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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격노 정부’에 격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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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해 쓰고 말하기가 어려운 때다. 무엇을 쓰고 말해야 할지 주저된다. 글은 힘을 잃은 지 오래고 말은 공중에 흩날린다. 요즘 말과 글이 소용 있을 때는, 사람들을 열광시키거나, 볼거리·웃을거리·싸울거리를 제공하거나, 권력에게 아부하거나, 돈을 끌어모을 때다. 아무 말이라도 그런 소용이 있으면 쓸모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별 효용이 없다.

정치에 대해 쓰는 일은 심지어 자기 위안조차 주지 못한다. 잘해야 무력감을 각인시켜 더욱 깊게 하고, 밖으로는 양비론이나 펴는 ‘씹선비’라는 조롱을 피하기 어렵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도자기 미술관에 들어간 코끼리를 일단 끌어내야지, 거기서 이것저것 따지고 있는 태도가 무엇이냐는 호통을 듣기가 십상이다. 오죽하면 ‘씹선비라는 말이 나오자 절제하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는가. 쓸만한 말을 할 만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사태를 관망할 뿐이다.

왜 사람들은 광장에 나오지 않는가

사실 요즘 나라의 꼴은 실로 ‘사태’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형편없다. 사태란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이 진행되는 상황을 뜻한다. 보통은 대규모의 인명 피해, 물적 손실이 발생하거나, 이를 유발할 만한 국가나 사회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일컫는다.

현 정부 이후 발생한 거의 모든 사건들은 제대로 수습되기보다는 더 비정상적인 사건의 발단이 되는 것이 상례였으니, 지금의 비정상적인 국정운영을 장기적 ‘윤석열 정부 사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왜 사람들은 전처럼 광장에 나와서 코끼리를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가?

코끼리 끌어내기가 불가능한 이유

우선 이 ‘사태’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지난 총선 이전에 있었던 여러 일들은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능을 넘어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2년이 이어졌다. 총선의 결과를 어렵게 해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국민들은 정부 심판을 원했다.

총선 이후 대통령은 사과를 하는 척하더니, 그냥 지나갔다. 국정지지율은 역대 2년차 정부에서 최저를 기록했다. 사실 20%대 국정지지율이라면 의회제 국가에서는 총리가 사임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다시 치러서 새로 정부를 구성하는 게 맞다. 그 정도의 국정지지율로는 국가가 운영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후의 행보는 선거 전보다 더 일방통행이다. 채상병 특검법을 거부하고, 방통통신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의 면면은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무능은 보통 선거로 심판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무능이 지속되면 정권이 교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정권교체가 꼭 정당의 교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충분히 지지를 얻지 못하면, 정권교체는 단지 리더십의 교체로 나타날 수도 있다. 노태우-김영삼 때가 그랬고, 이명박-박근혜 때가 그랬다.

그런 가능성은 위에서 던진 질문과도 연계되어 있다. 사태가 이 정도라면 누가 선동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코끼리를 붙잡으러 나와야 한다. 이전에 그런 경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조짐이 없다. 사실 불가능하다.

최근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30%대다. 그런데 제1야당의 지지율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당 지지율에서는 오히려 국민의힘보다 뒤지는 경우도 흔하다. 이래서는 코끼리를 끌어내기 어렵다. 3년은 너무 길고, 석 달도 너무 길다고 하지만, 지금 봐서는 야당과 일부 지지자들의 공연한 바람일 뿐이다. 당위가 아니라 가능성과 현실의 차원에서 냉정하게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반민주적이라 탄핵되었다

혹자는 말할 수 있다. 아직 심지에 불이 붙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최순실 사태 같은 모종의 비리가 폭로되기만 하면 급격한 레임덕이 올 것이고, 내부 제보가 쏟아질 것이라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 정부에는 그런 약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인사와 관련해서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고 소문도 흉흉하다.

이 지점에서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이게 나라냐’의 기준이 무능과 부패를 넘어서 ‘민주주의’였다는 것은 중요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 선출된 권력으로부터 정당한 절차를 통해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권력이 국정을 좌우했을 때, 민주 국가의 시민은 기본권과 존엄성을 훼손당했다고 생각한다. 무능과 반민주가 겹쳤을 때, 국민은 모욕감을 느낀다. 모욕감은 인간을 행동하게 한다.

‘격노’는 반민주적이다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이 정부에서 가장 위험한 지점은 바로 ‘격노’다. 이 정부는 말 그대로 ‘격노 정부’다. 이준석에 대해 격노하자 여당 대표가 날아갔고, 화물연대에 대해 격노하자 파업이 진압되었다. 채상병 사건에서도 격노가 발단이 되었다. 격노가 문제인 이유는 이것은 자의적 통치를 통해서 유사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이 일로 격노하셨다’고 하면, 정상적인 민주정부에서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가 격노를 해도 절차상 바뀌는 건 없다’고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큰 동력이 되는 것은 ‘격노’다. 통치철학과 법과 제도와 절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기분’이 중요한 것이다.

