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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최저임금 차별은 美 주도 ‘IPEF 협정’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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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최저임금 차별은) 헌법, 국제기준, 국내법 등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

보수·수구·우익 성향으로 분류되는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청문위원들이 보낸 사전 질의서에 이런 답변을 내놓아 화제가 된 바 있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했는데, 이것도 그런 사례로 봐야 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부 입장에서 헌법·국제기준보다 더 무서운 무역 관련 규범이 있기 때문이다. 각종 FTA에도 노동 관련 챕터가 있지만 지난 글에서 소개한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협정처럼 ‘노동권’을 중시하는 국제 조약도 그렇다.

IPEF 협정에 명시된 최저임금 권리

그럼 IPEF 공급망 협정에 명시된 ‘노동권’은 어떤 개념일까? 친절하게도 협정 본문에는 ‘노동권’에 대한 정의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홈페이지에 이 공급망 협정 한글본이 공개되어 있는데 해당 문구를 살펴보자.

▲ 산업통상자원부의 IPEF 협정 번역본에 나온 ‘노동권’의 정의.

(가) 항목에 등장하는 ILO 선언은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가 흔히 ILO 기본 협약 또는 핵심 협약이라고 부르는 10개의 협약을 의미한다. ILO 선언과 동일한 무게로 등장한 (나) 항목에는 ‘최저임금’이 적시되어 있다.

게다가 ‘노동권’으로서 최저임금 개념을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윤분배, 상여금, 퇴직금 및 건강보험과 같이 근로자에게 임금 관련 수당을 지급하는 모든 요건을 포함한다”고 그 자세한 의미까지 설명하고 있다.

최저임금 권리 = 이주노동자 차별 금지

그런데 대체 통상협정과 국제조약에 ‘최저임금’이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 최저임금은 나라별로 액수도 다르고 운영원리도 다른데 이를 국제적으로 통일시킬 수도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 보통 통상협정에 최저임금이 포함되는 이유는 2가지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무역이 활발한 국가들 사이에서 특정 국가의 최저임금이 심각할 정도로 낮을 경우, 저임금에 기반한 가격경쟁력이 공정한 무역질서를 해칠 것을 우려해서이다. 나머지 하나는 접경국가 또는 노동력 이동이 잦은 국가 사이에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이주노동자가 어느 나라에 가건 그 나라에서 보장된 최저임금 권리를 차별없이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특정 국가를 지목해서 진행되기에 만만치 않은 무역분쟁과 갈등을 전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국제조약에 최저임금이 포함될 경우 그건 대부분 두 번째 사례, 즉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의미한다.

즉, IPEF 공급망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 국가들 사이를 오가는 이주노동자가 협정국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에서 보장된 최저임금 권리를 차등적용 따위 없이 온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최근 한국의 보수진영과 자본가들이 입만 열면 외치는 ‘이주노동자 최저임금 구분적용(차별)’과는 완전히 충돌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IPEF 협정에 참여하는 14개국 중에는 한국에 고용허가제(비자형태 E9)로 이주노동자를 송출하는 4개 나라(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말해 이주노동자 최저임금 차별하자는 주장은 IPEF 공급망 협정을 정면으로 거스르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 차별은 빼박

그런데 최근 이걸 어기자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분들이 있다. 국민의힘 나경원·안철수 의원은 8월 21일에 ‘외국인근로자 최저임금 구분적용’ 공개 세미나를 열기까지 했다. 특히 이 세미나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거론된 사례는 최근 서울시가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 문제였다.

“특히 최근 필리핀 가사도우미가 도입되었으나 임금이 높아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과 함께, 싱가폴·홍콩의 사례와 같은 합리적 임금정책 적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국회 세미나 나경원 의원 인사말)

이 정도 노골적인 주장이면 필리핀 정부가 IPEF 공급망 협정에 의거해 한국 정부에 얼마든지 문제를 제기할 만한 워딩이라 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미 선을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아예 공문으로 법무부에 이주노동자 최저임금 차별을 건의했다는 보도가 나오지 않았던가.

“외국인 가사관리사에 대한 최저임금 적용으로 저소득층의 이용이 어렵고 육아 비용 가중 등으로 당초 도입 취지와 달리 실효성이 우려된다 … 최저임금 이하가 적용될 수 있도록 건의한다.” (서울시가 법무부에 보낸 공문에 포함된 문구라며 「동아일보」가 단독으로 보도한 내용)

이런 내용들을 대한민국 인구 1/4이 몰려 있는 수도 서울의 단체장, 그리고 여당의 중진 의원들이 노골적으로 쏟아내고 있다는 건, 인사청문회 답변 초안 작성 책임을 맡은 고용노동부 공무원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위험천만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게다가 최근 입국한 이주 가사노동자들의 국적은 IPEF 협정국의 일원인 필리핀이니 말이다.

