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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지원농악전수관 홀로 지키는 ‘열여덟 재형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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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중앙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이재형 군은 우리 전통문화예술인 ‘풍물’에 진심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음악보다 꽹과리 소리가 더 좋단다. / 사진=김경희 기자   
광주중앙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이재형 군은 우리 전통문화예술인 ‘풍물’에 진심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음악보다 꽹과리 소리가 더 좋단다. / 사진=김경희 기자   

시사위크=김은주 기자  제주민속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관광객들을 위한 민속체험 중 하나로 풍물 공연을 한다기에 재미삼아 구경 갔던 게 아들의 ‘첫 무대’가 됐다. 꽹과리와 북 소리에 공연장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를 때쯤, 풍물패 사이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가선 세 살짜리 꼬마아이는 공연이 끝나도록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엉덩이를 들썩이는 정도의 엉거주춤한 춤사위였지만, 제법 풍물패의 몸짓을 흉내 내고 꽹과리 장단에 리듬을 탔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흥이 많은 줄만 알았던 세 살 꼬맹이는 올해 열여덟, 꽹과리를 잡은 상쇠가 됐다.

◇ 대중가요보다 꽹과리 소리가 더 좋다는 소년

이재형 군은 ‘풍물’에 푹 빠진 18세 고교생이다. 어릴 때부터 북과 소고·장구가 장난감이었고, 그 흔한 아이돌 그룹의 노래보다 장구나 꽹과리 소리가 더 좋았다고 한다. 사물놀이나 풍물 공연만 보면 풍물패와 함께 어우러져 춤을 췄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농악에 맞춰 자연스럽게 춤사위를 선보였다는 재형 군이다. 단순한 흥미에 그칠 거라 믿었던 재형 군의 엄마는 가족여행을 떠났던 제주민속촌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고 했다.

풍물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풍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이론과 실습을 익혔다. 지역 행사나 축제가 있으면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공연도 했다. 여러 개의 농악기로 만들어내는 장단과, 그 장단을 타고 다함께 춤을 추는 것이 너무 좋았다.

재형 군은 여러 개의 농악기로 만들어내는 장단과, 그 장단을 타고 다함께 춤을 추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생활천을 매만지는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 사진=김경희 기자   
재형 군은 여러 개의 농악기로 만들어내는 장단과, 그 장단을 타고 다함께 춤을 추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생활천을 매만지는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 사진=김경희 기자   

“처음에는 북이나 소고를 두드리는 소리가 좋고, 리듬이 재밌는 정도였어요.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풍물의 진짜 매력을 느끼게 됐어요. 이게, 소고든 꽹과리든 농악기 소리를 들으면 막 심장이 뛰고 행복해요. 그 어떤 서양악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요. 추워도 추운지 모르겠고, 아파도 아픈지 모를 정도로요.”

재형 군은 “함께 하는 것”이 풍물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농악이라 불리는 풍물놀이는 많은 인원이 다양한 농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우는 장르다. 공연의 마지막엔 관객과 공연자가 뒤엉켜 신명을 풀어내고 공연을 마무리한다. ‘화합’과 ‘소통’, 그리고 ‘참여’로 요약되는 대표적인 ‘공동체 예술’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농악은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됐다.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면서 퍼포먼스를 동시에 하는 장르는 별로 없는데, 풍물은 그렇지 않아요. 타악 합주에 춤과 행진, 화려한 기예도 함께 보여줘야 하는 종합 공연 예술이에요. 꽹과리나 소고 하나만으로도 멋진 연주가 가능하지만, 여러 명이 함께 어우러져야만 ‘완성’이 될 수 있어요. 장단 안에서 함께 판을 뛰고 호흡해야 한다는 점이 풍물의 진짜 매력 아닐까 생각해요.”

재형 군은 “소고든 꽹과리든 농악기 소리를 들으면 막 심장이 뛰고 행복하다”면서 “추워도 추운지 모르겠고, 아파도 아픈지 모를 정도”라고 설명했다. / 사진=김경희 기자 
재형 군은 “소고든 꽹과리든 농악기 소리를 들으면 막 심장이 뛰고 행복하다”면서 “추워도 추운지 모르겠고, 아파도 아픈지 모를 정도”라고 설명했다. / 사진=김경희 기자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부모님의 반대가 생각보다 심했다. 공부깨나 하던 아들의 선택을 부모는 ‘사춘기 철없는 호기심’ 정도로 치부했다. “전통예술을 포함해 예체능계로의 진출은 재주가 아니라 타고난 재능이 담보돼야 하는, 쉽게 말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게 재형 군 엄마의 말이다.

