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국제정세는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냉전 이후 30여 년 동안 이어져온 세계화가 막을 내리고 ‘미국 및 서방 대 중국‧러시아 및 비서방’의 대결이 심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한편,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방과 비서방이 서로 얽혀왔기 때문에 새로운 냉전이나 대립보다는 다극화된 세계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질서가 어떻게 재편되는지는 한국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한국은 세계질서의 변화 시기마다 자력으로 운명을 개척하지 못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세계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외세의 손에 나라의 흥망이 결정됐고, 지난 세기에는 나라가 분단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2024년 다시 한국은 국제질서 격변기의 한 가운데에 놓이게 됐다. 1876년 개항 이후 식민지, 1945년 해방 이후 분단을 겪은 한국이 이번에도 비슷한 운명에 놓일 것인지를 두고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과 국제문제 전문기자인 박인규 프레시안 상임고문의 대담 ‘정세현-박인규의 정세토크 시즌 2’를 시작한다.
정 전 장관은 지난해 출간한 저서 「통찰」에서 한국이 ‘자국중심성’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자국중심성은 기본적으로 남의 힘을 빌려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면서 왼쪽, 오른쪽, 앞과 뒤에 있는 국가들과 협조하면서 판을 좌우하겠다는 의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며 한국 사회에 이러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정 전 장관은 “외교의 세계에서 ‘가치’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측면이 있다. 외교의 목적이 이익인데 거기에서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마치 ‘뜨거운 얼음’과 같은 것이다. 이는 연결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라며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지키기 위해서 동맹을 맺어야 된다는 것은 미국 같은 큰 나라가 우리 같은 작은 나라를 끌고 가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강자의 명분인 ‘가치’가 마치 외교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정 전 장관은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한국의 대외관계사를 훑어보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생각해보면, 국내정치적 이유로 자국중심성이 있는 외교를 형편없는 걸로 몰아붙이는 경우들이 많았다”며 “현재도 이러한 경향이 답습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가치외교라는 명분하에 ‘친미사대주의’ 외교를 하고 있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그는 “가치 외교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미국을 얼마든지 달래서 같이 갈 수가 있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해야만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는 건 아니다”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지 W.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켜냈던 일화를 소개했다.
정 전 장관은 “가치 외교를 멀리하고 자국중심성만 강조하면서 미국에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 하는 식으로 선을 그어버리라는 건 아니다. 미국의 가치 외교도 이해하는데 우리는 우리대로 챙겨야 할 이익이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며 “가치 외교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미국을 얼마든지 달래서 같이 갈 수가 있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해야만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인규 상임고문은 지난 1876년 및 1945년과 현재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이전과 대단히 다르다면서 대외관계에서 한국이 원칙을 세우고 그에 따른 자기중심성을 가진 외교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적 석학인 브루스 커밍스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늦게 들어갔고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1919년 3.1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서구가 아닌 국가들 중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려 했던 가장 모범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세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소개했다.
박 상임고문은 “1876, 1945, 2022년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사적 전환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앞의 두 번에 제대로 대처 못한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며 “한국 외교의 자기중심성을 확보하려면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힘의 균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판단하고 우리가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제정치가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긴 하지만 평화와 공존, 공동번영을 부정할 수 없으니, 한국 나름의 외교 원칙을 이 정도로 가져갈 수 있지 않나”라며 “특히 ‘공존’의 의미는 체제가 서로 달라도 상대를 인정하자는 것인데, 미국처럼 전 세계를 미국식 체제로 강제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로, 윌슨의 민족자결을 실제로 실천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 상임고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라며 “우리가 지금까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기조가 있으니 중재에 참여하면서 스스로를 규정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담은 지난 7일 서울 공덕동에 위치한 (사)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 주요 내용이다.
박인규 : 2021년 8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갑자기 철수할 때 미국이 이제는 전쟁을 안하려나보다 싶었는데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은 안바뀌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은 1950~75년에는 동아시아(한반도, 베트남)에서,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해 2003년 이라크에 이어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까지 40년 동안 중동 곳곳(아프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예멘 등)에서 전쟁을 했다. 이후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세계 2차대전 이전으로의 회귀를 의마했으며 더 이상 유럽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환상이 깨지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앞세워 대리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에 엄청난 경제제재를 가하며 무너뜨리려고 했는데 이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러시아를 국제 금융결제망에서 쫓아내고 미국 및 서방에 있는 러시아의 외환 달러를 압류했으며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이 조치는 러시아의 손을 들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브릭스 등을 중심으로 한 여러 국가들이 달러 패권에서 자유로운 별도의 경제질서를 만들게 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달러 패권이었는데, 이것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 정보력을 통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맞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인데, 장관님이 지난해 출간하신 저서 「통찰」에서 밝혔듯 한국 외교는 이러한 흐름을 간파하고 나름의 전략을 확립하는 ‘자국중심성’이 결여돼 있다.
