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미국 금융권의 과도한 근무시간이 도마에 올랐다. 미국 월가에서 주당 100시간씩 일하던 35세의 젊은 은행원이 급성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한 것. 사망 직전까지 그는 20억 달러 규모의 인수 거래 때문에 몇주째 주당 100시간씩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이후 해당 직원이 근무하던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물론, 월가의 가혹한 근무시간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 BoA 직원들은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한 시위도 검토할 정도로 사안이 심각했고 회사측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BoA의 과도한 근무환경은 변하지 않은 채 오히려 몰래 일하도록 시키는 정황이 밝혀졌다.
12일(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BoA의 직원들은 여전히 법정 근로시간을 넘긴채 업무를 하고 있으며 밖에 발설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다. 금융권의 과도한 업무로 도마에 올랐던 BoA는 대변인을 통해 명백한 근로기준을 준수하도록 할 것이며, 초과 근무 등의 위반 사항을 알게 되면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공표한 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초과 근무는 빈번하고 젊은 직원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신입 연봉이 평균 20만 달러(약 2억 7400만원)에 이르는 은행권에서 근무시간이 아무리 비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상사의 명령에 대한 복종은 업계의 표준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BoA는 인기가 많고 따라가기 힘든 일자리라는 것을 지원자들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BoA는 지난 4년동안 신입에 대한 지원서를 약 50만 건 받았으며 준임원 급의 이직률은 10% 미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신입 직원들에게 어느정도의 강도로 근무를 시켜도 되는 가에 대한 문제는 수십년 간 월가의 논쟁거리였다. 매년 수천명의 청년들이 월가의 투자은행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하는데, 이는 업계의 초봉이 높고,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중 다수는 실제로 일주일에 최소 6일씩 일하며 일평균 12시간씩 일하고 있다.
WSJ는 BoA의 과도한 근무시간은 10년 넘게 직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썼다. 지난 5월 사망사건 이전에도 밤샘 근무 이후 급사한 사건이 있었다. 2013년 8월, 고작 21세였던 BoA 런던지사 인턴은 3일 연속 밤샘 근무를 한 후 집에서 샤워를 하다가 사망했다. 사인은 자연사로 알려졌으나, 72시간을 연속으로 일했다는 사실에 금융업계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BoA 측은 과도한 업무가 자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며 애도를 표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사망사건 이후 월가의 은행들은 직원들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업무가 다소 쉬워진 부분도 있으며 일부 간단한 업무는 노동력이 저렴한 국가로 아웃소싱했다. BoA 역시 간부진을 제외한 직원들에게 주말 휴무 등의 내용이 포함된 근무 지침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부터는 근무시간을 기록하고 주말을 보호하는 ‘보호 주말’ 정책이 생겼다. 월가의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기록하도록 하고, 일주일에 80시간 근무하는 직원들이 생기면 경고를 내렸다. 만약 10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가 생기면 인사부에 자동으로 보고 되고 그들에게 휴가를 주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는 BoA 뿐만 아니라 골드만삭스와 JP모건 등 월가의 대표적인 투자은행들도 함께 동참했다.
하지만 직원들이 직접 손을 대야하는 업무의 양은 여전히 많고, 최근에도 월가의 직원들은 주당 120시간까지 일하고 있었다. BoA 등 많은 은행들과 경영진은 보호 주말 정책을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수였다. 특히 일부 고위 임원들은 고강도의 업무를 업계의 관행처럼 생각하고 있다.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정도를 당연히 해야 하는 통과 의례이기 때문에 정책이나 보호조치를 당연하듯 무시한다는 게 WSJ의 설명이다.
BoA에 합격해 업무를 시작했지만 결국 다른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게 된 한 직원은 BoA의 직원들이 업무 시간을 정확하게 보고하지 않는다고 WSJ에 말했다. 직원들은 상사에게 본인들이 열심히 일할 의향이 있으며 실제로 과도한 업무를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설명이다.
다만 이같은 고강도 업무 방식이 최근 채용시장에 들어오기 시작한 밀레니얼 및 Z세대에게 통할 지는 의문이라고 WSJ는 썼다. 이 세대는 일과 삶의 균형을 이전 세대보다 중시하며, 과거에 비해 대형 투자은행들의 급여가 이를 상쇄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월가 한 투자은행의 채용 담당자는 “젊은 인재들를 투자 은행으로 일하도록 유치하는 것이 예전 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며 “기업 간 거래는 둔화된 가운데 고강도 업무를 견디는 직원들에 대한 성과보상도 감소하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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