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박설민 기자 어린 시절 휴게소에서 호두과자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넋 놓고 본 적이 있다. 호두과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일정한 모양으로 쉬지 않고 과자를 찍어내는 기계가 흥미로웠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에 이르는 호두과자를 만드는 기계는 ‘생산 능력’에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게 했다.
쉼 없이 생산되는 호두과자처럼 상품의 생산성은 산업 현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이는 4차 산업시대의 ‘뇌와 눈’인 ‘반도체·디스플레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우수한 설계, 성능의 첨단 반도체라도 대량 생산이 어렵다면 시장 경쟁력이 없다. 글로벌 공정장비기업들이 ‘슈퍼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역시 원익IPS, 세메스(SEMES)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장비 업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만으로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도쿄일렉트론(TEL), 램리서치 등과 정면 승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전문가들은 첨단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의 열쇠는 산·학·연 협력을 통한 핵심 공정 데이터의 확보라고 강조한다.
◇ 韓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 설계는 뛰어나지만 ‘수율’을 못잡는다
지난 20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동에 위치한 데이터사이언스 강의실, 좁은 강당 내부는 150여명이 넘는 청중들로 가득 찼다. 모두 ‘제7회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진단제어 기술연구회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35도가 넘는 폭염에 강의실 내부 사람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연구회 워크숍에 참석자들은 일반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도쿄일렉트론코리아(TEL),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핵융합연)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계에서 핵심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기술 연구를 선도하는 전문가들이었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한 곳에 모인 이 자리에선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계에 대한 ‘쓴소리’가 이어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신형 반도체 설계에만 매진하고 공정 분야 기술력 확보를 등한 시 한다는 비판이었다. 특히 생산장비의 갑작스런 결함, 불량 등 실시간 공정 상황을 점검하는 ‘공정 진단’ 기술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기둥과 다름없다.
행사 좌장을 맡은 김곤호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진단제어 기술연구회장은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에서 공정 분야, 특히 공정 진단 기술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리며 “미국, 중국, 유럽과의 반도체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지만 한국의 아직 공정 진단 기술은 아직 경쟁국에 밀리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반도체 공정장비는 해외 기업들이 장악한 상태다.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트(Techinsights)’에 따르면 글로벌 반도체 공정장비업체 시장점유율은 미국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17.7%로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기준 매출액은 265억2,000만달러(약 35조2,053억원)을 기록했으며 시가총액은 1,243억달러(약 165조82억5,000만원)에 이른다.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의 뒤를 이어선 △ASML(16.7%, 네덜란드) △램리서치(미국, 12.9%) △TEL(일본, 12.3%) 순으로 집계됐다. 흔히 말하는 반도체 산업 ‘슈퍼을’들이다. 특히 ASML의 경우 지난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본사를 찾아 협력을 논의했을 정도로 반도체 장비 의존도가 높다.
반면 국내 반도체 공정 장비 업체의 글로벌 경쟁력은 크게 뒤처지는 실정이다. 한국 기업인 ‘세메스(SEMES)’는 점유율 1.1%로 13위에 머물렀다. 경쟁사인 원익IPS, ICD 등은 순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원제형 TEL 코리아 대표이사는 “2010년대 고성능 컴퓨팅, 스마트폰, 노트북 산업 성장으로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로 반도체 장비 시장이 급성장했다”며 “TEL의 경우도 지난 10년간 시가총액이 약 14배 커져 약 158조원 규모에 이를 만큼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산업 성장으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에 사용되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요도 급증하고 있어 향후 반도체 공정 장비 기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 공정 핵심 ‘플라즈마’ 제어, AI로 고삐를 쥔다
반도체 공정의 관건은 ‘플라즈마’를 얼마나 잘 제어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온과 전자 밀도가 일정하지 않은 플라즈마는 매우 불안정하다. 즉, 반도체 공정 장비 내부 전기장, 공정가스와 매우 쉽게 반응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초미세 반도체·디스플레이 회로 제작 과정에서 불량이 발생할 확률도 높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전문가들이 제시한 방법이 바로 ‘데이터 기반 플라즈마 과학(Data-Driven Plasma Science, DDPS)’다. 이는 막대한 양의 플라즈마 공정 데이터를 플라즈마 물리 기반의 고성능 컴퓨팅 기술 등을 이용해 분석하는 연구 분야다.
