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영화 ‘딸에 대하여’는 딸(임세미 분)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하윤경 분)과 함께 살게 된 나(오민애 분), 완전한 이해 대신 최선의 이해로 나아가는 세 여성의 성장 드라마다. 제36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작이자, 혐오와 배제의 폭력에 노출돼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공감을 끌어내며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메가폰은 이창동 감독의 ‘시’, 장률 감독의 ‘춘몽’ 스크립터 출신 이미랑 감독이 잡았다. 그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CGV상, 올해의 배우상(오민애) 수상을 시작으로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CGK촬영상(김지룡)과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감독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이미랑 감독은 소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이 지닌 가치를 고스란히 지켜내면서도, 영화여야만 하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 진정성 있게 담아내 울림과 여운을 안긴다. 원작자인 김혜진 작가 역시 “영화만의 방식으로 작지만 크고 사소하지만 강력한 세부를 섬세하게 조용하게 짚어나간다”고 극찬했다.
개봉을 앞두고 시사위크와 만난 이미랑 감독은 “어느 하나 해당하지 않을 인물이 없다”며 “본인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거울 같은 영화, 보편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면서 더 많은 이들에게 진심이 닿길 바랐다. (*해당 기사에는 영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후 정식 개봉을 통해 더 많은 관객을 만나게 됐다. 소감은.
“단편영화를 찍어서 영화제는 낯설지 않은데 첫 장편영화이기도 하고 개봉도 처음이고 이 영화가 개봉을 할 수 있을까 고민도 했던 터라 내겐 작은 기적처럼 감사하게 느끼고 있다.”
-연출을 결심한 계기는.
“원작 소설이 워낙 유명하잖나. 이미 읽으면서 깊이 공감했다. 공감한 가장 큰 서사는 엄마의 마음이었는데 혼자 늙어가는 여성으로서 잘 묘사돼 있고 두려움과 외로움을 자신이 돌보는 인물을 통과해 딸에게 투영하는 서사가 크게 와닿았다. 2018년에 소설을 읽었는데 그때는 내가 이 영화를 연출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독자로서 엄마의 내면적 언어, 성찰적 언어가 잘 전달된다고 느꼈다. 몇 년 후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는 또 다른 문제인 거다. 순수한 독자로서 읽었던 감흥과 영화화하는 문제는 굉장히 다른 거라서 어떻게 접근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의 답은 무엇이었나. 어떻게 영화로 담아내고자 했나.
“이미 소설이 완벽한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깊이감을 확장하거나 또 다른 주제의 길을 내거나 하면 좋겠지만 깜냥이 안 될 것 같더라. 다른 층위의 깊은 주제적 어떤 걸 보여줄 수 있을까 했을 때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로 문학적 언어, 섬세하고 통찰적 언어를 잘 표현해 보자 했다. 문학이 미처 영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걸 표현해 보자. 영화는 시각과 청각, 쇼트와 쇼트의 병합이라는, 영화만의 언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서 영화적 움직임을 제대로 보여주고 독자가 느꼈을 감정의 문제, 체험의 문제를 갖고 오자. 영화는 체험하기도 하는 매체니까 체험적인 감정을 잘 전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적 매체 안에서 사유하는 과정을 고민했다. 영화의 톤을 정하는 문제부터 캐스팅, 쇼트 구성, 구현 방법 등을 굉장히 많이 고민했고 후반 작업에도 정말 공을 많이 들였다.”
-소설에서는 엄마의 생각, 심리가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는데 영화에서는 말이나 설명보다 인물의 표정, 눈빛, 숨소리 등으로 담아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 같은데.
“원작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엄마 본인만의 언어가 섬세하게 구현된다. 그래서 영화보다 더 뜨거운 사람일 수도 있고 감정의 폭이 큰 사람으로 느낄 거다. 독백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데 용이한 화법이니까. 그런데 영화에서는 독백이 전혀 없다. 영화 속 엄마는 되려 말이 없는 사람이다. 쓰는 문장도 되게 단출한데, 단출해도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할 때 내레이션을 많이 쓴다. 인물의 내면 묘사가 용이한 화법,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는 영화적 언어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애초부터 내레이션을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엄마의 정서를 어떻게 전달할까. 그린과 레인, 제희가 있고 권 과장이 있고 다양한 인물이 ‘액션’을 주고 엄마가 거기에 ‘리액션’함으로써 엄마라는 사람이 드러나길 바랐다. 보통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끊임없이 액션하는 사람이다. 사건을 일으키고 사건으로 인해 성찰하고 발전, 성장하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우리 영화는 그렇지 않다. 엄마는 액션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리액션하는 사람이다. 큰 사건의 반응을 보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드러나게 되고 그 공백, 여백을 관객이 상상으로 채우길 바랐다.”
-오민애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시나리오 혹은 내가 상상한 엄마는 더 눌러지고 차분한 사람이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 그런데 오민애 선배가 엄마 역할을 맡으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영화의 리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목소리 톤을 높이는 순간이 있는데 원래 시나리오에 없던 장면이다.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훅 올라온 거다. 그런 면면들은 내가 상상할 수 없던 거였다. 오민애라는 상상치도 못한 좋은 배우가 와서 그런 지점들을 만들어줬다. 그런 부분이 없었다면 ‘고구마’가 됐을 거다. 평면적 인물이 됐을 거다. 엄마가 자기도 모르는 감정에 휩싸이고 더 깊이 요동치는 감정이 대사로 전해 듣지 않아도 오롯이 느끼잖나. 그건 오민애 선배만이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임세미와 하윤경을 선택한 이유는.
