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서 저희가 낸 집행정지를 인용하면, 국회도 윤석열 대통령도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정말 여야가 합의를 통해 새로운 방송3법과 방통위법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제가 낸 집행정지 신청이 그런 걸 촉발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정치가 복원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지난달 31일 이진숙 방통위에서 새로 선임된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 6인에 대해 집행정지 신청과 임명 취소소송을 제기한 권태선 이사장이 한 말이다.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김태규 부위원장은 첫 출근 10시간 만에 후보들의 당적 조회, 면접 절차 등은 생략한 채 서로 토론 없이 방문진 이사 6인을 선임했다. 그러자 현 야권 추천 이사들인 권태선 이사장과 박선아·김기중 이사 등이 지난 5일 서울행정법원에 방통위의 방문진 새 이사 임명에 대한 효력 정지를 구하는 집행정지 신청과 임명 취소를 구하는 본안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8월부터 방통위는 줄곧 2인 체제를 유지하며 여러 안건들을 의결해왔다. 권태선 이사장은 임기 1년을 앞두고 김효재 직무대행과 이상인 부위원장 2인의 주도로 해임됐다가 법원이 권태선 이사장의 해임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며 다시 방문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지난 12일 임기가 마무리될 예정이었으나 서울행정법원이 가처분 심문 기일 연기에 따라 신임 이사진 임명 효력을 정지해 오는 26일까지 임기가 연장된 권태선 이사장은 공영방송 이사 선임의 정치 후견주의를 지적하며 “국회는 언론 문제를 언론인 만큼 절실히 생각하지 않는다. 피눈물은 언론 현장에서 흘리고 정치권에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권태선 이사장을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방문진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3년 8월21일 김효재 직무대행과 이상인 부위원장이 권태선 이사장을 해임했다. 이날은 김효재 직무대행 임기 종료 이틀 전이었다. 당시를 회상해 보면?
“해임하기 전부터 방통위에서 방문진을 검사·감독하겠다며 압박을 가해왔다. 2023년 7월6일 방통위가 방문진에 대한 검사 감독을 발표했다. 이미 감사원에서 7월10일부터 현장조사를 나오겠다고 했는데 직원 10명밖에 안 되는 방문진에 방통위와 감사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겠다는 이야기였다. 8월3일 감사원 출석 조사 받고 나오니까 바로 방통위에서는 다음 날 현장 검사 감독을 나왔다. 감사원 출석 조사 직후에는 검찰에 수사 참고 자료를 송부했다고 하더라. 잘못한 게 있지도 않은데 전광석화처럼 나를 해임하려는 걸 보고 ‘이분들이 굉장히 급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조금 무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통위 청문회에서는 무슨 질문을 받았나.
“질문보다도 절차부터가 문제였다. 행정절차법에는 해임당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여러 규정을 두고 있다. 방통위에서 보낸 안내문에도 들어있다. 첫째 나의 해임 결정에 관련된 자료를 열람하거나 복사할 수 있다. 관련 자료를 요청했지만, 관련 자료가 없다거나, 비공개 대상이라면서 한 건도 허락하지 않았다. 해임 처분 통지 이후 청문까지 단 열흘의 시간밖에 주지 않았다. 대응 시간이 필요하니 청문을 연기해달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거부했다.”
-법원이 권태선 이사장 해임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며 다시 방문진으로 복귀했다.
“이런 사안에 대해 집행 정지한 사례가 없다. 처음으로 집행정지 결과가 나온 게 우리 언론계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공영방송 이사직에서 부당하게 해임된 분들은 대부분 집행정지를 신청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통위가 위법적인 해임을 되풀이한 것은 법원이 집행정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저와 김기중 이사가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은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앞으로 함부로 해임하는 일에 제동이 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판결에서 방통위 2인 체제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제가 제기한 소송은 두 개다. 저의 해임 처분을 집행정지해달라는 소송과 후임 인선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이다. 이동관 방통위원장이 취임 후 첫 2인 체제에서 의결한 것이 저의 후임 인선이다. 2023년 8월28일 후임 인선 집행정지를 신청했는데, 고법에서 2인이 하는 것보다 5인이 하는 것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판결을 했다. 처음으로 2인 체제가 문제 있다는 언급을 한 거다. 고법의 판결은 2인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고 나의 해임 사유의 부적절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최근 방통위가 방문진 이사 9명 중 6명만 선임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왜 그렇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이진숙 위원장한테 한번 물어봐야 정확히 알 수 있다. (웃음) 과방위 방송장악 청문회 때 보니까 조성은 사무처장이 6명까지 뽑았는데, 9명까지는 다 선정이 안 됐다고 하더라. 근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이사 3인(권태선 박선아 김기중)이 지난 5일 방통위의 방문진 이사 선임의 위법성을 지적하며 새 이사진 선임 효력정지 신청 및 임명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2인 체제라는 것 자체가 방통위법의 근간을 흔드는 상태다. 방통위법에 따르면 방통위는 기본적으로 국회의 여야가 추천한 3인과 대통령이 추천한 2인으로 구성돼야 한다. 방송의 독립 등과 관련된 심의 의결 사안은 반드시 여야 추천위원이 함께 의결 과정에 참여하는 게 입법취지에 부합한다. 방송의 독립과 관련된 사안은 반드시 합의제의 정신이 지켜져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영방송 이사 선임에 관련한 거다. 제 고법 판결에서도 지적됐고, YTN 최대주주 변경할 적에도 2인 체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 데도 이 상황을 해소하려고 하지 않고, 중요 안건들을 서둘러 처리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방통위 2인 체제가 국민의힘에서는 민주당 탓이라고 주장한다.
