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의정갈등 중재’에 승부수를 던진 모양새다. 대통령실이 한 대표가 제안한 ‘2026년 의대정원 증원 유예’를 공개 거부했지만 오히려 “(의료현장) 상황이 심각하다”며 맞받아쳤다. 당정 충돌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정면돌파에 나선 것이다. 민생과 직결된 중대 현안인 만큼 물러서지 않고 이를 기점으로 당정 차별화를 꾀하겠다는 행보로 풀이된다.
반면 ‘채상병 특검법’을 두고는 출구를 찾지 못하는 모양새다. 대통령실과 당내 주류의 반대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한 채 주춤하고 있다. 그 틈을 타 더불어민주당은 한 대표가 공언했던 ‘제3자 추천’ 방식의 채상병 특검법 발의를 예고하며 수용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다음 달 1일 여야 대표회담에서 ‘의정 갈등 해소 방안’과 ‘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의견이 오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한 대표가 쟁점 사안들에 대해 뚜렷한 입장표명이나 성과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4월 ‘의대 증원’ 맞붙었던 尹·韓, 입장차 더 커졌다
한 대표는 최근 의료공백에 따른 현장혼란을 막기 위한 해소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대표는 30일 당 연찬회 마무리 후 기자들과 만나 “(의료공백) 대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에 변화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많은 국민이 걱정하는 부분,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 점에 대해 (의료현장이) 심각한 상황이 맞는다는 게 제 판단”이라며 “제 대안이 유일한 정답이라는 건 아니다. 지금 상황이 심각하고 국민 건강과 생명은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돌다리를 더 두드려가며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는 데 대부분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전날(29일) 기자회견에서 의료공백 위기 지적에 대해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일단 비상 진료 체제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답한 가운데, 이를 반박하며 대안에 대한 입장을 재확인 것이다.
한 대표는 앞서 지난 25일 고위 당정 협의회에서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은 그대로 시행하되, 2026년도에는 증원을 1년간 유예하자고 제안했다. 언론 보도 후 초반에는 말을 아꼈지만 지난 27일 페이스북을 통해 유예안을 직접 공개했고, 공개석상에서 “국가의 임무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친한(친한동훈)계 인사인 신지호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도 최근 대통령실을 향해 “거의 달나라 수준의 상황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시민사회수석,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응급실 현장을 쭉 다녀봤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등 직격하고 있다.
반면 대통령실은 ‘의대 증원 유예’를 공개 거부한 상황이다. 의료개혁이 국민 생명권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의료계 반발에 굴복해선 안 되며, 2026년 정원이 대학별로 배정돼 공표된 상황에서 유예를 결정할 경우 오히려 입시 현장 혼란이 커진다는 이유 등에서다.
‘의정 갈등 해소’를 둘러싼 윤 대통령과 한 대표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4월 1일 총선 국면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부산 지원유세에 나섰던 한 대표는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숫자에 매몰될 문제는 아니다”라며 의대 증원 숫자 조정을 우회적으로 요청했다. 이후 정부는 각 학교별로 배정된 의과대학 정원을 자율 조정해달라는 국립대 총장들의 건의를 수용하면서 의대 증원 규모를 2000명에서 1509명으로 줄였다. 하지만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 방침에 반발해 의료공백이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당정 간 현실 상황 인식의 간극이 더 커진 것이다.
한 대표는 취임 후 그간 김경수 전 경남지사 복권 문제, 채상병 특검법 이슈 등 대통령실과 이견 있는 현안에 목소리를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당정 충돌 우려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데는 민심에 기민하게 반응해 집권여당 대표의 존재감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서 큰 부담 없이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정무적 판단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의정갈등이 더 길어질 경우 여론이 악화하면 당내에서도 당대표 역할론에 힘이 실릴 가능성이 있다. 전날 당 연찬회에서 열렸던 의료공백 해소 관련 정부 보고회에서도 의원들 사이에서 정부 대책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한 의원은 “이것 때문에 총선도 졌는데 앞으로 대책이 뭐냐”고 따져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野 ‘제3자 추천 특검법 발의’로 압박…딜레마 빠진 韓
의정갈등 해소에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것과 달리 한 대표는 ‘채상병 특검법’에 대해선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채상병 특검법’ 논쟁은 한 대표가 지난 6월 전당대회 당대표 출마선언에서 이를 약속하면서 비롯됐다. 한 대표는 당대표가 되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 종결 여부와 관계없이 대법원장 등 제3자가 특별검사를 추천하는 방식의 채상병 특검법을 발의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공수처 수사 결과 후 검토’라는 확고한 입장을 세운 상황에서 당시 한 대표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 대표 취임 후에는 대통령실과 당내 반발에 부딪히면서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 대표는 최근에는 “공수처 수사 결과를 보고 특검을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도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라며 미묘한 기류 변화를 시사했다. 당초 더불어민주당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여당 차원의 특검법 발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민주당이 특검법을 여권 분열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판단을 하면서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은 한 대표가 공언했던 ‘제3자 추천 채 상병 특검법’을 발의하겠다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앞서 민주당은 한 대표에게 제3자 특검법을 발의하라며 시한까지 제시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자 먼저 제3자 특검법을 내며 한 대표를 몰아세운 것이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정기국회 대비 워크숍 마무리 행사 발언에서 “순직해병대원 특검법에 대해 야당과 겨우 협의에 들어갔다. 한 대표가 결단을 내려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발의할 제3자 추천안’은 한 대표가 제시했던 것처럼 대법원장에게 특별검사 추천권을 부여했다. 다만 국회의장이 이에 대한 동의·재추천요구권을 갖도록 했다. 특검 권한과 수사대상 범위 등은 기존 안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건희 여사를 수사대상으로 적시하고 특검 증거수집 기간을 확대한 내용이 그대로 담기는 셈이다. 한 대표가 부담을 느껴 이번에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입장 번복이라는 비판을 비껴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한 대표가 채상병 특검법에 이어 ‘의정갈등 중재’ 이슈에서도 주도권을 잡지 못할 경우 당 안팎에서의 리더십이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한 대표가 의정 갈등 부분에서도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당내에서도 (한 대표) 말을 안 듣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며 “만약 극적으로 돌파해 낸다면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대립 국면으로 가면서 독자 생존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성완 시사평론가도 “이제는 한동훈식 리더십을 갖고 정치력을 보여주면서 끌고 나가주는 역할이 보수층에서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을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거나 국회 차원에서 여야 간 합의를 해야 한다. 채상병 특검이나 김건희 여사 문제처럼 어물쩍 물러나는 식이면 안 될 것”이라며 “한 대표가 (당정 간 이견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되면 한 대표에 대한 기대감도 다 사그라들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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