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병든 부모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청춘들이 있다.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가기에도 바쁜 나이에 ‘영케어러(Young Carer)’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인생의 내공이 쌓인 어른이 감당하기에도 벅차다. 영케어러가 더 이상 가족이란 족쇄에 묶이지 않을 수 있도록, ‘노(NO)케어러’를 외치면 사회가 손을 내밀어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도록. ‘영케어러’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시사위크>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법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참고로, 기사는 인터뷰와 취재 등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구성했으며, 취재원인 영케어러 보호를 위해 가명 및 일러스트를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시사위크=연미선·이영실·이민지·이주희 기자 학교에 다니고 또래와 교류하는 대신 아픈 환자를 돌보고, 미래를 고민해야 할 시기에 현실의 문제에 부딪혀 가사와 노동에 시달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망가진 가족돌봄청년의 마음은 지금껏 방치됐다. 전문가들은 가족돌봄청년이 마주한 문제들은 결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이를 방관하게 되면 미래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과 수고가 거대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 내가 정신과에 가게 된 까닭은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건 수호(27) 씨가 군대에 들어간 직후인 2021년도 3월이었다. 여동생 수아(16)는 당시 13세에 불과했다. 군 제대 이후로는 수호 씨가 엄마를 주로 돌보고 있지만, 오빠가 군에 있을 때 아픈 엄마를 돌보는 일은 오로지 동생 수아의 몫이었다.
막상 마주한 집안일은 어려웠다. 세탁기도 어떻게 돌려야 할지 모르겠고, 음식물 쓰레기를 제대로 관리하는 방법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겨우겨우 해낼 수 있었다. 아빠는 하루 종일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오빠는 군대에 가 있으므로, 쓰러진 엄마를 보살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기 때문이다.
수아가 집안일을 모두 감당하며 버텨낼 동안 수아에게 의지할 만한 어른은 없었다. 아빠는 새벽 5시쯤 출근하면서 불쑥 찾아와 집이 이게 뭐냐며 깨워 화를 내곤 했다. 쓰러진 이후 몸을 움직이기 불편해진 엄마는 수아가 차려준 밥상을 엎어버리기 일쑤였다. 수아가 스스로 많이 지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2022년 3월쯤이었다. 처음 정신과를 방문한 날이었다.
실제로 많은 가족돌봄청년들은 정신적인 부담을 호소한다. 보건복지부의 ‘2022년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족돌봄청년은 일반 청년보다 삶의 만족도가 낮고 우울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삶에 대한 불만족도는 22.2%로 일반청년(10.0%) 대비 두 배 이상이었다. 주돌봄자의 경우 32.9%로 일반청년과 비교해 세 배 이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응답자 중 61.5%가 우울감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일반청년(8.5%)의 7배를 넘어선 수준이다. 주돌봄자일 경우 70.9%가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필요하다고 답한 복지서비스는 △생계 지원(75.6%) △의료 지원(74.0%) △휴식 지원(71.4%) △문화 여가(69.9%) 등으로 나타난 가운데, 주돌봄자는 문화 여가보다 심리 지원(76.8%)이 가장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 정신장애를 지닌 엄마, 내가 힘들었던 이유
국내서는 이러한 가족돌봄청년의 정서적 부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채원(29) 씨는 올해 들어 스스로 지쳤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마음을 돌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청년마음건강바우처 지원 사업을 통해 심리상담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청년마음건강바우처 지원 사업은 서울시복지재단이 시행하는 지역자율형 사회서비스다. 자립준비청년과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연계한 청년을 우선순위로 두고 일반청년까지 신청할 수 있다. 채원 씨는 이를 통해 정부지원금 90%에 본인 부담 10%를 더해 열 번의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채원 씨는 조현병을 지닌 엄마를 혼자 돌보는 일이 힘들다는 사실을 외면해 왔다. 집 밖으로 나오면 내 일이 아니라고 지워버리려고도 했다. 심리상담을 받고 나서야 가족과 엄마에게 느끼는 원망이나 스스로 지고 있는 부담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열 번의 심리상담이 끝난 후에 연계‧지속되는 지원이 없어서다.
본인이 직접 해당 복지서비스를 찾아 신청하는 부분이 사각지대를 만들기도 했다. 복지 정보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수아의 경우 우울증 진단을 받고 3개월 뒤 병원을 그만두게 됐다. 금전적인 문제에 아빠가 쓰러지시는 상황이 더해져서다. 수아는 아빠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연결해 준 초록우산을 통해 정보를 얻어 현재는 가까운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이용하고 있다.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채원 씨는 더 나아가 세분화된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가족돌봄청년은 돌봄 대상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리고 그 대상자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느냐에 따라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장애에 대한 정부의 이해도가 높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본인이 직접 신청해야 하는 사회복지 특성상, 병식이 없는 정신장애인이 장애를 인정받고 복지서비스를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매우 어렵다는 지적이다.
◇ 아동·청소년은 돌봄 ‘주체’ 아닌 ‘대상자’… 선결돼야 하는 부분은
가족돌봄청년이 정신적인 부담을 호소하는 경우는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영국에서는 가족돌봄청년이 교육‧근로‧돌봄노동의 중첩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들 중 45%가 정신 건강 문제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호주의 2020년 간병인 조사에 따르면 영케어러의 73.5%가 사회적 고립감을 느낀다고 응답했고, 73.8%가 정신적인 괴로움을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즐겁게 생활하고 공부하며 성장·발전해야 할 아동·청소년이 성인도 감내하기 어려운 간병일을 전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동·청소년의 권리 침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 한국아동권리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은주 동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족돌봄청년의 정신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선 돌봄 부담을 근본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은주 교수는 “우리나라는 아직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정의나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마련되지 않았다”면서 “실태조사를 통한 정확한 파악과 함께 반드시 가족돌봄아동·청소년과 청년의 연령적인 구분을 하고 정책적 지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우선 사회적 돌봄 체계를 강화해서 적극적으로 가족 돌봄의 부담을 (정부가) 개입해 완화해 줘야한다”면서 “그다음 가정 내 위기로 인한 심리 문제를 돕는 프로그램이나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더해 자녀의 부모 봉양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가족돌봄청년을 더욱 짓누른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은주 교수는 “효를 기반으로 하는 유교적인 문화 때문에 가족돌봄청년이 외연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내부에서 심리‧정서적인 어려움을 경험하는 것”이라면서 “아이들이 수용할 수 있는 약 챙겨주기, 산책 보조하기 외에 그 이상은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짚었다.
이어 “아동‧청소년은 돌봄과 보호의 대상으로 본인이 돌봄의 주체자가 될 수 있는 연령이 아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주체가 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특히 아동복지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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