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언제나 동화 같지는 않지만, 우리는 각자 주어진 시간 속에서 빛을 좇으며 산다. 평범한 일상에 때때로 찾아든 마법 같은 순간들은 잠시나마 우리 곁에 머물며 미소 짓게 하고, 그 안에서 찾은 희망은 자신의 한계마저 넘어설 의지가 된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일상의 단편을 무대 위에서 만나볼 기회가 찾아왔다.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지 모를 이야기는 그래서 더 큰 감동으로 남는다. 오랫동안 품어온 빛을 따라 걸어온 배우 고보결에게 이번 무대가 유독 특별히 여겨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심코 스친 일상에 놓치고 있던 소중함이 있지는 않았을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듬는 일에 서툰 점은 없었을지 그는 계속 살피고 또 살폈다. 그래서일까. 진지한 표정으로 작품 이야기를 이어가던 고보결의 얼굴에는 어느새 온갖 빛깔로 활짝 물든 미소가 번졌다.
한여름 푸르름이 가득했던 7월 말 어느 날,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연극 <꽃, 별이 지나> 지원 역으로 무대에 오른 고보결을 만났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의 소중함
연극 <꽃, 별이 지나>(작·연출 민준호, 안무 김설진)는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20주년 퍼레이드 세 번째 순서로 선보인 신작이다. 작품은 2022년 성수아트홀에서 약 일주일 동안 <사랑의 형태>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바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픈 선택에 대해 인지하고 그로부터 얻은 고통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다는 힌트를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해 제작됐다. 이번 무대를 위해 대본을 더욱 탄탄하고 완성도 높게 대폭 수정하는 한편, 캐릭터 구성부터 연출, 표현, 움직임까지 모두 업그레이드했다고 전해져 기대를 모았는데 실제 관객들의 반응도 호평이 이어졌다. 지난 6월 8일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에서 개막한 연극 <꽃, 별이 지나>에는 안무와 정후 역을 맡은 김설진, ‘간다’ 원년 멤버 진선규, 이희준, 김지현, 정연, 그리고 조혜원, 최지현, 최미령, 이다아야, 김대현, 임세미, 고보결 등 열두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고보결은 이 작품에서 미호의 친구이자 희민의 여자 친구 지원 역을 맡았다. 공연은 오는 8월 18일까지 이어진다.
“연기를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 모인 워크숍이 있어요.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원년 멤버들이 계시는 일종의 연기 스터디 모임이죠. 감사하게도 ‘간다’를 이끌고 계시는 민준호 연출님께서 제게 연극을 해보자고 제안해 주셔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창작극이고, 초연보다 많이 달라질 것을 염두에 두면서 같이 만들어 가자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함께하는 분들이 정말 좋은 선배들인 데다 꼭 같이 연기 해보고 싶던 분들이었어요. 모두 이 공연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는데, 같이 아이디어를 내면서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게 됐습니다.”
9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른 고보결에게도 이번 연극은 무척 각별하다. 그동안 각종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꾸준히 활동해 오면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이렇게 관객과 가까이 호흡하며 연기하는 일이 워낙 오랜만이라 더욱 그럴만하다. 연극 <사랑에 스치다>로 무대에 섰던 고보결은 연극이 그리웠던 만큼 매회 감사한 마음으로 공연하려 한다고 말했다. 또 연극이라는 장르가 지닌 특성상 관객들과 함께 나눈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욱더 소중하다고도 했다. 물론 작품이 담은 메시지가 그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꽃, 별이 지나>라는 제목은 김설진 안무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딱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시적인 느낌의 작품 제목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해 보면 결국 아름다운 것들과 연결되더라고요. 꽃과 별은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이죠. 시간, 추억 등도 그렇고요. 저는 때때로 무용하다 여겨질지언정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 꽃이나 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탄생한 작품인 거죠. 어떠한 답을 내린다기보다 계속 생각해 보도록 하면서, 생의 시간을 꽃과 별로 비유해 제목으로 표현하신 것 같아요. 그러한 과정을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 삶이 더 값져진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을 보시면서 그렇게 탐구하는 과정을 같이 즐겨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삶을 지탱하게 하는 이유, 사랑
연극 <꽃, 별이 지나>는 강아지 다루와 함께 제주도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미호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두루 조명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누구나 사랑을 하고 마음을 건네는 순간이 있다면, 그로 인해 아픔을 겪거나 이별하는 순간도 있는 법. 지원은 미호, 희민의 친구로 등장해 그들과 마음을 나눈다. 고보결은 지원을 연기하게 되면서 “과연 지원이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를 먼저 고민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이유가 하나씩 있잖아요. 저는 지원이 원했던 삶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지원의 삶의 이유를 먼저 파고들게 됐죠. 지원에게는 ‘사랑’이 필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꽃이나 별처럼 바라봐주는 사랑이요. 지원은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는 인물이라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삶은 ‘잘 살았다’라고 여겼을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만약 내 주변에 지원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나 역시 그를 존재만으로 아름답게 바라봐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까지 이르게 되더라고요. 관객분들께서 이 작품을 보시면서 ‘내 주변에 지원 같은 사람은 없나’, ‘주변 사람들을 존재만으로 그저 예쁘게 바라봐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시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랐습니다.”
