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16세 고등학생 소녀가 올림픽 사격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반에서 1등도 어려운데 세계 1등을 했다니, 대단한 선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터뷰를 보고는 칭찬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긴장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여기에 있는 선수들은 저보다 나이와 경험도 많을 뿐만 아니라, 실력도 좋습니다. 이 선수들한테 무언가 하나는 배워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선수이기 전에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무엇인가?
중국 고전 예기(禮記)에 우리에게 익숙한 칠정(七情)이 나온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그것이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천부(天賦)받고 태어난 다양한 감정’을 의미한다. 이 감정은 외부 자극에 따라 움직이면서 희열, 분노, 사랑, 증오 등으로 변하며, 밖으로는 말, 표정, 몸짓으로 표출된다. 그로 인해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이는 조직의 변화를 부르며, 때로는 중요한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에 의해 누적된 결과를 우리는 문화 또는 문명이라고 부른다.
중용(中庸)에 따르면 이러한 감정의 상태가 마치 적자지심(赤子之心, 어린 아이의 마음)과 같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정에 변화가 생기더라도 중절(中節, 절도(節度)에 맞게 조절)할 수 있어야지만 화(和,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중화(中和)에 이르면, 하늘과 땅(天地)이 제대로 자리를 잡게 되며 나아가 만물(萬物)이 성(盛)하게 자라난다고 한다.
우리의 감정을 중절하는 방법은, 맹자(孟子)가 알려준다. 바로 사단(四斷), 즉 우리가 또한 알고 있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남을 긍휼(矜恤)히 보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겸손함을 아는 마음,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중요한 것은. 사단이라는 명칭의 의미가 바로 ‘인간이 다른 존재와는 구분되는 네 가지 단서’이며, 이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인 것이다. 즉, ‘사단을 가지고 우리의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을 다스림으로써 우리의 감정을 중(中)한 상태로 유지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 화(和)를 이루어 내는 사람’을 곧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중용의 요체다. 중용뿐만 아니라 모든 동양 철학에서는 특정한 재능이 아니라,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람은, 배우면 배울수록 이 사회의 독(毒)같이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단이 바로 인간다움의 근거라면, 이 ‘사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인가? 이 사회에 때로는 치명적인 화(禍)를 입히는 범죄자 또는 그에 준하는 자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위대한 국가와 존엄한 국민을 위하기는커녕 입법 활동이랍시고 불편과 불행을 야기하면서도 자기와 자기 주변의 이익을 같이하는 패거리들만을 위한 법을 만들겠다고 안하무인으로 막말과 호통을 쳐대고, 모든 국민들을 상태로 거짓말을 일삼기도 하며, 화(和)는 어디가고 독단만을 내세우는 이런 사람들은 수오지심이 없으니, ‘인간답지 못한 존재’인가?
참으로 불쌍할지어다. 그래도 옛 성현들이 측은지심을 내어 한 마디를 던져주셨으니 잘 물어다가 날마다 때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귀감으로 삼으면서 커다란 위로로 삼기 바란다.
‘군자지중용야(君子之中庸也),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 소인지중용야(小人之中庸也), 소인이무기탄야(小人而無忌憚也)’ ‘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로서 맞게 하는 것이요. 소인의 중용이란 소인으로서, 단지 기탄(忌憚)이 없는 것일 뿐이다.’ 기탄이 없다함은 ‘거리낌이 없이 마구잡이로 내지른다’는 의미이며, 이 것이 바로 ‘그들끼리의 중용’ 이라서 그들은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 이를 수도승처럼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강우 동국대 AI융합대학장 klee@dongguk.edu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