협정 주도한 미국 이해관계도 동일

어쩌면 우익 정치인들의 마음 속에는 굳건한 한미동맹이 최후의 보루로 자리잡혀 있을지도 모른다. 즉, IPEF 협정 주도를 비롯해 WTO 질서도 쥐락펴락 하는 미국이 설마 한국이 당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겠느냐 하는 일종의 ‘비빌 언덕’ 같은 심리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찾았다.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미국이 IPEF 협정을 주도한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중국 견제’다. 그런데 중국이 밉다는 이유로 고립시킬 순 없으니, 강제노동·아동노동 금지와 같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에 명시된 노동권을 명분으로 제시한 것이다. (☞관련기사 :’ILO협약 비준 불량국’ 미국이 무역협정에서 노동권 꺼내든 이유)

이 노동권 영역에 ‘최저임금’이 포함된 것 역시 철저히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아동노동·강제노동이 잦은 곳에서 최저임금 역시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ILO의 규범에다 최저임금이라는 명분을 얹으면 중국에 대한 견제는 훨씬 수월해진다.

실제로 미국은 통상협정, 국제조약에서 ‘최저임금’ 문제를 아주 강력한 명분과 수단으로 밀어붙인 경험도 있다. 트럼프 집권 시절, 미국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깨고 새로운 무역협정(USMCA) 체결을 위해 멕시코·캐나다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최저임금 관련 엄청난 공세를 퍼부은 바 있다.

6년 사이 최저임금 2.8배 상승한 멕시코

트럼프 행정부는 멕시코의 낮은 최저임금이 미국의 제조업 기반을 갉아먹고 일자리를 줄이는 요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미국의 제조업이 멕시코로 빠져나가고,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유입된 멕시코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2018년 시작된 USMCA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에서 미국은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거의 융단폭격을 쏟아부었고, 결국 멕시코 정부는 2019년부터 엄청난 속도로 최저임금 인상을 시작했다. 그 인상 폭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초고속이었는데, 수치를 보면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 2018~2024년 멕시코 법정 최저임금과 북부 국경지역 최저임금.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

트럼프 행정부의 전방위 압박이 진행된 직후인 2019년부터 매년 평균 20%씩 법정 최저임금이 오르게 된다. 2018년 하루 일당 88.36페소이던 멕시코 최저임금은 6년 뒤인 2024년 248.93페소로 무려 2.8배가 오르게 된다. 한국의 우익 정치인이나 자본가들이 멕시코에 살았다면 아마 정권 퇴진운동을 벌이지 않았을까.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상향식 구분적용까지

그뿐이 아니다. 멕시코 북부, 그러니까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는 최저임금 구분적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우익 정치인이나 자본가들이 원하는 하향식 구분적용이 아니라 상향식 구분적용, 그러니까 법정 최저임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정확히는 법정 최저임금의 1.5배)으로 결정되는 구분적용이다.

6년에 걸쳐 연평균 20%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 그리고 북부 국경지역의 경우 법정 최저임금의 1.5배를 적용하는 구분적용, 이 모든 것이 실제로 미국·멕시코·캐나다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무역협정(USMCA) 협상에 바탕해 이뤄진 결과이다.

▲ ‘왜 멕시코 북부 국경지역이 더 높은가’에 대한 ChatGPT의 답.

혹시나 해서 이번에도 ChatGPT에 확인 작업을 거쳤다. 생성형 AI 역시 동일한 취지의 답을 해줬는데, 여기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하나 얻게 되었다. 멕시코 북부지역은 “높은 생활비와 인건비 압력이 존재하기에 최저임금을 더 높게 책정하는 게 필요했다”는 대목 말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필리핀 이주 가사노동자를 사용함으로 인해 “높은 생활비와 인건비 압력이 존재하기에 최저임금을 더 낮게 설정해야 한다”는 한국의 우익 정치인과 자본가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ChatGPT “한국 최저임금 인상에서 답 찾아라”

이주노동자 최저임금을 낮출 게 아니라 한국 노동자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곳에서 해법을 찾은 것이 멕시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내용을 찾아준 생성형 AI를 만든 곳도 미국 회사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우익 정치인과 자본가들이 신주처럼 모시는 아메리카 대륙의 USA는 적어도 최저임금 문제에서만큼은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여당 중진, 서울시장을 비롯한 우익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얘기들은 영문으로 활자화되어 전세계에 퍼지고 있다. 게다가 필리핀은 그냥 영어를 잘하는 나라가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 아닌가. 필리핀 정부와 노동계,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이 한국의 우익 정치인들이 어떤 정책을 제시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무역분쟁은 코 앞에 있다.

미국 대선이 한창이지만 지금 쟁점이 되는 건 선거결과와 무관하다. IPEF 협정을 밀어붙인 바이든 행정부나, USMCA 협정을 밀어붙인 트럼프 행정부나, 최저임금과 노동기본권을 무기로 삼는 태도는 동일하니 말이다. 우익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이 억울하다면 이참에 원정투쟁이라도 기획해보시는 게 어떨까.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아메리카, USA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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