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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음이 중요하다는 윤석열 정부, 아무리 일본 편들어도 과거사 못 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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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시민들의 모임인 평화통일시민행동(대표 이진호)의 ‘2024평화통일시민강좌’를 연재합니다.

2024평화통일시민강좌는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깊이있게 들여다 보고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과 군사력, 유엔사 부활의 문제점 및 5.18광주 항쟁과 미국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월 1회, 서울시청 시민청 혹은 복합문화공간 종로 nuguna에서 진행됩니다.

아래는 지난 7월 20일 서울시 시민청에서 ‘일본의 전쟁범죄 앞에 작아지는 한국 정부’를 주제로 이국언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 이사장이 진행한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국적 포기하겠다” 피해자‧유가족과의 첫 만남

2003년, 광주의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서울 청와대 앞까지 가서 국적 포기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이 어떤 억울한 일로 서울까지 가서 시위를 하려는 것일까, 더군다나 무슨 사연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한다고 하는 것일까 궁금해서 그분들을 만났다.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끌려가 피해를 입었거나 그로 인해 부모를 잃은 분들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일제시대의 문제는 이미 다 끝난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일제시대는 교과서나 박물관에서나 접하는 이야기였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방치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분들은 일본에 가서도, 우리 정부에 얘기해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분들은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해방된 사람들은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죄와 배상은 둘째치고, 이 문제가 이렇게 하찮게 취급되는 것이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계속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기사로 옮겼지만, 그 일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기사 몇 줄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나는 갈등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싶어 한 가지 결심하게 되었다. 피해자분들과 정이 들었고, 그분들이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기자 일을 그만두고, 2009년부터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 이국언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 이사장. ⓒ평화통일시민행동

8개월 아들 두고 끌려간 남편, 할머니는 평생을 싸웠다

내가 처음 만났던 분은 이금주 할머니였다. 당시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님이셨고, 고단한 삶을 사시다 2021년, 102세에 돌아가셨다. 이금주 할머니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존경하게 되었다.

이금주 할머니는 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셨다. 남편도 평안남도 사람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말에 8개월 아들을 남겨두고 남편이 군속으로 끌려갔고,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이금주 할머니는 평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 한 세기를 보내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금주 할머니는 자신이 거처하던 곳에서 홀로 피해자들의 울분을 들으며 평생을 싸워오셨다.

일제 시대 때, 군인, 군무원, 노무자 등이 일본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학계에서는 국내에서 중복 동원을 포함해 782만 명이 강제 동원되었다고 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같은 경우에는 따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수치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어떤 연구자는 20만 명, 다른 연구자는 30만 명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수치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런 불명확한 수치들은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동원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한다.

일본은 전쟁 당시의 동원을 합법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총동원법’을 통해 국가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동원할 수 있는 법적 체계를 갖췄기 때문에, 조선의 국민들도 대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간주되어 합법적으로 동원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은 “이미 끝났다”고 주장하며 반성 없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일본 가면 중학교 갈 수 있게 해줄게’

오늘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양금덕 할머니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본에 가서 일하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서 일본 전투기 제조 공장이었던 미쓰비시에 끌려가서 일했다.

양금덕 할머니는 반장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당시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남학생도 아닌 여학생이었기 때문에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에 가면 중학교에 갈 수 있다”라는 제안은 조선 여학생들에게 정말 큰 유혹이었다.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달려가 “나 일본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라고 말씀드리니 부모님은 일본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며 반대하셨다. 양금덕 할머니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중학교 보내줄 능력도 없으면서, 왜 내가 공부할 기회를 막느냐”고 따졌다.

