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이명박(MB)식 화법은 최악의 대화 유형으로 꼽힌다. 어쭙잖은 경험을 내세워 으스대거나 상대를 억누르려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MB식 화법에서 “아는데”를 빼고 “내가 해봤다”만 남겨둔다면 이것은 훌륭한 말하기 방식이 될 수 있다.
“내가 해봤다”는 경험담이 주는 울림을 처음 느낀 게 스물둘 셋의 대학 시절이었다. 토론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H형님(이라고 불렀다)은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다. 한 번은 땀을 뻘뻘 흘리며 동아리 모임에 왔다. 이사 일을 돕다 왔다고 했다.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며 그 형님이 말했다.
“무거운 이삿짐을 나르면서 산다는 게 무거운 것이란 걸 깨달았어.”
다들 깔깔대고 웃었다. 하는 말의 90%가 농담 따먹기인 사람이라 뭔 말을 해도 한 순간 웃고 넘기기 바빴는데, 이 말 만큼은 내 뇌리에 꽂혔다. 웃음기 속에 숨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읽혔다. 저런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는 게 대단해 보이고 정말 어른 같아 보였다. 경험은 돈 주고도 못 산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를 느꼈다.
「청년 택배 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김희우 지음, 행성B 펴냄)는 십수 년 전 H형님의 말처럼 내게 묵직한 울림을 준 책이었다. 두 이야기 모두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고된 노동에서 비롯된 경험담이라는 점이 특히 닮아있다.
“택배는 절박함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처음 책을 집어 들었을 땐 의식하지 못했는데, 완독 후 책 제목을 다시 보니 ‘살아남기’라는 표현이 유달리 눈에 들어왔다. 저자 김희우는 정말 ‘살기 위해’ 택배 일을 시작했다. 촉망받는 청년 사업가였던 그는 어느 날 믿었던 동료에게 사기를 당했다. 돈을 잃은 것은 물론 사람에 대한 신뢰와 살아갈 힘 또한 잃어 무려 1년 반이나 칩거 생활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통장에 찍힌 잔고 20만 원을 보고서야 그는 “오랫동안 몸을 떠나 있던 정신머리가 돌아왔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막다른 길 끝에서 택배 일을 시작하게 됐다. 다른 일에 비해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고 단기간에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에게는 안성맞춤인 일이었다. 그러나 택배 일을 아르바이트가 아닌 진지한 직업으로 선택하겠다고 말하자 주변에서 모두 만류했다. “내가 널 그런 일이나 시키려고 이렇게 힘들게 키운 줄 알아?”라던 어머니의 말씀은 육체노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변의 반대를 극복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택배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루에 수천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비가 와도 우산을 쓰는 것은 사치”인 게 택배 일이었다. 중노동에 시야가 흐려져 차 사고를 내 그날 번 돈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나오기도 하고, 택배 분실 책임을 따져 묻던 고객에게서 “그러니까 택배 기사 따위나 하지”라는 인격모독성 발언을 듣는 일도 감내해야 한다. 그래도 저자는 타고난 일 머리와 성실함으로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택배 업무를 진득하게 해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숨어들었던 나는 얼마를 벌든 매일 사람과 한 공간에서 지내며 받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택배 배달은 혼자 하는 일이니 그런 두려움이 덜했다. 또 매일 많이 걷고 힘을 쓰니까 자연스럽게 운동도 되고 잡생각을 할 겨를이 없겠다고 예상했다. 그러면 밤에 잠도 잘 올 테고 이만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p73)
저자의 예상대로 고된 노동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는 컸다. 택배 일을 시작한 후로 저자는 그날 하루를 되돌아보려다 바로 잠이 들어버릴 정도로 숙면을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통장 잔고에 쌓이는 돈만큼 마음의 건강도 되찾아갔다. 육체노동이 곧 치유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걷고 뛰면서 책임감이 생기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욕이 생겼다. 택배는 내게 의지를 다질 수 있는 일, 고단하기는 해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일, 다른 무슨 일이든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초심을 깨우는 일이었다. (중략)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나에게 돈을 갈취한 예전 동료에게 차올랐던 증오와 분노부터 비우고자 했다. (중략) 돌아보니 택배 기사 일은 묵은 마음을 비워 내고 새로운 마음을 채우는 과정이었다.”(p257)
시인 장석주는 “일은 영혼의 부패를 막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몸 쓰는 일인 택배 일은 누군가에겐 ‘따위’일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겐 ‘영혼의 부패를 막는’ 가장 강력한 수단일 수 있다. 그러니 저자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직업에서 귀천을 찾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배송 알림 메시지 뒤에 노동자가 있습니다”
“택배가 멈추면 세상은 그날로 마비된다. 사람들은 일상의 모든 것을 택배로 주고받고 팔고 산다. 택배로 보낸 물건이 고객 앞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에는 반드시 택배 기사의 우직한 노동이 동반된다. 사실 자본주의의 모든 것이 그렇다. 편리한 시스템 뒤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땀이 흐른다.”(p8)
저자는 택배 기사들이 겪는 육체노동, 감정노동이 무엇인지 전하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한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사실, 바로 택배 노동자들도 ‘인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는 택배 기사들의 ‘배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과연 택배 기사님들이 나의 ‘택배 기다리는 마음’을 아실까 싶었던 적은 있어도, 기사분들의 배달하는 마음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코로나19가 극성이었던 때, 워낙 택배를 자주 주문하는 통에 기사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문 앞에 간식 박스를 두고 자잘한 주전부리들을 준비한 일은 있다. 기다렸던 택배를 받는 것만큼이나 간식 박스 속 내용물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는 게 당시 내 소소한 기쁨이었다.
