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26일 대구 달성군 와룡산 세방골에서 어린이 5명의 유골이 발견됐다. 1991년 실종됐던 이른바 개구리 소년들이었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1991년 3월 26일 도롱뇽 알을 줍기 위해 집을 나섰던 5명의 초등학생이 실종돼 유골로 발견됐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사건 진상이 베일에 싸여 있단 점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미제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1991년 3월 26일은 지방 선거일이었다. 학교가 쉬는 날이었다. 그날 오전 대구 성서 지역의 초등학생 5명이 도롱뇽 알을 찾으러 집을 나섰다. 우철원(당시 13세), 조호연(당시 12세), 김영규(당시 11세), 박찬인(당시 10세), 김종식(당시 9세)군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소년들은 와룡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들이 가족들에게 돌아오지 않자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됐다.
당시 경찰과 군인, 자원봉사자까지 포함해 총 35만 명이 동원돼 와룡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와룡산은 해발 300m 정도의 낮은 산이다. 지형이 완만해 동네 주민들이 자주 오르내리는 산책 코스로도 유명하다. 쉽게 수색이 가능했던 곳임에도 소년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종된 소년들에 대한 추측과 소문은 무성해졌다. 납치설, 가출설 등이 분분한 가운데 사건은 점점 잊혀졌다. 그러던 중 2002년 9월 26일 와룡산 세방골에서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와룡산 세방골이다.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됐던 불미골의 반대편에 위치한 깊은 골짜기였다. 발견 당시 소년들의 시신은 땅속에 묻혀 있었다. 죽은 후에 암매장된 것으로 보였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소년들의 유골에 남아 있는 상처를 분석한 결과 “예리한 물건 등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의 시신이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발견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35만 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돼 와룡산을 수색했음에도 그곳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일부 전문가는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사건이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법의학자들은 아이들이 살해된 직후 바로 와룡산에 매장됐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당일 저녁에 비가 내렸고, 그 비로 인해 소년들의 흔적이 씻겨 내려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유골이 발견된 곳이 깊은 골짜기였고, 그곳은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는 외진 장소였기 때문에 수색대가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가장 큰 의문 중 하나는 소년 5명이 어떻게 한꺼번에 살해됐느냐는 점이다.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나 있었기에 범인이 혼자서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범죄심리학자는 어른 하나가 소년 다섯을 한꺼번에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운동 신경이 뛰어난 아이도 있었다. 태권도를 익힌 아이도 있었고, 육상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달리기가 빠른 아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한꺼번에 살해된 것은 범인이 이들을 차례대로 한 명씩 제압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범인이 아이들을 각각 흩어지게 만든 뒤 한 명씩 납치해 살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예컨대 범인이 아이들에게 “탄피가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며 유인했거나, 각자가 다른 구역을 탐색하게 한 후 하나씩 제압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 중에서 가장 힘이 세고 나이가 많았던 우철원 군의 두개골에는 25곳이 넘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는 그가 가장 강하게 저항하다가 범인에게 살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소년들보다 더 큰 저항을 했던 그는 본보기로 더 잔혹하게 공격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김영규 군의 옷소매와 단추가 찢어져 있었다. 범인과의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와 달리 박찬인·조호연 군은 특별한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은 교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됐다.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유골이 발견된 후에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다각도로 조사했지만 결정적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존재한다. 범인이 혼자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소년들을 한꺼번에 제압하고 살해한 후 묻을 만큼의 시간과 도구를 준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건은 사전에 계획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많다. 또한 범인이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세방골은 와룡산에서도 가장 깊고 외진 곳이기에 그곳에 유골을 묻은 것은 범인이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개구리 소년 사건은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사건 이후 이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고, 실종아동법과 범죄피해자구조법 등이 제정되는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단 점에서 가족들과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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