당시 교장 선생님이 반에 들어와 일본에 갈 수 있다고 보증서듯이 이야기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에 가서 맞닥뜨린 현실은 전혀 달랐고, 아이들은 꼼짝없이 강제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 교과서에 실려야 합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약 300명의 아이들이 비행기 공장에 끌려갔고, 그중 일부는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그 공장이 있던 나고야 지역에 큰 지진이 발생해 1000명이 넘게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쓰비시 공장도 건물이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13살 아이들 중 전라도에서 온 6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고, 신문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신문 내용에 따르면 아이들이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까지도 일본을 위해 비행기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어 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가능한 이야기였을까?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당시 일본이 전쟁의 두려움을 없애고 국민들을 충성하게 만들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삼았던 예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역사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무고하게 끌고 간 것도 억울한데, 그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후, 이 여섯 명 중 목포에서 동원된 두 명의 아이들의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은 군중대회를 열고, 이들이 훌륭하게 일본을 위해 죽었다고 칭송했다. 한 부모는 “내 딸이 일본을 위해 죽은 것을 명예로 생각한다. 아버지로서 내 딸이 이보다 더 큰 효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고 보도됐다.

유족인 남동생이 현재 광주에 살고 계셔서 직접 만나서 이 기사를 보여드리니 가족들은 여태 신문 보도 사실 자체를 몰랐고, 큰 충격을 받았다. 흔히 ‘나라를 잃으면 초상집 개만도 못한 신세’라고 했는데 주권을 잃으면 국민이 얼마나 비참한 꼴을 당하는지 알 수 있는 예다.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의 공장으로 강제 동원됐다. 이들은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로부터 황민신민화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배우는 것이 당연시됐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일본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특히 이들은 일본어를 알아들었기 때문에 당장 노동력으로 투입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조선의 아이들이 투입되는 공장은 성인의 키에 맞춰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빈번했고, 충청도에서 동원된 한 소녀는 프레스 기계에 4개의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도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죄인이 된 강제동원 피해자들

해방 이후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도 큰 차별과 편견에 시달렸다. 일본에 끌려갔다 온 여성들은 결혼이나 사회생활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에 갔다 왔던 것을 성노예 생활을 하다 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양금덕 할머니도 어렵게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10여 년 동안 바깥 살림을 하다 병들어서 아들 셋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를 구박하고 심각한 인격 모독을 했다.

김성주 할머니 역시 남편이 집안 살림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남자들이 일하는 공사 현장에 나가 일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김성주 할머니는 “평생 가슴을 펴고 큰길을 다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고통을 숨기며 평생을 뒷골목에서 숨어 살아야 했던 할머니는 올해 96세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억울하게 일본에 끌려갔다 온 것이 본인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닌데도 해방 이후에도 죄인처럼 사셨던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본의 책임도 있지만, 이분들을 외면한 한국 정부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김혜옥 할머니의 아들은 사춘기였을 때, “나는 왜 다른 친구들 같지 않게 더러운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게 했냐”며 자해하며 칼을 휘둘렀다. 할머니는 칼을 빼앗는 과정에서 팔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김혜옥 할머니는 1980년 5·18 때 광주에 계셨다. 젊은 대학생들이 계엄군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계엄군의 곤봉에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할머니는 5.18묘역 67번 자리에 안장되어 계신다. 묘비 뒤에는 “역사의 질곡과 사회의 격랑에서 언제나 따뜻한 인정과 정의로운 정신으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못 이룬 「나고야의 한」이 하늘나라에서 이뤄지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 지난해 3월 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와 김성주 할머니가 강제동원 정부 해법을 규탄하고 일본의 사죄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싸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싸움은 1990년대 들어서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무엇을 해볼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1965년 되어서야 굴욕적이긴 하지만 일본과 정식 수교가 맺어졌고 과거에는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못갔다. 1988년 서울올림픽 하면서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그래서 일본에 갈 수도 없었고 독재정권 시절이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유족들이나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모아 일본과 한국 정부를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라고 밝히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전면화됐던 것도 이때부터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 정부에 여러 번 소송을 냈다. 하지만 계속 졌다. 일본 법원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들의 청구권 문제가 끝났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어 한국과 일본이 국교 정상화를 하였다. 이 조약의 부속 협정이 4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일 청구권 협정이다. 이 문서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1조 1. 일본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a)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불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발생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후략)