“최민희 후보가 2023년 3월30일 날 국회에서 추천받지 않았나? (최민희 후보가 방통위원 후보 사퇴 발표 의사를 밝힌 날인) 11월7일까지 임명 안 했다. 법제처가 7개월 동안 자격심사 하나를 못 했다면 문 닫아야 하는 거 아닌가? 최민희 후보를 임명하지 않은 채 한상혁 위원장을 해임해 3인 체제 만들어 놓고, KBS 이사들을 해임하고 수신료 분리징수를 강행했다. 결국 방통위의 합의제 구조를 변형시켜서 마음대로 독임제처럼 운영하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8월25일 이동관 위원장이 오고 2인 체제가 된 다음에도 최민희 후보를 임명 안 했다. 2인 체제가 편하니까. 김진표 국회의장한테 국회가 추천한 사람들을 임명 안 하는데 항의 안 했냐고 물었더니, 왜 항의를 안 했겠냐고 하더라. 그 당시 양당 원내대표와 국회의장의 주례 회동 때 여러 차례 최민희 후보를 임명하라고 얘기하셨다더라. 그랬는데 ‘용산에서 말을 안 들어준다’는 식으로 해서 해결이 안 됐다고 하더라. 국회에서 추천한 후보를 계속 임명하지 않은 데는 독임제처럼 운영하겠다는 용산 뜻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방문진 이사진 효력 취소 신청 판결에선 어떤 점이 지적돼야 한다고 보고 있나.
“지금 방통위 2인 체제는 방송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헌법의 기본 가치를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방통위의 헌법 유린에 브레이크 걸 수 있는 곳이 법원밖에 없다. 사법부에서 제동을 걸어 줌으로써 헌법이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지켜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26일까지 집행정지한 걸 보면 그 전에 결과가 나올 것 같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후견주의 논란이 계속된다. 방송4법이 대안인가.
“방문진 이사들과 올해 4월 말~5월 초에 독일 공영방송을 보러 갔다 왔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치권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적다는 거다. 독일의 공영방송인 제데프(ZDF)는 텔레비전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추천하는 사람이 3분의 1이 넘으면 안 된다. 다른 사회단체들이 더 많은 추천권을 가지고 있는 거다. 또 하나는 사장 임기에 대한 철저한 보장이다. 사장 해임 권한이 물론 있다. 텔레비전 위원회에서 5분의 3이 찬성하면 가능하다. 그러나 단순히 규정일 뿐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사장의 임기가 5년인데 제일 오래 한 사람은 20년 했다. BBC 사장 평균 재임 기간도 6년이다. 방송 환경이 굉장히 급변하는데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건가를 고민하려면 장기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안형준 사장을) 작년에 해임했으면 1년도 안 돼서 해임하는 거였다. 지금도 해임하려고 한다. 이건 방송산업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거다.”
“정치권이 이런 고민은 안 하는 거다. 내편 네편만 따진다. 언론계 종사자로서 분노를 느낀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내 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해임하고 이런 일들이 막 반복된다는 게 문제 아닌가.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나와 있는 법이 만족스럽냐 아니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제출된 법을 수정했으면 하지만, 정치권의 개입을 줄이는 부분은 의미 있는 진전이다. 방통위법도 방통위 형해화를 막기 위해 손을 봐야 한다.”
-발의된 방송법에서 수정할 부분이 무엇인가.
“학회 추천 몫이 있는데, 기준이 다양할 수 있다. 10명이 모인 학회, 1000명이 모인 학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적어도 역사, 구성원 기준을 세워서 대표성을 좀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시청자 위원을 구성하는 건 방송법에 있다. 그런 걸 참고해서 추천 단체를 명확하게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번에 최민희 의원이 내놓은 수정안은 방문진 이사 수도 좀 줄였다. 21명은 이사회 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정부 때 민주당은 왜 방송법을 개정하지 않았을까?
“저도 묻고 싶다. 민주당 의원들 만나면 도대체 그때 왜 안 했냐고 물었다.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했어야 했다. 민주당에서 열의가 없었던 거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특정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 문제를 언론인만큼 절실히 생각하지 않는다. 피눈물은 언론 현장에서 흘리고, 정치권에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 안 한다. 지금 민주당에서는 열심히 하겠다고 하는데, 국민의힘과도 잘 이야기해야 한다. 어차피 정치는 설득의 작업이다. 민주당이 대화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걸 계속 남기면 국민이 지지할 거고 그러면 국민의힘도 대화에 응할 수밖에 없는 거다. 지금처럼 법안 내놓고 거부권 행사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양당이 합의해서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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