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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협약 비준 불량국’ 미국이 무역협정에서 노동권 꺼내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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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7일, 고용노동부가 6건의 정책연구용역 입찰 공고를 냈다. 그 중 첫 번째 주제가 ‘해외 주요국의 플랫폼 노동 현황과 법제 검토’였다. 와우, 그동안 「인사이드경제」는 플랫폼노동 권리를 보장하는 수많은 해외사례를 소개해왔는데 정부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걸까?

얼마나 켕기는 게 많아서 이런 연구용역을?

▲ 8월 7일자 고용노동부 정책연구용역 입찰공고.

하지만 ‘연구 목적’을 읽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해외사례를 참조해서 한국 플랫폼노동에 대한 보호법제를 논의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향후 FTA 노동章(장, Chapter) 및 IPEF 협정문 이행 관련하여 플랫폼 노동자 보호에 대한 논의가 개시될 가능성”이 있기에 이번 연구를 통해 “양·다자 통상 협상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용역 발주처가 고용노동부 맞아? 통상교섭본부나 외교부 아니야? 하지만 공고의 마지막 부분에는 ‘고용노동부장관’이란 글자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연구를 수행하는 게 아니라, 무역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변명거리를 만드는 일이 고용노동부의 역할이란 말인가. 이러고서 ‘노동약자 지원’을 입에 담다니 원.

FTA와 IPEF가 여기서 왜 나와

하지만 「인사이드경제」가 오늘 다룰 주제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이 아니다. 연구용역의 목적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FTA(자유무역협정), IPEF(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 협정, 이게 오늘 다룰 핵심 주제이다. FTA가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 우선 IPEF 협정이란 게 뭔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IPEF(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for Prosperity) – 직역하면 ‘번영을 위한 인도-태평양지역 경제 프레임워크가 되는데, 2022년 5월에 공식 출범한 이 기구는 명목상으로는 이 지역의 경제 통합, 지속 가능한 성장, 공정한 무역 환경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래 산업통상자원부 보도자료에 나오는 내용처럼 참여국은 미국·한국·인도·태국·필리핀을 비롯해 총 14개국이며, 단순한 무역협정이 아니라 기술, 에너지, 노동, 환경 등 다방면에 걸친 영역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다자간 협정이라 할 수 있다.

▲ IPEF 협정의 개요. 출처 산업통상자원부 보도자료.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협정

하지만 내용을 떠나 형식만 훑어봐도 특정국가를 넘어 경제권 전체의 번영을 추구한다는 명분은 설득력을 잃는다. 우선 4개의 핵심 부문(필라) 모두 논의를 주도한 건 USTR(미국 무역대표부, 필라1)와 미국 상무부(필라 2, 3, 4) 등 모두 미국의 정부기구였다.

아무리 세계무역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고 미국의 패권이 유지된다 하더라도, 세계무역기구(WTO)나 세계노동기구(ILO)는 별도 기구를 설립하고 그 본부를 스위스 제네바에 두고 있다. 그런데 IPEF의 경우 협정 이행을 위한 별도 사무실이나 본부를 두고 있지도 않고, 이 협정을 각 나라별로 비준할 경우 비준서를 기탁하는 곳은 다름아닌 미국 정부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IPEF라는 다자간 협정을 추진한 것일까? 그건 이 협정이 다루고자 하는 여러 필라(분야) 중 가장 먼저 타결된 공급망(Supply Chain)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된다. 공급망 협정은 작년 5월에 타결되었고, 청정경제·공정경제 협정(필라 3, 4)은 반년 뒤인 지난해 11월에 타결되었으며, 무역협정(필라 1)은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타결되었다 하여 곧바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본 협정에 따르면 14개국 중 5개국 이상이 각국 절차에 따라 비준을 거쳐야 한다. 미국, 일본, 싱가포르, 피지, 인도 5개국의 비준으로 공급망 협정은 올해 2월 24일부터 발효되었으며, 한국은 6번째 비준국으로 공급망 협정이 한국에서 효력을 갖기 시작한 것은 올해 4월 17일부터이다.

ILO 협약 비준 불량학생 미국이 노동권을?

공급망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협정의 키워드가 ‘공급망’과 ‘노동권’에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 협정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이 2개이다. 공급망협정 이행을 위한 3대 기구 역시 공급망 관련 2개의 위원회와 ‘노동권 자문기구(Labor Rights Advisory Board)’로 구성된다(아래 도표).

▲ IPEF 공급망협정의 3대 이행기구 도표. 출처 산업통상자원부 보도자료

3대 이행기구의 초대 의장국에는 미국과 한국이 이름을 올렸는데, 미국은 이 협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여지는 ‘공급망위원회’와 ‘노동권자문기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급망 협정에서 얘기하는 ‘노동권’이란 무슨 내용일까?

