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음악은 모든 언어를 초월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꼽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의 명언이다. 베토벤의 말처럼 음악은 언어가 가진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라 할지라도 음악의 선율은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런 음악의 초월성을 오래 전 이미 알고 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음악이라는 언어로 ‘시각장애인’들이 음악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또 다른 언어 역시 지원했던 것이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담긴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소속 예술단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가지는 의미, 음악이라는 초월적 언어의 가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음악으로 어둠을 밝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서울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모두예술극장’. 상주아리랑’의 노랫소리가 컴컴한 무대 위를 적셨다. 시각장애인 판소리 예술가 김지연 단원의 노래였다. 그 구슬픈 목소리는 한 줄기 빛 없이도 어두운 무대 위를 환히 밝히는 듯했다.
이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과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지난 9월 26일 주최한 ‘아리랑, 세상에 울리다’ 공연 현장이었다. 장애예술인들의 창작·육성·교류 활동을 활성화하고자 선보인 무대였다. 공연을 진행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소속 예술단이다. 시각장애인 국악 연주자들을 주축으로 구성됐다.
약 200여명이 참석 가능한 공연장은 170여명의 관객들로 가득 찼다. 공연은 기존의 전통 아리랑과 함께 창작·편곡된 ‘모두의 노래 아리랑’, ‘큰 산의 노래 아리랑’, ‘맑은 아리랑’ 등으로 진행됐다. 이 다섯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단원들 개인의 이야기도 함께 풀어졌다.
최동익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단장은 “아리랑은 사랑과 고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 동서남북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지역 전체에 담긴 삶의 애환과 기쁨 희로애락 희로애락을 노래한다”며 “이를 새롭게 표현해보고자 이번 공연의 주제를 아리랑으로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공연을 진행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무려 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세종대왕이 명했던 ‘관현맹인제도’를 뿌리고 두고 있어서다. 이는 시각장애인 악사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주고 궁중악사로 연주하게 했던 제도다. 이는 세종실록 54권(세종 13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2011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창단됐다.
깊은 역사만큼 실력도 출중했다. 무대 위에서 가야금, 단소, 거문고, 해금 등의 악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박자, 음정으로 연주됐다. 여기에 김지연 단원을 필두로 한 판소리 합창이 더해지자 이들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됐다. 말 그대로 ‘문자’를 초월한 음악의 언어였다.
공연을 관람한 한 참관객은 “TV나 여러 공연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아리랑을 시각장애인 예술가 분들의 아름다운 연주로 다시 듣게 되니 감회가 뜻 깊었다”며 “이번 공연을 계기로 그동안 무관심했던 장애인 예술 분야에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아름다운 선율은 한국을 넘어 아프리카에서도 울릴 예정이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 따르면 10월 12일부터 19일까지 예술단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서 공연을 진행한다. 아프리카의 6.25 참전국 에티오피아에서 한민족 600년 역사 세종의 노래한다는 것이 이번 공연의 주제다.
에티오피아는 지난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지상군 6,300여명을 파병, 아프리카 유일의 지원국이다. 공연은 12일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을 시작으로 13일에는 한인교포 대상 공연을 진행한다. 15일 ‘AAU IES Museum Ras Mekonnen Hall’에서 메인 공연을 진행한다. 이후 16일부터 샌포드 국제학교와 MMC 의대, 에티오피아 맹학교, MCM 병원에서 다양한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다.
◇ 고난 딛고 탄생한 예술단, 뼈 깎는 노력으로 완성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완벽한 연주 뒤엔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됐다. 비장애인 음악인들과 달리 시각장애인 음악인들은 악보를 볼 수 없다. 때문에 점자 악보로 연주 학습을 해야 한다. 이는 일반 악보로 연습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김지연 단원은 “시각장애인은 눈으로 악보, 동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특히 판소리의 경우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손, 몸동작으로 춤을 추는 ‘발림’ 동작도 중요한데 이를 익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였다”고 회상했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김지연 단원은 판소리 발림 동작 묘사를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 공부했다고 한다. 하나의 곡을 연습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1년 6개월.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은 김지연 단원을 최고의 판소리 관현맹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개개인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합창’은 여전히 넘어야 할 과제였다. 일반적인 합창은 지휘자의 손동작 아래 연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의 연주는 그렇게 진행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다른 연주자들과의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 즉, 지휘 없이도 서로 한 몸처럼 연주를 시작하고 끝맺음 할 수 있을 때까지 손발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최동익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단장은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은 옆자리 연주자들의 소리를 듣고 음, 박자를 맞춰 연주하게 된다”며 “모두가 한 마음으로 호흡을 맞춰 연주할 때 완성된 합창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연 전 피나는 노력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근본적으로 시각장애인 연주자들은 모든 악보와 합주 공식을 모두 외워서 진행한다”며 “때문에 비장애인 음악인에겐 없는 동물적 감각을 가진 ‘천재’ 연주자들을 만날 때가 많은데 이들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다만 예술단 혼자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바로 ‘지원 부족’이다. 현재 장애인 예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곤 하나 여전히 예술단 운영 등에 필요한 지원이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2022년 발표한 ‘장애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예술인 전문예술 역량 성장의 애로사항으로 ‘전문교육기관과 시설 부족’이 62%를 차지했다. ‘교육비 부담(56.1%)’, ‘전문교육인력의 부족(41.8%)’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문화예술 활동을 선보일 장소도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따르면 문화예술 활동 애로 사항은 ‘작품발표·전시·공연 등에 필요한 시설부족(25%)’, ‘연습공간 및 창작공간 부족(23.9%)’ 등인 것으로 확인됐다.
최동익 관현맹인전통예술단 단장은 “실질적으로 장애인 국악 예술인들을 매해 발굴하고 육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2011년 3월 예술단을 창설할 당시에도 보여주기식으로 창단 공연 한 번 진행 후 문을 닫을 위기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하지만 문화 재현이라는 것이 한 번의 공연만 하고 끝나선 안 되는 만큼 당시 정부와 많은 협상을 진행해 예술단이 유지되게끔 만들었다”며 “공성보다 수성이 힘들다는 말이 있듯 처음 설립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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