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간계에 이용당한 남북협상파
태연히 통일 논리 뒤집는 재주꾼들
국민 희망 고문하고도 사과는커녕
‘평화통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명제였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김구(金九)의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泣告(읍고)함’(1948. 2. 10) 한 대목이다. 그해 4월 19일 아침 김구는 평양의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全朝鮮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 4.19~4.26)에 참가하기 위해 경교장을 나섰으나 청년단체, 학생단체, 기독교단체, 부인단체, 월남 동포 등 수백 명이 가로막는 바람에 다시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는 2층 베란다에 나와 군중에게 외쳤다.
“북한의 빨갱이도 김일성이도 다 우리들과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그러니까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봐야 한다.”
그렇지만 군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후 2시쯤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던 그는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5월 5일 서울로 귀환했다. 양김(兩金)은 공동성명을 통해 연석회의 및 김일성(金日成), 김두봉(金枓奉)과의 ‘4김 회담’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둔 듯이 주장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이들은 북측의 간계에 철저히 이용·농락당했을 뿐이었다.
북측 간계에 이용당한 남북협상파
북한지역에서는 이미 1946년 2월 9일에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이 소련(구소련)의 주도로 선포되었다. 김일성은 그해 8월 15일 이 위원회를 ‘전체 인민 의사와 리익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중앙주권기관’이라고 선언했다. 중앙정부가 수립됐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 위원회는 그해 11월 3일 선거 절차를 거쳐 이듬해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됐다. ‘임시’가 아닌 ‘정식’ 정권을 세운 것이다. 역시 소련이 주도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은 1948년 4월 29일 북조선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승인됐다. 소련과 김일성 집단은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북한 단독정부 수립의 들러리로 이용했다.
김구 등 남한의 남북협상파는 북한의 정세를 너무 몰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북한에서는 분단 정부 수립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협상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추구한 배경을 그렇게밖에 달리 추측하기는 어렵다. 남한 정부의 수립을 한사코 반대하고 방해하면서도 북측 상황 변화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니! 북한 정세를 꿰뚫고 있었지만 통일 정부 수립의 열정 때문에 대한민국 탄생을 저지하려 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북한 정권의 의도에 남한 사회를 맡겨두자는 심사였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분단 이후 남북관계와 정세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북한 정권이었다. 특히 좌파 정권은 북한의 주장·요구에 민감했다. 그들은 때로는 북한의 남쪽 선전대 같은 인상을 줬다. 대리인을 자처하기도 했다(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50회 넘는 정상회담을 했습니다만 그동안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라며 비위를 맞추었다). 우리 국민의 통일 열망을 등에 업고 북측의 사이비 신정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극우, 반민족, 반평화, 반통일, 전쟁광, 냉전’의 세력으로 몰아댔다.
북한의 통치 집단은 우리를 가지고 놀다시피 했다. 좌파 정권 때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이 세팅해 놓은 장기판의 말 노릇을 하는 인상을 줬다. 세계의 선진국이자 두 배나 되는 인구를 가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세계 최빈국 북한의 독재자를 상전 모시듯 한 것은 훗날 ‘21세기 초 세계 정치사’의 미스터리, 혹은 음울한 코미디로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대북 아부(阿附) 정책의 백미는 문 전 대통령의 2018년 9월 19일 밤 평양 능라도 5·1경기장 연설이었다.
태연히 통일 논리 뒤집는 재주꾼들
“나와 함께 이 담대한 여정을 결단하고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여러분의 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께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얼마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확인했습니다.”
낯간지러워 더는 못 옮기겠다. 문 전 대통령, 다른 것은 미루더라도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김정은에 건네준 USB 내용과 9·19 남북군사합의의 배경에 대해서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좌파 정권들이 남북관계에서 무엇을 지향했는지는 국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랬던 문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기존 평화 담론과 통일 담론의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정부에서 실세로 공인됐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같은 행사에서 “통일하지 말자.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라고 역설(자기가 명령권자라도 되는 양)했다. 그는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라면서 “비현실적인 통일논의는 접어두자. 더 이상 당위와 관성으로 통일을 이야기하지 말자”고 말했다. 제3기 전대협 의장으로 1989년 국법을 무시해가면서까지 임수경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파견했던 그 임종석이다. 그 같은 막무가내식 학생운동·통일운동을 벌였던 그가 김정은 말 한마디에 노선을 홱 바꿨다.
김정은에게 남한은 협의나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실험하면서 우리를 염두에 뒀던 적은 없다. 남북한 간에 많은 합의가 있었지만, 저들에게는 금방 휴지로 변할 문건에 불과했다. 북측은 언제나 서명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파기해버렸다. 그런데도 문 전 대통령이나 임 전 실장 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잘못해서 김정은이 노했다고 한다. 북측이 무슨 짓을 하건 우리가 비난하고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좌파 정권의 평화 확보 및 유지 논리다.
김정은은 작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라고 밝혔다. 북한의 자기 완결성·완전체성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까지나 남한과 엮인 반쪽 국가의 처지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인 듯하다.
국민 희망 고문하고도 사과는커녕
북한 주민들에게도 “우리에게 통일의 대상은 없다. 역사와 문화에서 동질성을 가진 동족이 남쪽에도 있다는 환상은 깨부숴버려라. 낙원은 여기밖에 없다”고 윽박지르는 말로 들린다. “적대적 두 국가 관계인 만큼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한 것이 없다. 그 기회가 오면 남반부의 전 영토를 평정할 준비를 하라. 동족에 대한 무력 공격이라는 민족적·도덕적 부담 따위에는 구애될 필요가 없다”라는 자기 합리화·정당화 계산도 읽힌다.
이쯤 되면 문 전 대통령이나 임 전 실장이 당황해할 만도 한데 이들은 아주 태연하고 당당하게 김정은의 뜻에 따르자고 한다. 평화팔이, 통일 팔이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으면 미안해하는 빛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되레 윤석열 정부를 공격한다. 왜 김정은의 화를 돋우어 안보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느냐는 식이다.
“가장 좋은 전쟁보다 가장 나쁜 평화에 가치를 부여한다”라고 했던 문 전 대통령이 남북관계에서 얻고자 했던 평화는 어떤 형태인가? 김정은과의 사이에서 가능한 평화란 일방적 굴종뿐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의 말이 바뀌자 얼른 복창하고 나서는가?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는 낫다.”
이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식의 평화 옹호론이다.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론’과 이에 대한 문 전 대통령, 임 전 실장의 호응에 한마디 보탤 만도 한데 아직 말이 없는 것은 대중에게 먹혀들 교묘한 논리가 떠오르지 않은 탓인가?
문 전 대통령과 그때의 대북정책 참모들, 그리고 이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의 통일전문가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남북한이 양측 정권의 노력을 통해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정말 믿고 있나요? 김정은이 민족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내려놓을 줄 아는 인간형이라는 신뢰가 여전한가요? 그 체제의 속성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남북 간의 평화와 통일이 가능한 것처럼 국민에 대해 희망 고문을 해왔다면 지금이라도 사죄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대로 몰라서 그랬다면 그 ‘무지(無知)의 용기’를 부끄러워해야 할 테고요. 아닌가요?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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