해당 저서에서 한국이 미국에 의존하는 이유는 한국 국민들이 미국이 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부분, 또 해방과 6.25 이후 과정에서 미국에 신세를 많이 져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라고 설명하셨다.
적절한 지적인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빌미로 미국이 나토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아시아까지 가져오려는 세계적 사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나 남북 문제도 남북만 잘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변화 흐름을 제대로 봐야 앞으로 북핵문제나 남북문제도 제대로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들의 한 가운데 있다. 최원식 인하대학교 교수는 지난 2018년 「프레시안」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단재 신채호, 민세 안재홍 선생을 언급하며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은 조선의 독립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근대에 들어와서 이들 국가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면 전쟁이 발발했다. 청일전쟁(1894~95년)의 경우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싸움이 시작이었는데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막기 위해 청나라를 불러들이니까 일본도 들어오는 과정으로 전개됐다. 러일 전쟁(1904~05년), 6.25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중심성의 핵심은 한국이라는 장소 또는 한민족이 강대국 간 전쟁에 피해를 봐서는 안된다 부분인 것 같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 당시 동북아 균형자론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당시 국내에서는 ‘균형자'(Balancer)가 될 수 있는 국가는 영국 정도의 헤게모니를 가진 국가여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가 결국 나중에 이를 ‘조정자(Moderator)’로 바꾸기도 했다.
정세현 : 서양에는 ‘대국’이 균형자로서 ‘밸런싱’하는 것이지, 당시 한국 정도의 국가가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있다. 그런데 서양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한국도 그렇게 생각하면,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국은 영원히 자국중심성을 확립할 수 없다.
자국중심성은 기본적으로 남의 힘을 빌려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면서 왼쪽, 오른쪽, 앞과 뒤에 있는 국가들과 협조하면서 판을 좌우하겠다는 의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자국중심성이 발휘되려면 일정 부분 ‘대국 의식’이 있어야 한다. 한국은 국토나 인구로 따지면 대국이 되기는 힘들지만, 문화적으로는 대국이라고 할 수 있다. 소국이 가지고 있는 인식, 즉 다른 나라 힘을 의타적으로 빌리는 식으로 살아남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주도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국내에 있는 학자들앞에서 꺼내면 “우리가 그럴 힘이 있어요?”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미국이 도와주면 하는 거고 미국이 계속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하면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심지어는 “너무 거창한 생각하지 말고 편히 살자”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국중심성이 형성되려면 대국의식이 좀 망상처럼 보이더라도 이같은 인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박인규 : 이건 주체성의 문제라고도 생각된다. 조선 또는 한반도의 독립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의 초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자국중심성을 가지려면 국가를 이끄는 사람들이 세계의 판도를 잘 볼 줄 알아야 하지 않나.
정세현 : 우리 대외관계사의 비극은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중심을 잡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대통령부터 판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참모들의 건의도 받아들일 수 있다.
예전에는 경제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에 경제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 통했는데 이제는 외교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식견 있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돼야 하고, 그러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정치인의 활동이 필요하다.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국제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있어야 한다.
박인규 : 지금 이미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동아시아에서는 대만이나 남중국해, 한반도 등이 전쟁 후보 지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대만과 한반도는 또 다르다.
대만의 경우 중국과 경제적 상호의존이 높기 때문에 대만이 공식적으로 독립 선언을 하거나 대만에 미군이 들어가지 않는 한 중국은 대만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런 상황속에 더 걱정되는 부분은 윤석열 대통령이나 안보 참모, 군 당국 등이 북한 붕괴론의 망상 속에서 나토 정상회의에 불려간 것을 선진국이 된 것처럼 생각하고 가치외교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다. 쉽게 말하면 미국을 일방적으로 쫓으면 우리의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생각인데, 굉장히 위험해 보인다.
첫 번째로는 남북 간 우발적이나마 전쟁이 날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장기적으로 보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미국-유럽으로부터 중국을 포함한 브릭스 등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물론 한국이라는 국가의 태생부터 성장까지보면 미국으로부터 정치적‧군사적‧경제적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당장 북한처럼 할 수는 없고 미국의 정당한 요구는 들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미국의 계획으로 인해 동북아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 상황에까지 끌려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런 부분에서 한국의 국익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입장을 정하기 위해서는 현재 세계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파악해야 한다.