(b) 현재에 있어서 7백 20억 일본 원으로 환산되는 2억 아메리카합중국불과 동등한 일본 원의 액수에 달하기까지의 장기 저리의 차관으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하고, 또한 3의 규정에 근거하여 체결될 약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업의 실시에 필요한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대한민국이 조달하는데 있어 충당될 차관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 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행한다. 본 차관은 일본국의 해외경제협력기금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하고, 일본국 정부는 동 기금이 본 차관을 매년 균등하게 이행 할 수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전기 제공 및 차관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 협정은 돈을 준 일본이 방식과 용처를 결정한 것이다. 또한 한꺼번에 지급된 것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분할 지급되었고, 한국은 매년 자금 사용 계획서를 일본에 제출해야 했다. 일본은 이를 심사하고, 조건에 맞지 않으면 해명을 요구하고 돈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구조는 일본이 주도권을 쥔 채 자금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이 협정의 제2조에는 협정이 모든 문제를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명시돼 있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한국이 이후에 제기하는 배상 요구에 대해 “모든 것이 끝났다”라며 반박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이 협정 이후에 입장을 바꾸고 국제법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한국이 국가 간 조약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입장은 협정이 모든 문제를 종결시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인의 청구권 여전히 살아있음을 인정한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

2018년, 한국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기존의 협정 해석과 달리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청구권 협정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했다.

협정은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 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 식민지배로 인한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대법원은 경제협력 자금이 피해자들의 권리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법적 대가와는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청구권 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양국은 일제의 한반도 지배 성격에 관하여 합의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해석했다. 따라서 원고들의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은 것은 물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한, 판결문은 국가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함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에 상충된다고 보았다.

일본은 국가의 권한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한국은 국민 개개인의 권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를 강조한다. 일본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전쟁을 위해 국민의 생명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다.

결국 2018년 대법원판결은 단순히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판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그로 인한 논란, 그리고 2018년 대법원판결은 한일 양국 간의 역사적·법적 갈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이 한일 협정에 적극적이었던 이유

1951년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한국은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이 배경에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있었다. 미국은 냉전이 심화되던 당시, 중국, 북한,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핵으로 한국과 일본을 자신의 두리에 묶을 필요가 있었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고전하게 되자 한미일 동맹에 대한 필요성은 더 커졌다. 이를 위해 사전에 한일 간 조약을 맺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전쟁 보급 기지와 군사 수송 거점 역할을 하게 되어 경제적 회복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짧은 시간 내에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의 기업들은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기회를 모색하게 되었다.

1965년 한일 수교 직전, 일본 경제단체들이 일본 정부에 한국과 수교를 맺어달라는 민원을 계속해서 넣었다. 값싼 노동력이 풍부하고 자본이 부족했던 한국 경제는 일본 기업에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이승만도 못 한 한일 협정, 쿠데타로 권력 잡은 박정희는 단숨에 체결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 성장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이승만은 14년간 일본과 협상을 하면서도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일본 문제는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마자 신속히 김종필을 일본으로 보내 한일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자금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협정의 결과로 일본은 한국에 무상으로 3억 달러의 자금과 기술 지원을 제공했다. 이 자금은 한국의 철도, 전력망, 고속도로 등 주요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일본의 유상차관이 무상지원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지하철 1호선의 경우, 일본으로부터 4%대 금리로 돈을 빌려오고 전범 기업 미쓰비시와 마루베니의 합작사에서 만든 객차와 부품만을 사용해야 했다. 납품가는 2배 가까이 부풀려졌고 일부는 박정희 정부에 뇌물로 돌려줬다. (JTBC, 2019.8.5.) 1965년의 한일 협정은 너무나 졸속적이고 굴욕적이었으며 반민족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 아직도 일본 은행에

일본 국회의 질의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지급되지 않은 임금이 여전히 일본 은행에 공탁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1945년 당시의 금액으로 남아 있으며,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의 임금과 강제로 저금한 돈이다.

