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출시된 순수 전기차 10대 중 9대는 정부의 사후 ‘배터리 안정성 평가’를 받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지난 2019년부터 제조사의 자체 인증(출시 전 평가) 이외에도 열충격, 낙하, 침수 등 배터리 안정성을 사후 재검사하는 ‘자기인증적합조사’(출시 이후 검증)를 시행하고 있다. 다만, 예산·인력 부족 등으로 고가의 수입 전기차는 대부분 검증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제도의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실제 지난 1일 불이 났던 메르세데스벤츠의 전기차 EQE350+를 비롯해 가장 많이 팔린 테슬라의 모델Y 등 고가의 수입차는 대부분 검증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최근 전기차 화재로 인한 피해 확산과 고가의 전기차 출시가 늘고 있는 만큼 새로운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한국교통안전공단 산하 자동차안전연구원이 2019년부터 작년까지 최근 5년 간 진행한 자기인증적합조사를 한 차종은 8대(승용 순수 전기차 기준)에 그쳤다. 조사 대상 차량은 2019년 ▲아이오닉일렉트릭 ▲쉐보레 볼트EV, 2020년 ▲코나EV ▲니로 EV, 2022년 ▲아이오닉5 ▲EV6 ▲아우디 e-tron55, 2023년 ▲제네시스 GV60 등이다.
현재 국내에 배터리 정보가 공개된 전기차가 108개인 점을 감안하면 93%(100개)의 차량이 검증 대상에서 제외된 셈이다. 특히 아우디 e-tron55를 제외한 7종은 모두 국내 생산 차량이다. 고급차가 대부분인 수입 전기차에 대한 검증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실제 지난해 국내 수입차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전기차인 테슬라 모델Y는 1만3885대가 판매됐지만, 아직까지 자기인증적합조사를 받지 않았다. 이 밖에 모델3, 폴스타2, 벤츠 EQE·EQB, BMW iX3·i4 등 베스트셀링 전기차 모델들도 모두 자기인증적합조사를 받지 않았다.
불이 났던 벤츠 EQE350+도 마찬가지다. 이 차량의 가격은 9210만원에서 1억620만원이다. 2022년 출시 이후 지난달까지 총 2252대가 등록됐지만, 판매량이 적다는 이유로 검사를 받지 않았다. 검사를 받은 아우디 e-tron55는 2880대(스포츠백 트림 포함)가 판매됐다.
자동차안전연구원 관계자는 “국내 판매 대수가 많은 차량을 중심으로 연구원이 직접 차량을 구매해 자기인증적합조사라는 이중 안전성 테스트를 시행하고 있다”라며 “판매량뿐 아니라 결함 신고나 사회적 이슈 등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조사 대상을 선정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선정 방법은 공개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정부가 세계 최고 수준의 배터리 안전성 이중 검사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사각지대로 인해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인증적합조사의 배터리 안전성 시험 항목은 ▲열충격 ▲연소 ▲압착 ▲낙하 ▲침수 ▲과충전·방전 보호 등 총 12개다. 국제 기준에는 없는 낙하와 침수까지 평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전기차 화재 피해 증가와 고가의 수입 전기차 출시가 잇따르고 있는 만큼 검증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국 파라시스 배터리를 사용한 벤츠 EQE 1대의 화재로 인해 주차된 차량 87대가 불에 탔고 793대가 그을림 등의 피해를 보았다. 피해액만 1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샘플링’ 방식의 현행 자기인증적합조사가 구멍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며 “‘전기차 포비아’가 퍼질 정도로 비상 시인 만큼, 우려되는 차종을 중심으로 일시적으로라도 올해 안전 검사를 강화해 진행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법 개정을 통해 내년 2월부터는 모든 전기차는 제작사의 자체 검증이 아닌 국토교통부 등 정부로부터 배터리 안전성을 의무적으로 인증받아야 한다”라며 “판매량·가격을 떠나 모든 전기차의 배터리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인 인증 방법·절차 등을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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