특히 데이터 기반 플라즈마 과학 분야에서 최근 핵심이 되는 기술은 ‘인공지능(AI)’이다. 머신러닝 기반 AI모델에 반도체 공정에서 발생하는 플라즈마 현상 데이터를 학습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존에 인간 엔지니어들이 쉽게 해독할 수 없었던 방대한 양의 플라즈마 현상 데이터를 높은 정확도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미 해외에서는 연구기관·기업에서 데이터 기반 플라즈마 과학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진행 중이다. 현재 가시적 성과를 보인 기업은 미국의 램리서치다. 세계 4대 반도체 공정 장비 제조사인 램리서치는 현재 데이터 기반 플라즈마 과학 기술을 ‘지능화장비 연구팀’에서 개발 중이다.
램리서치는 미국 내 반도체 기업들로 제공받은 반도체 양산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켰다. 이를 통해 AI는 불량 원인 중 가장 연관된 데이터를 찾아낸다. 해당 AI의 플라즈마 공정 불량 탐지 정확도는 약 81% 수준. 인간 엔지니어들의 불량 분석 정확도가 60% 수준임을 감안하면 매우 우수한 성능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램리서치는 이 AI시스템을 적용한 신형 반도체 공정장비를 내달 공개할 예정이다.
전 세계 공학자들은 데이터 기반 플라즈마 과학 분야 연구를 위한 협력도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협력체는 ‘국제 데이터 플라즈마 과학 컨퍼런스(ICDDPS)’다. 2018년 구성된 이 국제학술회는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 핵융합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AI 기반의 플라즈마 데이터 분석 연구를 논의 중이다. 우리나라의 삼성디스플레이, 핵융합연을 비롯, 일본 오사카대, 미국물리학회 (APS), 유럽물리학회(EPS) 등 글로벌 전문가들이 매년 기술 관련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김곤호 기술연구회장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에서 공정진단제어 기술은 센서, 재료, 장비, 제조 공정을 아우르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며 “개발된 공정진단 기술들을 융합해 극한의 제조가 가능한 공정 제어 및 제조 기술의 병합을 요구하고 있는 현재, 데이터 플라즈마 과학 분야 연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韓,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산업 현장의 ‘데이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역시 데이터 기반 플라즈마 과학 분야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핵융합연에서는 2020년부터 ‘플라즈마장비지능화연구단’을 총괄해 연구 수행 중이다. 반도체 플라즈마 공정장비 지능화 기술 개발 및 실증 진행을 목표로 하며 총 예산은 2026년까지 440억원이 지원된다.
윤정식 플라즈마장비지능화연구단장에 따르면 현재 핵융합연 연구팀이 개발한 AI모델의 반도체 불량 진단 정확도는 90% 이상 수준이다. 앞서 설명한 램리서치 지능화연구팀의 81% 수준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이다. 만약 이 AI모델을 반도체 공정 기기에 적용하면 불량률을 최대 25%까지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데이터’ 확보의 어려움이다. 현재 플라즈마장비지능화연구단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등 4개 출연연과 주요 7개 대학이 참여한다. 대부분의 데이터는 실험실 장비를 통해 얻은 것들이다.
반면, 해외 경쟁 연구기관들은 램리서치 등 기업과의 산·학·연 협력 프로세스가 운영 중이다. 이에 산업현장서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플라즈마 분석 AI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 현업 현장에서 바로 적용 가능한 AI모델 구현이 가능하다. 즉, 아무리 우리나라 공학자들이 개발한 AI모델의 성능이 90%로 나왔다 하더라도 실제 현업 현장에서는 그보다 떨어질 수 있다. 반면 램리서치 등 해외기업 모델은 진단 정확도가 80% 수준이라도 현장에서는 훨씬 더 우수한 성능을 낼 수 있다.
따라서 글로벌 반도체 공정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선 현업 현장에서의 우수한 데이터 확보가 필수다. 기업들로부터 데이터를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들의 공정 데이터는 영업기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정보원(NIS)에 따르면 ‘시스템반도체용 첨단 패키지 조립·검사기술’, ‘OLED 설계 기술’ 등은 국가핵심기술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라 철저한 보호를 받는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산·학·연’ 연구 협력체의 구성이 필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국가핵심기술 분야에 속하는 만큼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기관의 공식 지원 하에 철저한 정보보안 및 평가도 뒷받침돼야 한다.
김곤호 기술연구회장은 “반도체 공정 장비 역시 빠르게 진화하면서 공정 관리에 필요한 제어 데이터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며 “가능한 최소한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초미세 나노 스케일의 공정 변화 추적, 공정 변동 원인 정보를 가진 데이터 생산 및 관리, 활용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를 위해서는 산·학·연 연구자들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뿐만 아니라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이 국가핵심기술 분야인 만큼 정부도 데이터 기반 플라즈마 과학 기술을 이용한 공정진단 분야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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