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박설민 기자 “누가 최고의 파일럿이지?(Who’s the best pilot?)”. 1987년에 개봉했던 영화 ‘탑건’에서 ‘아이스맨’은 주인공 매버릭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에서 이 질문의 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두 천재 조종사들의 우열은 가릴 수 없어서다. 매버릭은 뛰어난 임기응변과 도박수를, 아이스맨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정교한 비행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것처럼 전투기 조종은 가장 뛰어난 조종사들만이 가능한 임무다. ‘음속(시속 1235㎞)’을 넘나드는 극한의 영역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분석·판단해야 한다. 여객기 등에 적용된 자율항공시스템으론 어림도 없다. 때문에 전투기 조종은 언제나 ‘인간의 영역’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근미래, 최고 파일럿 자리 경쟁은 매버릭과 아이스맨 양자 대결이 아닌 ‘삼자대결’이 될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인공지능(AI) 조종사’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최근 미국, 유럽,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까지 AI파일럿 개발에 항공·AI분야 연구자들이 온 힘을 쏟고 있다.
◇ AI파일럿, 인간조종사의 든든한 ‘윙맨’… 韓 ‘K-AI Pilot’ 주목
최근 개발된 AI조종사 시스템은 인간 조종사 비행능력에 어깨를 견주고 있다. AI에 유리하게 적용된 특정 조건에서는 인간 베테랑 조종사에 승리하기도 한다. 지난해 9월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 기지에선 AI가 조종하는 전투기가 인간 조종사와 공중전 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시 항공산업 선진국과의 경쟁을 위해 AI파일럿 기술 개발이 한창이다. 그 중심에는 ‘KAI(한국항공우주산업)’이 있다. 관련 기술 개발은 미래융합기술원 소속 미래SW기술TF팀에서 맡고 있다. 중점 연구 분야는 AI파일럿과 고장예측 알고리즘 등 AI기반 항공·우주 및 미래 공중전투체계다. 이를 위해 KAI는 올해 유무인 복합체계 구현을 위한 AI파일럿, 빅데이터, 자율·무인 등 핵심 기술개발에 1,025억원 투자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KAI에서 개발 중인 AI의 이름은 ‘K-AI Pilot’이다. 사람의 지속적 개입, 통제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AI시스템을 뜻한다. 쉽게 말해 인간 조종사의 위험한 전투 비행 임무를 든든히 보조할 수 있는 서포트 조종사 ‘윙맨(Wingman)’ 역할을 맡길 수 있는 AI파일럿이 KAI가 목표로 하는 기술이다.
AI파일럿은 전장에 투입될 경우 인간의 지시를 받아 다양한 하위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이때 비행체는 저비용·소모성 무인기 전투기면 충분하다. 인간 조종사가 탑승하는 전투기와 달리 비상탈출장치, 조종장비, 생명유지장치 등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위험 임무 수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인명피해 부담, 조종사 체력 소모 문제 등에서도 자유롭다.
심병섭 미래SW기술팀장은 “최근 공중전투체계는 단일 전투기 성능으로 공중 우세를 확보했던 방식에서 유인기, 무인기, 위성 등이 연계된 ‘시스템 오브 시스템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6세대 전투기를 포함한 차세대 공중전투체계에서는 AI를 기반으로 한 자율임무 수행능력이 필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KAI는 축적된 항공설계, 생산, 모델링·시뮬레이션(M&S)기술, 비행운영 데이터 활용 가능한 유일한 전문업체로 AI파일럿 사업 추진은 KAI 밖에 할 수 없다”며 “국산 항공기 플랫폼 무인화 등 정부 과제로 반영, 추진해 무인화 개발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한 치 오차도 허용 않는 ‘도그파이트’, 핵심은 ‘데이터’ 확보
AI파일럿이 가장 특화된 부분은 단연 ‘시계내 공중전(WVR)’, 일명 ‘도그파이트(Dog-fight)’다. 도그파이트는 전투기끼리의 근접전을 의미한다. 서로 가시권 안에 들어온 전투기들끼리 꼬리 쪽을 공략하고자 싸우는 모습이 마치 개들이 싸우는 모습과 유사해 붙여진 이름이다.
도그파이트는 일반 수준의 조종사나 시스템으론 불가능한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다. 실시간 변화하는 자신의 전투기 상태뿐만 아니라 상대방 전투기의 움직임까지 고려해 공격해야 한다. 세계 각국의 항공전문기업과 연구기관에서 개발한 AI파일럿들이 도그파이트에 특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가장 강력한 도그파이트 능력을 보여주는 AI파일럿은 ‘팔코(FALCO)’. 미국군수업체 ‘헤론시스템즈’에서 제작한 것이다. 2020년에는 미 국방부 산하 고등계획연구국(DARPA)이 진행한 인간조종사와의 대결에서 압승을 거두기도 했다. 이때 팔코 인간 조종사에게 단 한 차례의 유효 공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처럼 강력한 AI파일럿의 도그파이트 능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양질의 데이터’다. 헤론시스템즈에 따르면 팔코는 머신러닝 기반의 반복학습을 적용, 가상 모의 비행 전투 훈련을 70회 이상 진행했다. 이를 실제 전투 데이터로 환산하면 수백만 개가 넘는 상황별 대처를 학습한 수준이다.
