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왕으로부터 반지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은 귀금속 세공사가 반지에 새길 글귀를 고민하다가 솔로몬 왕자에게 물으니 “왕이 승리의 순간에 이 글귀를 보면 곧 자만심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왕이 낙심 중에 이 글귀를 보게 되면 이내 표정이 밝아질 것입니다.”라고 답하면서 알려준 구절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였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만든 신앙교육서인 미드라시(Midrash)에 나오는 이야기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반은 지났다’라는 말이나, 설마 임기를 다 채울 수 있겠어?라는 소리도 같은 맥락에서 국민들이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얼마나 망가트릴 것인가?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에 처음 나온 이야기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移轉)이었다. 이전의 필요성이나 불가피성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천문학적인 비용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어떤 합리적인 설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역대 대통령 중 최고 수준의 퇴임 후 사저(私邸) 관련 비용이 논란이 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땅값이 저렴한 농촌에 주택을 지으려고 할 때는 ‘아방궁’이라고 연일 비판하던 언론들이, 지금은 무엇이 무서운지, 입을 닫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지금까지도 대선 경쟁자였던 야당대표 검찰 조사를 계속하고 있고, 그렇게 온 집안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괴롭힌 조국 전 장관은 제2야당 대표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재판에 불려 다니고 있다. 법인 카드로 김밥을 구매한 것을 문제 삼아 연일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구는 명품 백을 받아도 검찰이 겸손하게 출장 조사로 마무리하고, 수사심의위원회를 동원해서 무혐의로 불기소한 결정을 옹호하고 있다.
정권을 쟁취하면 자기 사람을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전문성이나 경력과 상관없이 각종 요직에 검찰 출신들을 기용하고, 이명박 정부 시기의 장관들을 돌려쓰는 것을 넘어, 최근에는 임시정부의 항일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사람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하거나 합법적인 노조 활동조차 반대하는 사람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의 인사를 보면 합리적인 인선 여부는 고사하더라도, 국민의 감정이나 최소한의 정치적인 고려도 의식하지 않는 이유에 의문이 든다.
그런데 마침내, 비상계엄 관련 우려가 야당을 통해 제기되었다. 젊은이들은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에서나 들어보았을 계엄령이라는 단어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 자체가 정권 말기 현상이라는 우려를 낳게 한다. 대통령실이나 여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계엄우려에 공감하는 것은, 30년 전 군부독재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참담한 일들이 연일 벌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물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솔로몬 왕자의 지혜가 아니라도, 현 정부의 남은 기간이 2년 반을 조금 넘을 뿐이다. 물론 그 기간 조차도 다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다음 정부를 누가 맡더라도, 현 정부에서 저질러 놓은 일들을 바로잡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 전망되기 때문이다.
부자 감세로 심각하게 줄어든 세수로 인한 재정적자는 차기 정부 출범 이후에도 3년 이후나 되어야 세제개편 효과가 나올 것이라, 당분간 개선될 가망이 없다. 침체된 내수를 살리려면 적자를 감수하고라도 적극적 재정정책을 해야 하는데, 현 정부 재정정책의 실패로 차기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정책의 여력마저 모두 소진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근거없는 R&D 예산 삭감은 집권 4년 차인 내년에는 삭감 이전으로 복원한다고 하는데, 그 동안 투입된 연구비가 사장(死藏)되어 버린 매몰 비용과 젊은 연구자들이 떠난 연구실의 문제, 그리고 우리나라의 성장 잠재력의 훼손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민의 안전을 중요시하는 생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대통령의 지시로 신재생에너지 관련 정책은 모두 중지되면서, 하루가 바쁘게 달려가는 경쟁국가들과 달리 우리의 신재생에너지 관련 기술력은 정체를 넘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렇게 큰소리쳤던 체코의 원전 수출은 미국의 원천기술에 대한 문제 제기로 계약의 이행 여부가 불투명해졌는데, RE100의 시한이 눈앞에 다가온 기업들은 이제 어떻게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과 일본에 치우친 외교는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달라질 국제관계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망가진 대중관계와 대러시아 관계는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암담하다.
최근 의료개혁의 명분 아래 단행된 의과대학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은 응급의료 마비와 의료체계 붕괴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데, 어떻게 수습을 하더라도 앞으로 상당 기간 의사인력 공급의 문제와 의대 교육 파행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영문도 모른 채 사망한 국민은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요행으로 이번 추석 연휴를 잘 넘긴다고 해도, 만일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 유행이 다시 오면, 지금의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방법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비상계획을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이라고 한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돌발 무력 사태나 IMF사태나 금융위기 같은 경제위기, 태풍 지진처럼 갑작스러운 대규모 자연재해 등의 발생 시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계획을 말한다. 외국어를 쓸데없이 즐겨 쓰는 현 대통령 때문에 취지가 많이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이야말로 ‘컨틴전시 플랜’이 요구된다.