저는 미국이 망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쉽게 망하지 않겠지만 중국이나 러시아, 브릭스가 달러로 유지되는 국제 금융 체제로부터 독립하려고 한다는 부분은 유심히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제3세계 국가들이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를 만드려고 했으나 당시에는 실패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르다. 당시에는 중국이나 소련이 경제적으로 허약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세현 : 우크라이나 전쟁이 사실 미국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이다. 러시아로서는 나토가 자신의 코앞에 까지 들어오는, 인중에 비수가 꽂히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다 보니 ‘특별 군사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응하게 된 것이다.
물론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인 측면 등에서 러시아보다는 우위에 있다. 그런데 미국은 서서히 지고 있는 태양이기도 하다. 이를 인정하기 싫은 미국은 러시아의 특별 군사 작전을 보고도 막을 수 있는 힘이 모자라다 보니 나토를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런 것 자체가 이미 미국이 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0년 헨리 키신저는 미국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 후 조선은 군사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명나라가 우리를 살려줬다고 하지만 일본이 한양을 점령한 후 평양까지 밀고 올라온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올까 겁나서 명나라가 자동으로 개입한 측면이 있다. 임진왜란이 애초에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으로 치고 올라온 것이기도 하다.
6.25도 그렇다. 9.28 수복을 한 뒤에 미군과 한국군이 같이 38선을 넘어서 올라간 것이 10월 1일인데, 평양을 지나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갈 기미가 보이자 이를 본 마오쩌둥이 ‘순망치한’의 원리로 당시 북한을 도와준 것이다. 명분은 북한을 돕는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국으로 불똥이 튀는 걸 막으려고 온 셈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6.25때 미군이 없었으면 공산화될 뻔 했다며 미국에 ‘재조지은’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미국은 소련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참전했을 뿐이다.
이렇듯 국제관계는 실리가 중심이다. 외교의 세계에서 ‘가치’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측면이 있다. 외교의 목적이 이익인데 거기에서 가치를 논한다는 것은 마치 ‘뜨거운 얼음’과 같은 것이다. 이는 연결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지키기 위해서 동맹을 맺어야 된다는 것은 미국 같은 큰 나라가 우리 같은 작은 나라를 끌고 가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강자의 명분인 ‘가치’가 마치 외교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면 안 된다.
광해군은 집권 당시 선조 때 권력이 강했던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동인 중 대북파와 손을 잡았다. 서인들이 워낙 친 명나라 행보를 보였는데, 광해군은 나름대로 국제정치 판세를 읽어서 명나라에 원조 병력을 보내면서도 적절한 수준에서 항복하라고 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어디에 붙어서 국가를 유지하려는 것보다는 명과 청에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자국중심성 있는 외교를 하려고 했다.
이런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서인들이 내건 명분이 명에 대한 ‘재조지은’을 잊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하고 다른 세력은 모두 ‘오랑캐’라고 규정하는 식이었다. 만약 당시 이러한 권력투쟁이 없었다면 이후 조선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국제정치 판세를 정확히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한국의 대외관계사를 훑어보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생각해보면 국내정치적 이유, 즉 당파싸움 차원에서 광해군과 같은 자국중심성이 있는 외교를 형편없는 걸로 몰아붙이는 경우들이 많았다.
‘친명사대주의’라는 가치외교 이외의 외교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은데, 현재도 이러한 경향이 답습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가치외교라는 명분하에 친미사대주의 외교를 하고 있지 않나?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다가 복귀한 소현세자를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 수용하지 못한 것도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무시만 할 것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배우자고 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 입장에서 이러한 소현세자를 그대로 놔두면 자신들이 죽게 생겼으니까 독살한 것이다. 결국 광해군과 소현세자의 경우를 보면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국제정치적 식견이 있는지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더불어민주당도 대외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지 못하는 것 같다. 미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가 나오면 ‘반미’, ‘빨갱이’등으로 공격을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인규 : 대한민국이 살아온 길을 보면 “주한미군 물러가라”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우리가 중국, 러시아와 어떻게 지낼 것인지, 이들과 관계에 ‘가치’를 끌어들여 대책 없이 반목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질문이라고 본다.
즉 ‘민주주의’ 차원에서 우리가 앞서 있다는 자부심은 있을 수 있으나, 그걸 가지고 중국이나 러시아와 적대적으로 지낼 필요는 없지 않냐는, 전술적으로 중러관계도 관리할 필요가 있지 않냐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정세현 : 사실 자유민주주의도 국내 정치 사회 제도 선에서 끝내야 할 이야기다. 그걸 왜 외교에 끼워 넣는다는 것인가. 자유민주주의를 외교와 결부시키면 그게 ‘가치 외교’다.
