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하고 꽉 막힌 공간에 들어섰다. 자욱한 연기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고 두려워졌다. 주택화재 현장에서 소방관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저 안에 들어가면 앞이 하나도 안 보여요. 벽을 짚으면서 감으로 들어가야 해.”
옷으로 코를 가리고 허릴 굽혔다. 유일하게 보이던 초록색 유도등. 그것만 계속 따라갔다. 삶의 동아줄 같은 불빛이었다. 몸 안쪽에서 방망이를 두드리듯 심장이 쿵쿵거렸다.
가까스로 바깥에 빠져나와 생각했다. 실제 연기였다면 죽을 수도 있었겠다고, 이 속도로 대피했다면.
다행히 실제 화재는 아녔다. 그래서 대피한 뒤 길고도 천천히, 숨을 다시 고를 수 있었다.
100분간의 재난 체험이었다. 땅이 흔들렸다가, 불이 났다가, 배에 물이 차오르는 상황이 펼쳐졌다. 지진이 났을 때 현관문을 먼저 열어야 하는 줄 몰랐고(문이 찌그러지므로),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입었다가 탈출에 방해가 되는 걸 몰랐으며(떠오른 채 헤엄칠 수 없으니까), 다급히 소화기를 잡았는데 안전핀이 안 뽑혀 당황했다(손잡이를 꾹 누른 채여서).
과정마다 세보니 최소 5번은 죽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체험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면.
그게 벌써 2년 전 얘기다. 이후 당연히 내겐 그런 일이 피해 갈 것처럼 까먹고 지냈다.
지난달 22일 저녁. 부천 호텔에서 불이나 7명이 숨졌을 때, 완강기 사용법을 몰라 숨진 이들이 있단 걸 알았을 때, 불현듯 잊고 지낸 재난 체험이 생각났다.
완강기를 타본 것도 그때가 40년 생애 처음이었다. 줄을 겨드랑이 사이에 낀단 것도, 벽을 짚으며 내려온단 것도 몰랐다. 발이 아니라 손으로 통통 치면서. 그 중요한 게 베란다 구석에 처박혀 있단 것도 첨 알았다. 거미줄이 드리워진 걸 휘휘 저어가며 벽 지지대에 처음 설치해봤다.
그때 쓴 기사 제목은 ‘우리 집 베란다에, 전 재산보다 중요한 게 처박혀 있었다’였다. 처음 꺼내어본 완강기 얘기였다. 당시 독자 127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을 때, 무려 92%(1172명)가 쓸 줄 모른다고 했다. 단 한 명이라도 기사를 읽기를, 읽은 뒤엔 꼭 연습해보길 바랐다.
[관련기사 : 머니투데이) 우리집 전 재산보다 중요한 게… ‘베란다’에 처박혀 있었다]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재난 훈련의 중요성을 ‘게임’에 비유했다.
“처음 게임하면 잘 죽잖아요. 지형도 모르고, 뭘 가져야 힘이 세지는지도 모르고요. 자꾸 실패하다 보면 점수도 높아지고 순위도 올라가죠. 재난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해봐야 실제 상황에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지요. 그래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100분의 재난 체험 게임을 하며 5번을 죽어 본 덕분에, 그 5번의 경우에 대해서만큼은 죽지 않을 확률을 높이게 됐다. 오감을 통해 반복해서 체험하면, 이성적 판단이 힘든 재난 상황에서도 올바른 대처가 나올 수 있다고. 그러니 100분만 투자해도 나를, 또 곁의 사랑하는 존재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간절함을 또 적어본다.
머무는 곳마다 여기서 불이 난다면, 지진이 난다면, 폭우가 쏟아진다면, 누군가 심정지가 발생한다면, 사고가 난다면, 이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진다면, 대체 어떻게 대처할까 상상해보기를. 상상을 넘어, 미리 경험해 준비하기를. 반복해서. 어디서든 우린 죽을 수 있고, 그땐 정말 기회가 한 번뿐이니까.
이를테면 이런 거다. 며칠 전엔 비상계단을 오르다가 온갖 물건을 가득 쌓아둔 걸 봤다. 해당 층 이웃에게 경고해 치워달라고, 관리실에 전화했다. 불나서 컴컴한 와중에 대피하다가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땐 그게 ‘살인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전화한 뒤 그들의 위험한 짐은 치워졌다.
2001년 9월 11일.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충돌했을 때, 입주한 대다수 기업은 과반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건물 내 모건스탠리 직원은 2947명 중 사망자가 10명에 불과했단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1993년부터 분기마다 한 번씩, 30번이나 불시 훈련을 했단다. 뭘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몇몇 직원들 반발도 있었단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 덕분에, 그리 많이 살 수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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