KAI에서는 K-AI Pilot 학습에 세계 1~2차 대전부터 쌓아올린 방대한 전투 데이터를 사용했다. 하지만 과거 데이터인 만큼 현대 공중전에 적용하기엔 한계도 뚜렷하다. 이 같은 데이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AI 연구진이 고안한 방법은 바로 ‘심층강화학습(DRL)’이다. AI 머신러닝 기법 중 하나인 DRL은 ‘딥러닝’과 ‘강화학습’을 결합한 기술이다. 쉽게 말해 AI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점점 더 정답에 가까운 답을 내놓도록 하는 방법이다.
한성호 미래SW기술팀 연구원은 “AI 파일럿 개발에 있어 데이터는 매우 중요하지만 데이터가 없거나 학습용으로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은 경우가 있다”며 “이를 위해 현재 DRL 기법을 활용해 K-AI Pilot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KAI는 현재 모델링·시뮬레이션(M&S)연구실에서는 AI기반 모의훈련체계과제 연구에 군의 전술교범을 학습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이 데이터를 사용해 규칙기반으로 AI를 모델링하는 방법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2050년 유무인 복합전투체계 완성 목표… “실증 인프라·기관 간 협업 필요”
KAI는 올해부터 AI파일럿 기술 축적 및 고도화를 위한 단계적 기체 실증을 진행 중이다. 실증 계획은 크게 △축소기 실증(기본 항법 및 장애물 회피) △다목적 무인기 실증(다목적 무인기 실기체 실증) △전투기급 실증(무인전투기급 AI 기술 확보) 3단계로 진행된다. 이를 통해 오는 2040~2050년 사이에 유무인 복합전투체계를 완성한다는 것이 KAI 측 목표다.
세부 AI파일럿 개발 계획은 2028년까지 이뤄진다. △1단계 AI 축소 실증기 (2024) △2단계 AI실증기 (2025) △3단계 다목적 무인기(2026) AI파일럿 비행 고도화 개량(2027) △AI파일럿 유무인 복합 개량(2028)을 거쳐 이뤄질 예정이다. 전투용 AI파일럿(ACP) 개발 계획은 △모델 고도화 (2024~2025) △모델 성능개량(2026~2027) △유무인 복합 개량(2028) 단계로 진행된다.
다만 아직 개발 초기인 만큼 아직 갈 길은 멀다. 가장 급선무는 ‘실증 인프라 확보’다. 현재 KAI의 AI파일럿은 모두 ‘가상 시뮬레이션’으로 이뤄진다. 현실과 유사한 환경 데이터를 적용하긴 하지만 실제 야전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전장에서의 변수는 가상시뮬레이션만으로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미국의 경우 이미 AI파일럿을 실제 전투기에 탑재해 실증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 DARPA는 F-16 전투기에 AI를 적용, 자율제어 비행 테스트에 성공했다. 이 실증 테스트는 2019년 DARPA가 실시한 ‘전투기 공중전 진화(Air Combat Evolution, ACE)’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테스트에 사용된 F-16 전투기에는 조종사의 생리 반응 추적 센서가 내장돼 있다. 이를 통해 AI는 자신의 판단이 인간 조종사의 판단과 유사한지 파악, 가장 정확하고 안정적인 비행을 진행했다.
심병섭 팀장은 “AI파일럿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실제 실증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는 것”이라며 “미국의 경우 ACE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불과 3년 만에 F-16급 전투기에 AI를 적용, 실증 테스트를 진행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런 실증 테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 전투기, 비행장 등의 인프라가 다소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어 “AI파일럿을 우수한 성능으로 개발해도 이 모델을 실제 FA-50 등 전투기에 탑재해 어떤 비행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지 관찰하고 싶지만 아직 우리나라엔 그런 무인기 자체가 거의 없다”며 “때문에 현재 가장 최선은 드론 등 소형 무인기에 AI를 적용한 후 실제 환경에서 비행시켜보는 정도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KAI연구진들은 군, 연구기관, 기업들 간의 협업도 기술 성능 향상을 위한 핵심 요소로 꼽았다. 한성호 연구원은 “AI파일럿 개발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소위 ‘감’이라고 하는 영역”이라며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공중전은 감각적으로 판단해야하는 요소가 많아 이를 데이터로 체계화하기 위해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군, 연구원, 기업들이 함께 협업해 헤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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