이제 사상 최장의 열대야가 끝나고 무더위가 한풀 꺾이면,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국민은 다시 거리로 나설 것이다. 임박하게 느껴지는 계엄령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평화적 시위를 외치면서 다시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남은 2년 반의 국정 파행을 견제하고, 더 이상 나라가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 다시 광화문 혁명의 물결이 요동칠 것이다.
물론 이번 정부를 마지막으로, 마치 하나회 척결을 통해 군부의 정치 개입이 사라졌듯이 검찰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당분간 검찰 출신이라는 이유로 역으로 정치권에 진입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다. 미루어진 특별검사가 여러 사안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를 할 것이며, 연이어 벌어진 억울한 죽음들도 차근차근 원인을 규명해 나갈 것이다.
정권의 장악력이 약해진 것을 느낀 공무원들은 내부 고발을 시작할 것이고, 잘못된 인사는 임기 여부와 상관없이 대대적으로 해임될 것이다. 현 정권을 계기로 드러난 방통위와 같은 합의제 정부 기구의 운영 규칙도 새롭게 정비될 수 있을 것이다.
국정 농단에 관여한 세력들은 수의를 입고 재판정에 설 것이고, 건전재정을 외치면서 실질적으로 부자 감세에 부역한 기재부 관료들도 대폭 물갈이 될 것이다. 부당한 대통령실의 명령 수행에 앞장선 각 부처와 산하기관의 고위 관리들에게도 적절한 감사와 퇴직 후의 책임 추궁과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잘못된 것을 돌려놓는 것만으로 심각하게 망가진 우리나라가 정상화될 수 있을까?
정권 교체가 언제 되더라도 차기 정부의 과제는 쉽지 않을 전망이기 때문에, 현 정부에서의 1보 후퇴가 차기 정부에서의 2보 전진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이제는 좀 더 슬기롭게 준비해야 한다. 광화문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와 같이, 차기 정부도 인수위 없이 바로 집권을 시작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집권을 준비하는 정당이라면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을 준비하고, 각 분야별로 비공개로 팀을 구성하여 정권 교체 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망가진 외교 정책을 정상화하기 위해 4강에 특사를 파견할 때 누구를 보낼 것이며 어떤 미션을 줄 것인지에서부터, 미국과 일본 중심의 편향된 외교를 중국과 러시아도 같이 참여하는 균형자 외교관계로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 준비해야 한다. 그동안 소외된 신남방정책과 무시된 신북방 정책도 다시 가동해야 한다. 대중 수출이 이전과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지구 온난화로 열린 북극해를 활용하는 방안도 세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지역 상품권을 통한 내수 활성화 뿐 아니라 신재생 에너지 정책, 다양한 중소기업들과 벤처 기업들이 상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준비하는 것도 침체된 경제를 살리는 여러 가지 방안들의 조합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심각한 재정적자 해소를 잠시 미루고, 당분간 부자 감세 철회를 넘어 실효세율 정상화를 통한 간접적인 증세와 소비를 진작하고 경기를 부양을 할 수 있는 정책에 대해 각 부문별로 준비를 해야 한다. 축소된 복지를 회복하고, 미루어진 연금 개혁을 서두를 것이 아니라. 더 내고 덜 받는 현재의 정부안을 수정하여 국민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안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사상 유래없는 전공의 파업과 의대생들의 수업 거부를 계기로 우리나라 의료 공급체계의 전면적인 개편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중지된 문재인 케어를 복원하여 의료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전국에 공공병원을 설립하는 것을 넘어, 전공의들과 전임의들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3차 병원 중심의 문제점 등 이번 사태를 계기로 드러난 의료체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준비하고, 단계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의대 증원과 동시에 의과대학 교육의 정상화와 농어촌지역에 대한 차등수가 적용 등 의료인력의 지역적 불균형 해소를 위한 실질적인 방안도 다각도로 준비되어야 한다.
예전 박정희 시대에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구호가 즐겨 쓰였다. 남북 대치의 휴전 상태에서도 경제성장을 멈출 수 없다는 뜻으로 국민들에게 강요하던 관제 구호였지만, 지금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그러한 자세가 요구된다. 때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맞지만, 조금 일찍 예측하고 준비하면 훨씬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지금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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