격노란 대체로 지나치게 화가 나서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에서 내게 마련이다. 백번 양보해서 어떤 잘못이 너무나 심대해서 정당한 화를 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격노 상태에서 내리는 지시가 적절하고 타당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해야 할 지시가 있다면 격노 상태가 지나고 차분히 내리는 것이 맞다.

하물며 국가의 사무에 대해 대통령이 내리는 지시다. 어떤 사안에 대한 대통령실의 의사가 행정부로 전달될 때는 ‘격노’했다는 사실 자체는 전달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국가에서의 행정이자 통치다.

만약 그러한 지시의 내용에 대통령의 ‘격노’가 포함되어 전달되었다면, 이 통치행위는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봉건적·왕조적 통치문화에 더 가깝다. 대통령실이 그런 용어 쓰기를 자제하기는커녕 즐겨한다는 것은, 이 통치조직의 문화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검찰에서 ‘총장님이 격노하셨다’는 말을 자주 썼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민주주의는 다른 방향에 서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의 ‘격노’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물론이고 국민의힘에서조차 이런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한다는 것은, 이들이 탄핵 불감증에 걸린 반민주적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당장은 포퓰리즘과 팬덤에 시달리고 있고, 정당정치는 형편없는 수준이고 정치효능감은 크게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신뢰의 근본이 흔들린다고는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인기영합주의에 휘둘린다는 것과, 그래서 독재적이고 자의적인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 정부에서 대통령과 그 배우자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선출된 공직자보다는 봉건적 지도자에 가깝다. 아슬아슬한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4차 전당대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은 격노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처음 이 글에서 제기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야당의 지도자인 이재명 대표는 충분히 민주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는가? 이재명 대표는 사람의 기분에 따른 통치보다는 제도와 절차에 따른 통치를 할 것인가? 이 대표는 자신의 정치적 반대파에 대해 다양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가? 이 대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잘 되어 있는가?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들은 격노 같은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인가? 이런 질문은 모두 민주적 리더십과 관련되어 있다.

이재명 대표는 지지자들이 보기에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불의와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문제는 지금 대통령도 우리가 그런 줄 알고 뽑았다는 데에 있다. 이재명은 윤석열 같은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싸우는 데 적절한 리더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국민들은 이 싸움에서는 이재명이 유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안으로서는 민주적·포용적 리더십을 생각할 수도 있다.

윈스턴 처칠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냉철한 판단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런 처칠에게 영국 국민은 전쟁 직후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를 안겼다. 어떻게 보면 배신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 국가에서 국민들이 지도자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2월 당시 처칠 내각의 지지율은 무려 83%였지만, 7월 총선에서 처칠은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그가 전시에 훌륭한 지도자이긴 하지만 평시에도 좋은 지도자는 아니라는 노동당의 주장이 먹혔던 것이다.

지난 몇 년 간의 여론조사와 선거의 결과 등을 보면, 많은 국민들은 이재명이 억울하고 야당지도자로서 정당성이 있고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당장 탄핵이나 임기단축을 통해서 윤석열을 대체할 만한 지도자로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민주당에서 나타나는 이재명 일극체제는 ‘당원 민주주의’로는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들이 보기에 한국 민주주의 전반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총선 이후 현 정부의 일방적인 태도에도 민주당 지지율이 이렇게 답보상태일리 만무하다.

방향이 아니라 총이 문제 아닐까

전당대회가 격화되자 이재명 대표는 ‘총구를 밖으로 향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밖에는 국민의힘 지지자도 있겠지만 일반 국민들도 있다. 그럼 이런 생각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총구의 방향이 문제인가, 아니면 손에 들고 있는 총이 문제인가. 안과 밖이 문제가 아니라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닐까. 총을 막 휘두르다 보면 적도 놀라 도망가겠지만, 이를 지켜보려던 사람들도 모두 달아난다.

최근 한 정치인에게 김근태가 그립다는 말을 들었다. 김근태는 독재와 싸울 때도 너무 민주적이어서, ‘우리의 전략전술이 충분히 민주적인 것이냐를 끊임없이 따지는 바람에 피곤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그 김근태의 태도가 아니었다면 당시의 우리는 불의와 싸운다는 정의감에 불타서 우쭐대고 함부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회상했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폄하되고 있다. 포퓰리즘과 민주주의가 구분되지 않고, 팬덤정치와 민주적 절차가 뒤섞였다. 포퓰리즘과 팬덤정치가 민주주의의 산물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유사민주주의일 뿐,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누군가는 당장 코끼리를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국민들은 코끼리 다음에는 어떤 동물이 이 민주주의의 미술관에 적당한지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아직 답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가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 배임·성남FC 뇌물’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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