호되게 야단도 치고, 주변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우리 아들을 꾀지 말라” 엄포도 놨지만 소용없었다. 심하게 혼이 나고도 몰래 집을 나와 풍물놀이를 구경하고, 캠프에도 쫓아간 재형이다.

엄마는 재형 군의 의지를 끝내 꺾지 못했다. 풍물에 대한 아들의 진심을 봐서다. ‘즐기는 것’이 ‘타고난 재능’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생겼다. 그렇게 재형 군은 ‘처절한 투쟁’ 끝에 부모님의 승낙을 얻어냈고, 풍물 특기생으로 광주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 전국 대회 휩쓸던 광주중앙고 풍물반

경기도 광주는 우리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노력하는 전국 몇 안 되는 지자체 중 하나다. 지역 향토문화인 ‘광지원농악(경기웃다리 농악)’을 전승·발전시키기 위해 민·관·학이 상호 협력하고 있다. 꽹과리·징·장구·북·소고·태평소 등 악기를 연주하는 광지원농악은 2011년 광주시 향토문화 유산 제3호로 지정됐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광주중앙고등학교는 풍물놀이와 광지원농악을 전승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1997년 창단한 광주중앙고등학교 풍물반은 대통령상은 물론 국내 유수의 대회에서 수상을 휩쓸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은 교내 ‘광지원농악전수관’ 벽에 걸린 풍물반 수상 기념 사진들. / 사진=김경희 기자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광주중앙고등학교는 풍물놀이와 광지원농악을 전승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1997년 창단한 광주중앙고등학교 풍물반은 대통령상은 물론 국내 유수의 대회에서 수상을 휩쓸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사진은 교내 ‘광지원농악전수관’ 벽에 걸린 풍물반 수상 기념 사진들. / 사진=김경희 기자 
‘광지원농악전수관’은 풍물놀이와 광지원농악을 전승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장기화로 현재는 풍물 소리가 멈췄다. / 사진=김경희 기자 
‘광지원농악전수관’은 풍물놀이와 광지원농악을 전승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장기화로 현재는 풍물 소리가 멈췄다. / 사진=김경희 기자 

특히 재형 군이 재학 중인 광주중앙고등학교는 풍물놀이와 광지원농악을 전승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유명하다. 1997년 창단한 광주중앙고등학교 풍물반은 대통령상은 물론 국내 유수의 대회에서 수상을 휩쓸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풍물놀이 전용 건물도 교내에 세웠다. ‘광지원농악전수관’이 그것이다. 농악은 사물놀이와 달리 널찍한 공간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광지원농악전수관은 풍물을 전공하는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연습공간이자 쉼터인 셈이다.

학교 측은 이곳을 초·중학생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개방해 광지원농악, 난타, 취고수악을 전수하는 등 농악의 명맥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교육기관에서 이뤄지는 이러한 자발적인 노력은 지역적 고유성을 지키며 농악의 보존 및 전승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재형 군이 ‘광지원농악전수관’에 전시된 풍물반 수상패를 가리키고 있다. 농악기 소리로 떠들썩했을 그때가 부럽다는 재형 군이다. / 사진=김경희 기자 
재형 군이 ‘광지원농악전수관’에 전시된 풍물반 수상패를 가리키고 있다. 농악기 소리로 떠들썩했을 그때가 부럽다는 재형 군이다. / 사진=김경희 기자 

재형 군도 중학교 때 풍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이곳 광지원농악전수관을 자주 찾았다. 전수관은 재형 군에게 놀이터이자 배움터였고, 꿈을 키우는 공간이었다. 광주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 선배들과 함께 전수관에서 합숙을 하며 한바탕 신명나게 놀았던 그때를 재형 군은 ‘가장 멋진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 다목적 창고 돼버린 광지원농악전수관

하지만 언제부턴가 학교에 울려 퍼지던 꽹과리 소리가 멈췄다. 과장을 조금 보태 ‘문턱이 닳을 정도’였던 광지원농악전수관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장기화되면서 여럿이 모이는 일이 어려워졌고, 그러다보니 예전처럼 전수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가 쉽지 않아진 것이다.

풍물 특기생으로 함께 입학했던 8명의 친구들도 더 이상 전수관에 오지 않는다. 대부분 중간에 전공을 바꿨다. 풍물 동아리반도 활동이 중단돼 유명무실해졌다. 사실상 풍물반은 재형 군 혼자 남은 셈이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풍물이 행복하다던 재형 군은 이제 혼자 연습하고, 혼자 꽹과리를 친다.

