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
21일 오후 3시,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앞 대학로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를 낀 여성들이 끝없이 늘어섰다. 수만명의 여성이 모였던 ‘2018년 혜화역 시위’ 뒤 6년 만이다. 그때는 불법촬영, 지금은 딥페이크(불법합성)로, 구호만 바뀌고 ‘그대로’인 한국 사회 성범죄에 분노한 이들이 뭉쳤다.
이날 열린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 집회에는 전국에서 모인 6천여명(주최 쪽 추산)의 여성들이 참석했다. 대학로 혜화동로터리 방향 3개 차로를 가득 채운 여성들의 행렬만 약 350m에 이르렀다. 참가자들은 관련 입법을 제대로 하지 않은 국회, 가해자들에 관대한 처벌을 내린 법원, 제대로 된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은 경찰 등을 규탄했다. “불법촬영, 엔(n)번방, 딥페이크 성착취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국가는 무엇을 했습니까!”, “남성들은 언제까지 여성을 성욕 채우는 도구로만 취급할 겁니까. 여성의 삶은 남성의 포르노가 아닙니다!” 분노 섞인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발언대에 오른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불법합성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대학생 ㄱ씨는 “남학우와 조별 과제를 할 때, 그가 가해자는 아닐지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다. 교수·경비원 등 학내 (남성) 구성원 모두가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며 “(그런데도) 저희 대학 에브리타임(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페미들 또 설치네’, ‘젠더 갈등 조장하지 마라’는 식의 글이 무수히 올라왔다. 피해 확산을 막고 여성이 죽어가지 않도록 연대하는 게 젠더 갈등 조장이냐”고 되물었다.
10대 여성 청소년들의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일종의 ‘놀이’로 일상화된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과 처벌마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탓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ㄴ(17)양은 “시위에 참여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조차 두려웠다. 하지만 혼자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정재흔 경남여성회 사무국장은 “피해가 더 심각한 게 지역 아이들이다. 단일 학급이거나 상급 학교가 하나밖에 없어 피해자와 가해자가 거의 6년을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분리 조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교육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당장 가해자를 엄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1일 경찰은 올해 검거된 딥페이크 성범죄 피의자의 약 80%가 10대 청소년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참석자들은 딥페이크 성범죄는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과 함께 발전해 온 한국 사회 성범죄 역사의 한 단면일 뿐이라며, 그동안 국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성범죄 증거를 수집하고 경찰 수사에 협조해 온 ‘프로젝트 리셋’ 팀은 “우리 사회는 ‘자라나는 남성들이 그런 짓 좀 할 수 있다’며 불법합성 범죄를 사실상 방조해 왔다”며 “딥페이크 범죄는 오래된 디지털 성범죄 역사의 한 끝자락일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남성들의 여성 착취가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 함께 진화해 왔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여성들이 힘든 싸움을 해 올 동안 과연 국가 기관은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상도 비혼여성공동체 ‘위드’ 소속 ㅁ씨도 “디지털 성범죄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범인 문제”라며 “미국이나 유럽처럼 정부가 앞장서 디지털 플랫폼을 철저히 규제해야 한다”고 짚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집회 내내 여성들은 옆자리에 앉은 이들과 안부를 묻고 응원을 보냈다. ㅅ씨는 “제 친구가 대학 학과 단체 대화방에서 자기 얼굴을 담은 성착취물이 떠도는 것을 알고 제게 자퇴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 뒤 연락이 끊겼다”며 “피해자와 함께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제 친구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꼭 살아있어 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겨레 김채운 기자 / cw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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