박인규 : 미국이 우리한테 가치외교를 구실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라고 요구하는 등 압박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것도 어느 정도 설득이 가능한 측면이 있지 않나.
그러니까 2002년 1월 29일 조지 W.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표현하고 나서 그 다음달인 2월 19일 우리나라에 왔는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서 전향적 입장을 끌어내기도 했다.
정세현 : 그렇다. 부시 대통령이 당시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하면서 한국을 가치외교 쪽으로 끌고 가려고 했는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가치 외교에 끌려갈 수 없다는 뜻을 아주 완곡하게 돌려서 이야기 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과 2월 20일 오전 청와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난 뒤 오후 도라산역 연설에서 ”북한을 침략(invade)하지 않고 북한과 대화하겠다“고 밝히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을 설득한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해 전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는 딱지를 붙였지만, 악마의 제국과 꾸준히 대화를 했다면서 북한과 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미국은 자기네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외교를 ‘가치외교’로 포장하면서 우리를 가치외교로 끌고 가려고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는 우리의 지정학적인 특수성 때문에 미국이 가자고 하는 쪽으로 끌려갈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반미’는 아니다, 미국과 같이 가는데 우리의 실속도 챙길 수 있도록 미국도 협조 해달라, 그 범위 안에서 우리도 미국에 협조하겠다”라는 식으로 설득을 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가치 외교를 멀리하고 자국중심성만 강조하면서 미국에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 하는 식으로 선을 그어버리라는 건 아니다. 미국의 가치외교도 이해하는데 우리는 우리대로 챙겨야 할 이익이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니까 미국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가치를 얘기하지만 동북아시아의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로서는 여기서 입지를 조금이라도 넓히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어필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가치도 챙길 수 있도록 서로 양해를 하면서 나가자는 식으로 얘기를 했기 때문에 부시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처럼 가치 외교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미국을 얼마든지 달래서 같이 갈 수가 있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해야만 미국이 우리를 도와주는 건 아니다.
또 실리적 측면을 중점에 두는 외교를 하면 중국과도 얼마든지 협조할 수 있다. 러시아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계속 무기 제공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데도 러시아는 한국이 지금보다 더 나가지 않으면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러시아는 이전부터 한국과 실리적인 외교를 하려고 노력해 왔다. 김대중 정부 시기 남북 간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시도할 때 러시아는 경의선을 타고 중국으로 올라가지 말고 동해선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철도를 연결하자고 했다. 또 나진-선봉 개발에 대해서도 러시아가 한국에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러시아는 한국이 투자하면 자기들도 이익을 챙겨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경제력을 이용하고 싶은 러시아가 기다리고 있는데, 조금만 웃어주면서 손짓하면 북핵 및 미사일 문제 해결에 있어 러시아를 우리에 유리한 쪽으로 만들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러시아로부터 천리만리 도망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미국의 국익에 순종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인데, 대통령 되고 싶은 사람을 대상으로 국제정치에 대해 테스트라도 해봤으면 싶은 생각도 든다.
박인규 : 국제사회에서의 우리나라의 위상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1876년의 조선, 1945년의 한반도와 2024년의 한국은 대단히 다르다.
특히 다른 국가들이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가 한국은 제국주의였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즉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호감도가 높다고 한다.
세계적 석학인 브루스 커밍스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늦게 들어갔고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1919년 3.1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구가 아닌 국가들 중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려 했던 가장 모범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세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쟁 초기 양측의 휴전 협상을 중재한 나라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이었다. 벨라루스에서 시작했다가 터키로 옮겨졌다가 여기에 이스라엘까지 나왔다. 우리도 지금까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기조가 있으니 중재에 참여하면서 스스로를 규정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1876, 1945, 2022년을 강조하는 것은 세계사적 전환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앞의 두 번에 제대로 대처 못한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한국 외교의 자기중심성을 확보하려면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힘의 균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판단하고 우리가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1876년의 실패가 조선의 망국과 일본의 중국 침략 및 태평양전쟁으로, 1945년 이후의 실패가 6.25전쟁과 냉전의 군사화‧분단의 영속화로 이어진 실패가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
미국 말 안 듣는다고 큰일 나는 것 아니다
박인규 :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전쟁에서 진 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미국에 대한 전적인 지지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 미국도 여러 번 패배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졌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결국 철수했다. 그런데 6.25는 UN의 이름으로 미국과 함께하는 국가들이 많았지만 베트남 전쟁 때는 서구의 어떤 국가도 미국을 돕지 않았다. 도덕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의 대러 제재에 참여한 국가는 서방을 비롯해 40여 개국에 불과했다. 나머지 전 세계의 150개 국가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역시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세현 : 도덕적으로 문제가 됐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가 많았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보면 맞는 분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말을 다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말씀하신대로 미국이 그만큼 기울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한국은 미국의 해는 계속 떠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서산을 넘어가지 않는 해는 없었다. 로마도, 대영제국도 모두 기울었다.