이 돈은 일본 정부의 일반 회계로 귀속되지 않았고, 여전히 별도로 보관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로 여겨진다. 보통의 경우 10년이 지나면 정부로 귀속되게 되어 있다. 왜 이 돈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일본이 이를 처리하기 어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두고 여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공탁금은 일본 정부도 함부로 처리하기에 민감한 문제라는 인식이 있을 수도 있고, 북과의 협상도 남아 있기 때문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일 수교를 위해선, 북한과도 과거사 청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일제시대에는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족이 남북에 흩어져 있는 경우, 밀린 임금을 누구에게 줄지 현실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점이 있다. 일본은 남한과는 비교적 낮은 조건으로 협정을 맺었지만, 북한과의 협상에서는 더 많은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이 공조하면 일본의 오만한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피해자들이 ‘강제징용’을 숨겨야 했던 이유

정신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실제 의미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대를 일본군 성노예와 동일시하지만, 원래 정신대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신대’의 ‘정’은 ‘앞으로 나아갈’ 정(挺)자로, 일본 정부를 위해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했다. 이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노동력 동원을 포함했다.

많은 여성들이 근로정신대로 공장에서 일했지만, 일부는 결과적으로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속임수나 강제로 끌려갔으며, 처음부터 성노예가 될 것이라고 알지 못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 성노예라는 반인륜적 범죄는 너무나도 큰 충격과 고통이었다.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에 되돌아보는 것조차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인식이 굳어졌다. 이로 인해 실제 공장에서 일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어려웠다. 사회적 인식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 지속된 투쟁

2018년 대법원판결로 일본 기업에 대한 배상 판결이 확정되었다. 이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판결이다. 광복 후 79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진 이 투쟁은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 지속된 사례 중 하나다.

한국은 유일하게 자국 법정에서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해 배상 판결을 얻어낸 국가다. 한국의 대법원판결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다른 국가들도 한국의 사례를 따라 소송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를 막기 위해 피해 보상을 서둘러 진행했다. 특히 중국의 움직임을 우려한 일본이 중국 피해자들에게는 보상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투쟁이 다른 국가 피해자들의 보상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국제사회는 일본에 대한 처리 방침을 정했다. 이 조약은 일본을 관대하게 대하라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2018년 대법원판결을 통해 이러한 국제적 합의를 깨고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으며, 한국 헌법 정신에 따라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현재 한반도 이외 지역으로 강제 동원된 피해자 중 생존자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여 2024년 1월 기준 904명에 불과하다. 10년 전 1만 명이 넘었던 것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피해자들의 고령화로 인한 것으로, 곧 직접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를 막기 위한 투쟁

군함도는 미쓰비시가 운영한 해저 탄광으로 여러 나라 노동자들이 강제동원됐다. 일본인 관리자와 중범죄자, 미군 포로,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일했다. 2015년 군함도가 일본의 산업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 본(Bonn)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천막 농성도 하고 일본대표단을 상대로 항의 행동도 했다.

이 사안은 유네스코 역사상 처음으로 안건 심의가 연기되고 재심의된 사례가 되었다. 의장국이었던 독일이 한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등재를 못 한다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의 타협으로 결국 등재가 이루어졌다. 당시 타협을 했던 정부의 주체가 현재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다. 이는 일본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으며, 무산될 경우 아베 총리에게 큰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 피해자들에게는 사과와 보상을 했지만, 한국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포로들에게는 미쓰비시 사장이 직접 사과했고, 중국 피해자들을 위해 사죄비를 세웠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같은 장소에서 강제 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에 따라 보상과 사과의 정도가 다르다.

일본은 조선이 당시 일본의 영토였으며, 조선인들은 일본 국민으로서 전쟁에 당연히 협력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제동원 문제가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구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고 언급한다. 강제성이 없고 자유 계약에 의한 임금 노동자라고 주장하기 위해 치밀한 계산하에 이런 용어를 쓰는 것이다.

