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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에 쌓여 있는 쌀가마와 창고 건물. 사진제공=인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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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곳이다. 참기름을 짤 때 고춧가루를 빻을 때 그리고 추석 명절이면 떡을 맞추고자 방앗간을 이용한다. 우리나라 방앗간은 인력을 이용하는 디딜방아, 동물을 이용한 연자방아, 물을 이용한 퉁방아와 물레방아로 나눠져 있었다. 개항 이후 스팀 동력을 이용한 방앗간이 들어서긴 전까지 이런 형태의 방앗간은 동네에 한 두 개씩은 있었다. 반면 서양의 방앗간은 쓰임새가 다르다. 추수한 밀을 빻아서 빵을 만들어 먹는 식생활이기에 곡식을 도정하는 정미소라고 부르는 게 맞을 터다. 그렇다 보니 개항 이전 국내 최대 미곡 집산지였던 인천에서는 벼를 가마채로 배에 실어 수출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거워 경제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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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당시 인천에 설립된 가등정미소 인천지점 모습. 자료제공=인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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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벼의 겉겨를 벗겨 현미 상태로 수출하는 매갈잇간이 생겨났고, 백미도정이 가능한 정미소가 생겨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개항 이후 인천에서는 보다 발전된 국내 최초의 근대식 스팀 동력기를 이용한 정미소가 설립된다. 스팀 동력기를 도입한 정미소는 1892년 미국인 타운센드(W.D.Townsend)와 일본인 오쿠다(奧田直次郞)가 합작한 회사다. 당시 사람들은 타운센드를 우리식으로 ‘담손이’라고 발음하면서 정미소 역시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담손이 방앗간에서는 1889년에 미국에서 발명된 최신식 스팀 동력 정미기 4대로 운영됐다. 하루에 정미기 한대당 쌀 16 가마 도정이 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담손이에서는 4대의 정미기로 64 가마 도정한 셈이다. 특히 정미기를 통하면 모래와 돌이 섞이지 않는 것은 물론 미곡의 표면이 깨끗하고 광택이 나는 최상급의 백미로 도정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담손이 방앗간에서 도정된 쌀은 수정처럼 뽀얗다고 해서 ‘수정미’라고 불렸다. 정작 도정된 쌀은 일본으로 수출돼 조선 사람들은 맛보기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개항 이후 최대 미곡 수출항이었던 인천항은 미국에서 개발된 최신식 스팀 동력 정미기의 도입으로 정미업 발달을 가속화시켰다. 이를 계기로 인천에는 대형 정미소를 비롯해 소형 정미소가 여럿 설립돼 인천 공업에서 정미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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