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 최근 경찰관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 끊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실적 위주의 성과평가 등 경찰 직책 내 열악한 노동환경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31일 경찰직장협의회(이하 경찰직협)에 따르면 이달에만 5명의 경찰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는 시도를 했다. 이 사건들의 주된 원인으로는 공통적으로 경찰 업무의 과다와 과로가 지목됐다.
서울 관악경찰서 소속 A(31) 경위가 지난 1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날 서울 동작서 소속 B 경감(43)이 오전 사무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지난 26일 사망했다. 지난 22일에는 충남 예산서 경비안보계 소속 C(28) 경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26일에는 서울 혜화서 소속 40대 D 경감이 동작대교에서 투신하는 일도 벌어졌다. 같은 날 경남 양산서 소속 경찰관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구조됐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현직 경찰관은 125명에 달했다. 2019년 20명, 2020년 24명, 2021년 24명, 2022년 21명, 지난해 24명, 올해 6월 기준 12명이다.
경찰직협은 자기사건 책임수사제도·감찰의 고강도 점검과 현장인력 부족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29일 경찰직협은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장과의 실질적인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된 조직 개편으로 인해 경찰 내부에서는 문제가 발생해 왔다”고 밝혔다.
경찰직협은 수사업무 능력이 부족한 초임 수사관조차 발령과 동시에 약 40~50건의 과다한 양의 사건을 배당 받았으며, 수사관들의 역량 향상 기회 없이 국가수사본부로부터 지속적인 사건 감축 압박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 역량 평가 강화라는 미명 하 평가 결과가 부적절할 시 과·팀장 인사 배제 조치, 장기사건 처리 하위 10% 팀장 탈락제 운영 등 수사관들에게 과도한 압박을 가해 스트레스를 유발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관악경찰서 소속 A 경위는 지인과의 대화 중 “죽을 것 같다”며 “22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바 있는데, 지난 22일은 A 경위가 소속된 관악경찰서 수사경찰 하반기 사건관리체계 현장 점검일이었다.
지난 16일부터 26일에 진행된 사건관리체계 현장 점검은 장기사건 관리가 미흡하다고 평가된 관서가 주된 대상이었으며 점검 항목은 ▲과·팀장 관리역량 ▲고의방치 ▲수사미진 사항 여부 등이었다.
경찰직협은 “매주 금요일 평가 결과 공개와 독려 문자 발송은 수사관의 업무 부담을 가중시켰다”며 “수사감찰 강화 역시 수사 의욕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직장인들이 가입하는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동료 경찰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관악경찰서 A 경위의 순직 사실을 알리는 게시글을 작성한 익명의 서울시 소재 경찰관은 “사건이 많은 경찰서들은 민원인의 전화를 받는 데만 많은 시간을 소요하고 있다”면서 “사건이 많은 탓에 누가 어떤 사건의 피해자고 피의자인지 전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했다.
경찰직협은 이 같은 사태에 대해 지난 26일 입장문을 통해 ▲실적 위주 성과평가 즉각 중단 ▲기동순찰대·형사기동대 폐지 및 인력 원상 복귀 ▲초임 수사관 적응 대책 강구 ▲업무 스트레스 측정 긴급 진단 등을 촉구했다.
경찰청이 지난 2014년 각종 사건·사고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는 경찰관들을 돕기 위해 마음동행센터를 개설했으나, 현재 시설과 상담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 실정이다.
가천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윤민우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스트레스와 심리적인 문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으로만 나타나지 않고 도박, 마약 중독, 가정 폭력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며 “경찰이나 소방처럼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직군에 종사하는 분들을 위한 체계적인 접근과 퀄리티 있는 상담 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현재와 같이 상담사 한 명이 다수를 관리해야 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파일럿 프로그램 등을 통한 정교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면서 “경찰과 같은 극한 직업은 정당한 권한과 권위, 명예를 보장하지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문제나 부정부패 같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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