“영화만 보고 자랐고 긴 호흡을 따라가는 게 어려워서 시리즈는 많이 못봤다. 임세미가 주로 활동한 게 드라마라서 배우에 대해 잘 몰랐다. 추천을 받고 나서 봤는데 ‘세미의 절기’라는 유튜브도 하고 비건에 환경운동가이기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더라. 그 모습을 보면서 그린이 가진 신념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임세미가 유튜브를 시작한 게 본인을 드러내는 걸 즐겨서가 아니라 채식하는 것, 환경 운동하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고 하더라. 섬세하지만 투쟁적이고 도전적인 모습이 그린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윤경은 단편부터 쭉 봤다. 스펙트럼이 넓다. 연기가 단단한데 깔끔하다. 밝은 사람인데 가볍지 않고 당당한데 무례하지 않고 곧은데 불편하지 않은 미묘한 정서가 있다. 연예계가 치열하기도 하고 화려하고 복잡한데 그 안에서 단단함을 유지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본인을 잃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은 묘하게 단단하다. 욕망의 투쟁 현장에서 단단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게 레인 같다고 생각했다. 레인도 그런 사람이거든. 어렸을 때부터 본인이 성소수자인 것을 알았을 거고 투쟁적이고 폭력적으로 노출도 됐겠지. 모든 걸 겪고 단단한 사람.”
-엄마의 집, 요양병원 등 공간을 담아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우선 엄마의 집은 처음에는 엄마가 힘들게 들어와서 욕실 청소하고 수박을 파먹고 공허한, 외로움의 정서가 차 있다. 차분하고 느리고 차갑게 보인다. 그러다 레인이 들어오고 그린이 따라 들어오고 제희가 들어오면서 점점 더 사람 사는 집이 돼간다. 어둡던 집에 색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다. 후반부에 가서는 넓은 창에 빛이 들어오면서 당근 케이크를 먹는데 물에 밥을 말아 먹던 엄마에게 변화가 일어나는 거다. 사람이 없던 집에 사람이 들어오면서 온기가 생기고 공동체 감각으로 밝아지게 면밀하게 구성했다.
엄마의 집은 인천 미추홀구에서 실제 노부부가 사는 집이다. 요양원도 실제 파주에 있는 장소이고 그린과 레인이 수박을 들고 걸어오는 길은 홍은동이다. 전국을 돌아다녔다. 세트를 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 공간이 주는 현실의 손때라는 것을 미술로 채우면 좋지만 자신이 없기도 했고 그 공간을 직접적으로 살리고 싶었다. 공간의 연결성을 잇는 것은 편집의 문제였다. 홍은동과 인천 미추홀구가 외형적으로 톤이 맞으면서 골목과 엄마 집 마당이 잘 맞았다. 파주의 요양원은 꽤 좋은 요양원이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에 보기에 부드러운 영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돌봄의 노동이 너무 힘들어서 영화가 전달하는 주제가 미처 전해지지 못할까 봐 보기에 편안한 요양원을 섭외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여전히 요양보호사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엄마의 일상이 나온다. 원작에는 없던 장면인데 해당 신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나.
“원작에서는 엄마의 마음이 쉽사리 열리지 않겠다는 느낌으로 묘사돼 있다면 영화는 조금 더 열리지 않았을까에 기운 방향이다. 엔딩 장면은 두 가지 의미가 들어가 있다. 어쨌든 엄마는 노동을 유지한다. 제희를 보내고도 또 다른 어른을 모시면서 일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삶은 지속된다는 것. 그런데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두 여자가 손을 잡고 걷든 팔짱을 끼든 두 사람이 연인의 관계라는 상상력은 없었을 거다. 그린과 레인을 겪고 나서는 그 둘이 달라 보이는 거다. 연인일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상상하지 못했던 관계가 보인다는 게 성장이라면 성장, 확장이라면 확장인 거다. 우리는 뭔가 알고 겪고 나서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잖나. 나도 이 영화를 찍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돌봄에 대해 알지 못했고 퀴어도 몰랐다. 이 영화를 찍고 배우고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나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처럼, 영화적 캐릭터라는 것도 깨지고 배우면서 약간은 발전해 가면서 끝나거든. 엄마도 그런 거다. 아주 조금이지만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전해졌으면 하나.
“겉으로 보기엔 진입장벽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목적 중 하나가 쉬고 싶어서, 머리를 비우고 싶어서, 속을 통쾌하고 만들고 싶어서잖나. 나도 그렇다. 일상을 버텨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우리 영화도 보고 나면 어떤 지점에서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제희처럼 늙어갈 것이고 우리도 엄마처럼 부모를 돌봐야 하고 비정규직의 누군가일 것이고 사회적 소수자, 약자로 불리지만 어느 하나 해당하지 않을 캐릭터가 없거든. 우리도 누군가의 연인이고. 그런 지점에서 보편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본인의 모습을 비칠 수 있는 캐릭터가 있고 본인을 투영할 수 있는 거울 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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