 민간의 노력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주요 행사의 기획부터 비용 부담까지 한일 양국의 민간단체가 맡고 일부는 지방자치단체가 분담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비 지원은 부산에서 쓰시마 섬까지 다녀갔던 지난해에는 4420만원에 그쳤으며, 올해에는 일본 본토인 시모노세키 상륙까지 사행길이 연장됐음에도 8200만원에 불과했다.
내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며, 동시에 통신사의 최종 상륙지였던 오사카에서는 때마침 세계 각국의 문물이 전시·교류되는 엑스포가 열린다. 이에 때맞춰 조선통신사선의 항해를 오사카까지 연장해 선상박물관 운영과 선상 공연을 하는 방안이 계획되고 있다.
하지만 국가적 지원이 미비해 어려움이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류 원조’ 조선통신사 행사가 세계 속에서 더욱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예산 반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유산청을 피감기관으로 하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은 “조선통신사 재현 행사가 한일간 국제문화축제로 자리잡는다면 K-콘텐츠와 한류가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재, 규모로나 역사적 의미로나 세계인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또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는 국가 차원의 귀중한 역사문화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배현진 의원은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민간단체의 노력으로 성과를 일궈왔는데, 앞으로는 정부 차원에서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전세계가 주목하는 문화축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국회 차원에서도 도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돕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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