협정문 곳곳에 ‘ILO 협약’과 ‘ILO 선언’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ILO 선언이란 2022년에 개정된 “작업장에서의 기본원칙 및 권리에 관한 ILO 선언과 그 후속조치”(1998)를 말하는데, 우리가 흔히 ILO 핵심협약 내지 기본협약이라고 부르는 10개의 협약을 의미한다.

190개에 달하는 ILO 협약 중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것들인데, 1998년 선언이 처음 나왔을 때엔 총 4개의 카테고리의 8개 협약을 일컫는 개념이었다. △결사의 자유(87호, 98호) △강제노동 금지(29호, 105호) △차별 금지(100호, 111호) △아동노동 금지(138호, 182호). 여기에 2002년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협약 2개(155호, 187호)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10개의 기본협약 중 꼴랑 2개(105호, 182호) 협약만 비준한 상태로, 대표적인 불량국가로 볼 수 있다. 오죽했으면 한미FTA 노동 관련 회의가 열렸을 때 한국 정부가 미국에 “ILO 기본협약 언제 비준할 거냐”라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을까.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지만, 그런 나라들끼리 3대 이행기구 초대 의장국을 나눠맡은 거다.

미국이 IPEF를 통해 추구하는 한 가지 목적

여기까지만 살펴보더라도 IPEF 협정이 겉으로 표방하는 바와 실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질적인 측면으로 들어가보자. 도대체 미국은 무슨 목적으로 ‘공급망’과 ‘노동권’을 이토록 중시하는 다자간 협약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인 걸까?

1.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견제 :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 협력체를 필요로 했습니다. IPEF는 중국 주도의 경제 블록과 차별화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출범했습니다.

이번에도 ChatGPT의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다. IPEF의 출범 배경을 물었더니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위와 같은 답변을 내오는 것이 아닌가. 그랬다. 미국 입장에서 ‘공급망’과 ‘노동권’은 수단일 뿐, 핵심 표적은 중국을 잡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수단을 통해 어떻게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일까?

답은 ILO 선언에 담긴 사항 중 ‘강제노동 금지’와 ‘아동노동 금지’ 협약에 있다. 중국에서 자동차 부품 생산지로 유명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곳에서 생산된 부품들은 글로벌 공급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위구르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에 대한 광범한 강제노동 의혹이 제기되는 곳이기도 하다.

아하, 그렇다면 이제 이해가 쉬워진다. 그냥 중국이 밉다고 페널티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가장 명분있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강제노동 금지 협약’ ‘아동노동 금지 협약’이라는 노동권 항목이었던 것이다. 미국도 못지 않은 수준이지만 중국 역시 노동기본권 관련 꼬투리 잡힐 만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아-태 지역이 아니라 인-태 지역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유럽과 중국에 이어 동남아시아가 차세대 전기차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관련기사 : 전기차 시장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대륙은 어디일까?). 니켈을 비롯한 전기차 배터리 핵심원료가 풍부한 인도네시아, 그리고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시장으로 평가되는 인도와 태국,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장이 들어서고 자동차 제조업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완성차업체들이 전기차로의 전환속도를 내지 못하는 동안, 이 지역 틈새시장을 노리며 진출한 중국 전기차업체들이 동남아 시장 최강자로 올라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무역장벽을 높이는 방식으로 중국 견제에 나섰지만,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을 때려잡을 마땅한 수단이 없었기에 탄생한 것이 바로 IPEF 협정인 것이다.

미-중 간의 무역갈등을 비롯한 대결과정이 당분간 세계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만큼, 우리 역시 앞으로 ‘아태지역’이라는 단어보다 ‘인태지역(인도-태평양)’이라는 단어를 훨씬 자주 듣게 될 전망이다.

그런데 ‘노동권’이란 면에서만 보자면 미국·중국과 한국이 크게 다를까? 이거야말로 ‘도토리 키재기’라는 비유가 제격인 모양새다. 한국 정부 역시 얼마나 제발이 저렸으면 고용노동부가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목적에다 IPEF 협정문 이행 과정에 타국에서 한국의 플랫폼노동 관련 보호가 취약하다는 문제제기를 할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 적었겠는가 말이다.

요즘처럼 시시각각 글로벌 변화가 벌어지는 시대에 국제적 사건들의 밑바탕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런 사건들은 또한 수많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온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주도한 협정에서 한국이 이렇게 연관되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 ‘뜻하지 않은 결과’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다음에 이어서 쓰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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