▲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시 소재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 군함도에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강제 노동을 했던 해저 탄광이 있으며 1974년 폐광돼 현재는 무인도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사대 매국 외교

2023년 3월 윤석열 정부는 일본 기업이 직접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뒤집고 굴욕적 해법을 내놓았다. 일본 기업이 직접 배상하지 않고 한국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이 기부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대신 배상금에 해당하는 돈을 ‘판결금’이라는 이름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참으로 굴욕적인 방식이다.

양금덕 할머니는 2022년 9월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편지를 쓴다.

“돈 때문이라면 진작 포기했지요. 나는 일본에서 사죄받기 전에는 죽어도 죽지 못하겠습니다. 대법원에서 승소했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도 몇 년째입니까? 우리 정부 무슨 말 한마디 못하고 있지요. 왜, 무엇이 무서워서 말 한 자리 못합니까?

미쓰비시가 사죄하고 돈도 내놓으세요. 다른 사람이 대신 주면 나는 무엇이 될까요? 일본에서는 양금덕을 얼마나 무시할까요?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준다면 절대로 받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양금덕 말을 꼭 부탁, 부탁한다고 부탁합니다.”

양금덕 할머니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나간 그 시간 그 세월, 자기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매국적 해법은 할머니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00년 전 일로 일본 무릎 꿇으란 생각 동의 못 한다”라고 했다. 왜 100년 전 일인가? 일본은 독도가 자신들의 고유영토라 주장하면서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독도에 대한 발언 수위가 더욱 높아져, 과거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고유영토”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들이 세운 군마현에 있는 조선인 추모비를 포크레인을 동원해 파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실들을 부정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역시 이러한 역사 왜곡의 일환이다. 이 모든 것은 100년 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이다.

김태효 당시 국가안보실 1차장은 YT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렇게 결정하려 한다고 일본에 이야기를 하니 일본이 깜짝 놀랐다”라며 “이렇게 하면 한국 국내 정치에는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우리로서는 학수고대하던 해법이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너무나도 당당하게 밝혔다. 외교란 주고받는 것인데 윤석열 정부는 일본에 다 퍼주었다. 국민의 자존심과 국가의 위상을 크게 손상시켰다.

결국, 현재 상황은 마치 동네 체육대회에서 대표로 나간 선수가 처음부터 경기에 참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다. 정부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응할 의지가 없었다.

시민의 힘으로 무너진 자존심을 되찾아야

작년 시민 모금 운동을 통해 강제동원 제3자 배상을 거부한 네 분에게 1억 원씩 전달해 드렸다. 역사정의, 역사의식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 싸움의 시작은 ‘어떤 부끄러움’과 ‘어떤 미안함’이었다. 일본에서도 뜻을 가지고 함께 싸우는 시민들이 계신다.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300km가 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양금덕 할머니와 함께 싸워 오셨다.

그런데 일본 전범기업은 대법원판결이 있음에도 일본과 한국 정부 덕에 배상을 안 하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김앤장’ 등 한국의 대표 법무법인들이 이 전범 기업들을 변호하고 있다. 전범 기업들이 대법원판결로 물어줘야 할 배상은 이 법무법인에 지급할 선임료의 몇십 분의 1밖에 안 된다.

작년 9월, 인천에 사는 60대 청소노동자가 자필 편지와 함께 모금에 동참하셨다. 편지에는 “방송에서 양금덕 할머니의 그런 추잡한 돈은 굶어 죽어도 안 받을 겁니다는 말씀에 너무 감동했습니다. 할머니의 말씀이 국민들 자존감을 지켜주었습니다. 할머니의 꼿꼿한 정신 고맙습니다. 가해 기업으로부터 사과받을 때까지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시민 모금은 6억 5000만 원 정도 모였다. 텔레비전 광고도 없이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국민들이 십시일반 하여 모인 돈이다. 반면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를 위해 모은 돈이 작년까지 1억 6000만 원이라고 한다. 명분 없는 곳에는 기업도 돈을 안 내는 것이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세우고 국가의 위상을 지키는 길이다. 한국정부가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끝까지 시민들의 힘을 모아나가겠다.

▲ 이국언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 이사장. ⓒ평화통일시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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