미국이 백인들 대장 노릇을 하면서 100년 넘게 글로벌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으나 이미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70%를 넘어섰다. 2049년에 GDP 총액이 미국을 능가하길 바라는 것이 중국의 희망사항인데, 미국에서도 2035년 즈음이 되면 양국의 GDP가 비슷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신기한 것은 조선 인조 때 명나라만 믿는 외교를 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고, 고종 때도 청나라를 추종하는 외교를 하다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었고, 해방 후에는 6.25까지 발발하며 아픈 역사를 겪은 나라에서 왜 지금도 계속 미국 일변도의 외교를 하는지 모르겠다. 역사를 배웠다면 그렇게 하면 안되지 않나.
박인규 : 외교는 실리이긴 하지만 명분도 필요한 것 같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제관계의 민주화라는 용어를 쓰고 미국은 가치외교 또는 규칙에 기반한 질서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우리는 지금 미국 쪽 용어를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용어를 쓸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 평화와 공존, 공동번영에 노력한다는 정도의 입장 표명만 해도 되지 않을까? 국제정치가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긴 하지만 평화와 공존, 공동번영을 부정할 수 없으니, 한국 나름의 외교 원칙을 이 정도로 가져갈 수 있지 않나.
특히 ‘공존’의 의미는 체제가 서로 달라도 상대를 인정하자는 것인데, 미국처럼 전 세계를 미국식 체제로 강제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로, 윌슨의 민족자결을 실제로 실천하자는 뜻이다.
정세현 : 평화와 안정, 공동번영 등도 실리 추구를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혼동하고 있다. 미국도 그런 식으로 가치의 프레임을 씌우는 외교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으로 보인다.
박인규 : 예를 들면 중국은 인류 공동 운명체를 내걸고 강조하고 있다. 자신들의 체제를 다른 국가에 강요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표명한다. 우리는 미국식 외교 원칙을 그대로 수입해서 쓰고 있는데 우리도 한반도의 국익 증진을 목표로 해야 하지만, 이걸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는 명분, 대원칙을 만들 필요는 있어 보인다.
향후 국제관계의 전망을 좀 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제는 국제관계가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같이 번영할 것인지, 아니면 같이 망할 것인지로 봐야 할 것 같다.
2013~14년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체제로부터의 자립을 추구했다. 2013년 일대일로에서 중국은 아프리카와 중남미로 진출하겠다면서 자체 세력권을 만들려고 했다.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 병합을 이유로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제재를 받자 경제 부문에서의 자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실제 201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베이징에서 만나 앞으로 30년 동안 러시아 에너지를 4000억 달러 수출하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가 10년 동안 농업, 제조업 등에서 자립경제를 준비했기 때문에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제재를 가하면서 두 달, 빠르면 2주 안에 러시아 경제가 망할 거라고 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가 아닌 유럽이 러시아 산 에너지 수입을 끊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러시아가 에너지 자원을 팔고 독일이나 프랑스가 돈과 기술을 투입해서 공장을 세우는 것이 러시아와 유럽 간 경제의 선순환이었는데, 이를 미국이 끊어버렸다. 이후 유럽은 러시아에 비해 3~5배 비싼 LNG를 미국에서 사와야 했다. 미국이 저지른 뒷감당을 유럽이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미국 및 서방과 중국, 러시아 등이 중심인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로 세계 경제가 나뉘어져 5~10년 내에 기존 미국과 서방 외에 새로운 경제권이 생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국은 양쪽 모두에 서 있어야 한다.
정세현 : 미국이 지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완전히 망하지는 않는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지 않나. 중국이 떠오르고 있지만 미국을 완전히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생기기 어렵다. 왜냐하면 미국이 그동안 구축해 온 군사‧경제‧정보 질서가 굉장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동안 두 국가가 나란히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은 양쪽 모두에 걸쳐 있어야 한다.
러시아하고도 바로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가까이 지내야 하고, 언제 뒤통수 때릴지 모르는 일본도 달래가면서 남북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 한반도 평화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평화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질 수 있다. 이 정도 관리만 하면 북한도 더 이상 사고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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