“택배 기사들 단체 채팅방에는 이렇게 무심히 자랑하는 글과 함께 고객에게 받은 쪽지와 음료 인증 사진이 가끔 올라온다. 대부분 사오십 대 아저씨인 기사님들이 감사 쪽지를 받고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찰칵찰칵 인증샷을 찍는 광경이 떠올라 귀엽게 느껴진다.”(p204)
이 대목을 읽고서야 ‘아차’ 했다. 내가 택배 기사들의 배달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상상해 보지 않은 것은, 내가 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먹었거나 모른척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비대면 거래가 일상화되면서 택배 기사의 존재를 택배 완료 문자, 줄어드는 간식으로 간접적으로 인식할 뿐이니 그들도 사람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가끔 잊어버린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렇게 귀여운 면모들을 숨기고 있었다니!
모든 택배 노동자가 똑같은 마음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저자는 배달하는 마음을 “상자가 아닌 마음을 전한다는 각오”라고 설명한다. 소중한 고객의 물건을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배달하기 위해 성심을 다하려는 마음이다. 그는 택배 일에 대해 “많은 사람에게 더 편리하고 즐거운 삶을 선사하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그는 일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물건 배달에만 집중했다면, 나중엔 고객과 모두에게 효율적인 배송 방법도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택배 기사에게 일이 더 편해진다라는 것은 보다 적은 시간에 더 많은 택배를 분실사고 없이 정확하게 배달한다는 뜻이다. 이러면 나도 들이는 공에 비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으니 좋고, 고객 입장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택배에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파손이나 분실 없이 택배를 온전한 상태로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받는 것. 어제 주문한 옷을 다음 날 잠들기 전에 받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최소한 저녁 무렵에는 받아야 입고 밥이나 술 약속에 나간다. 그러니 업무를 단순화해 내 일을 빨리 마치면 마칠수록 고객 만족도도 더 높아진다. ‘최소한 내 구역의 고객들은 저녁 식사 전에 택배를 받게 해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니 매일 같은 일을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p122)
택배 상자에는 이렇게 “더 편리하고 즐거운 삶을 선사하려는” 택배 노동자들의 택배하는 마음이 함께 담겨있었다. 주문한 물건이 안전하게 집 앞에 도착하기까지 택배 기사의 우직한 노동이 동반된다는 사실, 택배 기사도 인격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길지 모른다.
“우리가 직접 끊어 낼 수 있는 감정적 학대의 고리는 매일 지나치는 편의점 안에도, 카드사에서 걸려 오는 전화 속에도 있다.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의 절박한 구조 신호는 매일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적인 공간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실수는 관대하게 넘어가는 태도, 따뜻한 말 한마디와 같은 아주 작은 행동이 고리를 끊는 첫걸음이자 누군가의 인생을 살리는 동아줄이 될지도 모른다.”(p212)
마침 이 서평을 쓰는 오늘(15일)은 일 년 중 단 이틀밖에 없는 ‘택배 없는 날’이다. 택배 없는 날에 택배 노동자의 수고로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받은 상자에 담겨 있던 ‘택배하는 마음’ 하나하나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택배하는 마음’을 떠올려볼 수 있도록 한 치의 으스댐 없이 담백하게 소중한 경험을 들려준 저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