농악기 소리로 시끌벅적했던 전수관은 인근 학교의 공사를 위한 장비 보관용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주 전통문화 전수를 위해 지어진 건물은 ‘다목적 창고’로 의미가 퇴색했다.

재형 군은 ‘광지원농악전수관’이 다시 풍물패로 북적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함께 하는 것”이 풍물의 가장 큰 매력인데, 현재는 재형 군 혼자 풍물을 하고 있어서다. / 사진=김경희 기자 
재형 군은 ‘광지원농악전수관’이 다시 풍물패로 북적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함께 하는 것”이 풍물의 가장 큰 매력인데, 현재는 재형 군 혼자 풍물을 하고 있어서다. / 사진=김경희 기자 

하지만 불편해도 내색 할 수 없다. 행여 전수관이 문을 닫게 될까봐서다. 그래도 딱 하나 조심스럽게 바라는 게 있다면, “따뜻한 물이 제대로 나왔으면”하는 거란다.

“장구·꽹과리 같은 장비나 의상은 선배들이 두고 간 것 중에서 골라 쓰면 돼요. 밤 늦은 시간까지 혼자 있는 것도 무섭지 않아요. 그런데, 땀 흘리고 연습한 후에 제대로 씻지 못하는 건 좀…(하하).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례가 될 테니까요.”

재형 군은 작년에 전수관에서 냉·온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꽤나 고생스러웠다고 했다. 중앙난방식이라 냉·난방 조절도 쉽지 않아 추위도 더위도 오롯이 몸으로 견뎠던 모양이다.

정작 속이 타는 것은 부모다. 아무도 없는 전수관에서 혼자 연습하고 있을 아들의 모습에 엄마는 가슴이 미어진다. 쉽지 않은 길인 걸 알아서이기도 하고, 안 그래도 외로운 길에 함께 할 친구들이 없어서도 그렇다. 꿈을 이루기 위해 입학한 곳인데, 예상치 못한 현실에 아들의 꿈마저 멈추게 될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좀 더 강하게 반대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부모가 적극적으로 뒷바라지를 못해준 탓인 것 같아 눈물만 훔치는 엄마다.

재형 군은 ‘찐’ 풍물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국악에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킨 크로스오버가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전통의 품격을 보존해가야 한다는 게 재형 군의 신념이다. / 사진=김경희 기자 
재형 군은 ‘찐’ 풍물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국악에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킨 크로스오버가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전통의 품격을 보존해가야 한다는 게 재형 군의 신념이다. / 사진=김경희 기자 

◇ “퓨전 아닌, 전통 풍물 꼭 지켜낼 것”

그래도 재형 군은 “꿈을 놓지 않겠다”며 웃어 보인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만큼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난 방학동안 전수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일 8시간 이상 연습에 매진하며 전수관을 지켰다. 유튜브나 선배들의 영상을 보면서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국악 관련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정보를 얻고, 지역 축제 공지가 있으면 직접 참여 신청도 했다. 모르는 형들과 합을 맞추는 게 어색할 법도 한데, “그렇게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것이 풍물”이라고 의젓하게 답하는 그다.

재형 군은 ‘찐’ 풍물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퓨전이 아닌,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는 명인(名人)말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 반드시 국립국악원 단원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내놨다. 국악에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킨 크로스오버가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전통의 품격을 보존해가야 한다는 게 재형 군의 신념이다.

“지금도 전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없어지고 있는데, 퓨전만 인기를 끌면 전통문화의 명맥이 끊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중가요에 우리 전통음악을 입히면 당장은 신선할지 몰라도, 결국 사람들은 우리의 굿거리·자진모리 장단이 아니라 퓨전음악 ‘뱅뱅뱅’만 기억하게 될 테니까요.”

올해 고3인 재형 군은 꽹과리로 전공을 바꿨다. 꽹과리는 풍물패를 이끄는 리더(상쇠)의 역할이다. 풍물패의 가장 앞에서 전체 음악을 지휘하고 행렬과 장단을 주도한다. 아직은 함께 할 친구들이 없지만, 언젠가 상쇠인 자신이 직접 풍물패를 이끌고 판을 뛸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심장이 뛴다고 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쇠(꽹과리)를 치고, 그 소리를 듣고, 신명나게 그 장단을 타는 것이에요. 부디 이 행복한 걸 오래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성스레 부포를 매만진 재형이는 오늘도 혼자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판을 뛸 날을 상상하며 꽹과리 채를 힘껏 움켜쥔다. 전통문화를 잇겠다는 열여덞 소년의 꿈을 향한 고군분투는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시사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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