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시절 ‘어떻게 (조국) 민정수석이 사기꾼들이나 하는 사모펀드를 할 수 있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박상기 전 법무부장관 증언)
‘윤석열 검사’의 말대로 사모펀드의 행태는 음습하면서 비정하다는 인식을 준다. 오로지 수익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사모펀드 전문가인 김영수 이스트우드컴퍼니 CEO는 “사모펀드는 평균 5년 내로 투자한 물건·회사를 처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룰은 아니다. 통상적인 경향성이 그렇다. 한국 사회는 IMF 구제금융 사태를 겪은 후 기업, 은행들을 사모펀드들에 넘어간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모펀드는 ‘재벌 경제’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에서 양가적 심성을 불러일으킨다. 주주의 수익이 재벌 오너의 수익보다 중시된다는 점에서 더 ‘민주적’이란 인식이 있다. 장하성 같은 진보 지식인들이 재벌 기업의 경영 개선을 목적으로 사모펀드를 만든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사모펀드의 위상은 다르다. 규모가 커지면서 ‘재벌 경제 체제’를 넘어서는 부작용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영수 CEO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모펀드는 외국계와 토종을 합쳐 1000개를 훌쩍 넘겼다(2023년 기준). 약정액으로 100조원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한국의 최고의 자산가는 재벌 총수들이 아니라 사모펀드 운영자들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과거에는 망해가는 기업을 정상화한 긍정적 사례들이 꽤 있었지만, 덩치가 커진 사모펀드는 ‘견제 받지 않는 경제 권력’으로 작용하며 여러 사회적 부작용들을 낳고 있다.
사모펀드의 부작용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 국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지난 2015년 사모펀드 MBK파트너스는 영국 테스코로부터 7조2000억원에 홈플러스를 인수한 후 20개 점포를 폐점했다. 이익 극대화를 위한 인력 구조조정으로 지역 고용 시장에 냉기를 불어 넣었다. 지난 2021년 MBK파트너스가 인수한 치킨 기업 BHC는 가맹점주에 대한 폭리로 논란을 일으켰다. 2018~2022년까지 BHC의 영업이익의 80% 이상인 4696억 원을 배당으로 가져갔다. 이런 일들 때문에 정치권에선 MBK방지법(국민연금법 개정안)까지 논의됐다.
사모펀드는 알짜 기업을 인수한 후 구조조정을 하거나 핵심 자산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배당금을 챙긴다. 이를 ‘약탈적 경영’이라고 한다. 극단적인 경우 회사의 가치가 높아지면 팔아치우거나, 가치가 없어지면 폐업시킬 수도 있다. 홈플러스와 BHC를 인수한 MBK파트너스의 사례를 보면 된다. 심지어 홈플러스는 추상같은 구조조정을 해놓고 기업 가치가 더 떨어져 현재 자금 회수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다.
둘째, 경제 안보에 대한 악영향의 가능성이다. 토종이니, 외국계니 별칭이 붙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모펀드엔 국경이 없다. 수익을 내서 펀드 투자자들에게 돈을 안겨 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최우선 고려 사항이다.
최근 영풍그룹이 MBK와 손을 잡고 고려아연 지분 확보에 나섰다. 누가 봐도 명백한 ‘적대적 M&A’다. 소비재를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기업은 아니지만 고려아연은 국내 토종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비철금속 분야에서 글로벌 1위(아연, 연, 은, 인듐)를 달성한 기업이다. 소재 산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미래에 비철금속 분야는 국가 산업의 ‘토대’가 되는 기간산업이다. 고려아연은 2차전지 핵심소재인 니켈과 전구체 생산 기술을 비중국 기업으로선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확보, 국내 자본으로 생산시설을 건설 중이다. 경제 안보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기업인 셈이다.
이 국가 기간 산업에 ‘기업 사냥꾼’이 붙었다. 보통 사모펀드는 기업 가치가 하락한 기업을 ‘싼 값’에 사들여 경영을 정상화하거나 구조조정을 단행해 가치를 높인 후 배당금을 챙기거나 매각한다. 그러나 고려아연은 올해 2분기에만 매출 3조581억원, 영업이익 2687억원을 기록한 우량 기업이다.
이미 경영 실적과 기업 가치가 입증된 ‘알짜 회사’를 사들이겠다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고려아연의 옛 동업자 영풍그룹과의 지분 싸움 같은 복잡한 얘기들도 있지만 중요한 건 MBK가 통상의 상식적 행동 범주를 넘어섰다는 데 있다. 특히 장기적 전망으로 신소재 분야에 투자하는 고려아연과 같은 기업이 사모펀드의 단기 차익 실현 목적에 매몰되면 성장 동력을 잃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은 “고려아연은 한국 기간산업 기업으로 중국에 매각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만,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 MBK는 최근 홈플러스 등에 대한 투자 실패로 ‘수익’이 절실한 상황이다. 고려아연 측은 “원자재 공급망에서 자국중심주의가 강해지는 전 세계적 흐름 속에 MBK가 고려아연 대한 적대적 인수에 성공하고, 단기 차익 실현을 위해 고려아연을 매각하게 될 경우 관심있는 기업은 주로 중국계가 대세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만약 중국계 기업에 매각될 경우 국가 핵심전략 산업인 2차전지 분야에서 국가 전략 기술과 핵심 인재의 유출이 우려될 수밖에 없다.
극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여야 정치권은 물론, 지역의 정계와 관가가 한목소리로 영풍그룹과 MBK의 행태를 비판하고 나선 것도 이례적으로 볼만하다. 그만큼 이 문제가 ‘국가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는 의미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은 “단기 수익을 쫓는 사모펀드에는 구조조정과 일자리 감소가 수반되는 것이 다반사”라고 지적했고, “사모펀드의 고려아연 공개매수 이후 경영권 장악을 통한 핵심기술 유출 및 국가기간산업 붕괴에 대해 경계한다”고 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박희승 의원은 “MBK의 고려아연에 대한 ‘적대적 M&A는 홈플러스의 데자뷔”라며 “MBK는 시간이 지날수록 단기 수익에만 집착한 채 우리 사회와 대한민국 경제에 해를 끼치는 모습을 지속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고려아연의 7.57%의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소속 김두겸 울산시장도 ‘고려아연 주식 1주 갖기 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시장 경제의 지배자로 자리잡고 있는 사모펀드에 대한 견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여야 정치권과 지역 정가가 초당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슈도 드물다. 이 정도면 정부가 나설 명분도 충분하다. 사모펀드가 ‘수익’ 추구만을 위해 국가 기간 산업을 이리저리 농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순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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