진지한 고민의 결과는 무대 위로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매 순간 꽃처럼 빛났던 지원의 미소가 별이 되어 반짝이기까지 그가 표현한 모든 감정은 깊은 여운으로 남아 마음을 동하게 한다.
작품은 독특하게도 배우들이 각각 등장인물을 연기함과 동시에 극대화된 신체 움직임으로 꽃, 나무 등의 사물과 각 장면 간 흐름을 표현해 또 한 번 눈길을 끈다. 현대무용을 배운 적이 있던 고보결에게도 이번 작업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현대무용을 배웠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약간은 방해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추구했어요. 테이블 작업보다 워크숍을 많이 했죠. 김설진 안무가님이 추구하신 움직임은 이유 있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억지로 무엇을 흉내 내거나 멋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에 바탕을 둔, 그래서 더 설득되는 움직임을 선호하셨어요. 모두 다 학생이 된 듯한 느낌으로 같이 뒤섞여 연습했습니다. 놀랍게도 저희의 움직임은 기본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다 즉흥으로 이뤄지는데요. 무대의 특성을 살리면서 그 순간 공기로부터 서로를 느끼고 영향을 받아요. 때로는 먼지가 되어보기도 하고요. 오직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죠.”
고보결은 극장을 찾아준 관객들의 마음 역시 궁금하다고 했다. ‘관객들은 과연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찾으러 왔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야 할지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잘 담아낸다면 분명 관객들 역시 극장에 들어설 때와는 조금 달라진 마음으로 나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품 속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그에게도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지는 장면이 있다. 일명 ‘괜찮아 신’이라고 부르는 대목이다.
“말 대신 행동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있어요. 연인인 희민과 지원이 싸우고 난 후, 계속되는 연애가 허무해짐을 표현한 움직임이 있는데요. 희민은 괜찮다고 하지만 지원은 마음이 아프다고 하죠. 대사를 많이 아끼면서 그때 느껴지는 감정들을 함축해 행동으로 표현하는데, 그래서 더 공감을 많이 해주시는 것 같아요. ‘나도 이런 사랑을 했었지’하고요. 피지컬 시어터라 부르는 연극적 장면이기도 한데요. 극장에서만 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의 일종입니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인 만큼 상황에 대입해 바라봐주는 관객들이 많았다던 고보결은 비단 “연인 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말을 대신해 몸으로 감정이나 상황을 표현하면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고, 자유로운 움직임이 그려낸 메시지로 이야기를 확장하는 점 또한 새롭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저는 기본적으로 어떤 힘든 순간도 다 지나가리라 생각하려고 해요. 물리적으로도 그렇죠. 10대, 20대 때 고비의 순간이 찾아오고, 너무 힘들거나 마음이 아팠던 때도 있었어요. 그때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거든요. 그런데 30대가 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게 힘들었기 때문에 뭔가 얻은 것들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더 크게 깨달았고, 저를 토닥일 줄 알게 됐죠. 식물로 표현하자면 양지를 찾으려고 애썼던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힘든 순간에는 밝은 햇살을 찾으려 했고, 그렇게 노력해서 지금까지도 조금씩 자라나고 있어요. 만약 지금 힘들다면 그 어려움은 반드시 다 사라질 거고, 햇살이 비출 날이 분명 올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힘주어 말하던 고보결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배우로 활동하겠다는 꿈을 품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항상 순탄한 과정만 마주했을 리 없을 터. 하지만 그는 주저앉거나 포기하기보다 노력하는 쪽을 택했다. 덕분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성실한 배우로 정평이 난 고보결이다. 그는 여전히 배우고 있고, 또 한층 더 성장하고 있다.
다른 만큼 더 매력적인 현장
고보결은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배우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기 선배들의 발자취는 그에게도 커다란 자극이자 본보기가 됐다.
“선배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백스테이지에 있을 때와 무대에 등장했을 때 공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걸 보면 놀라울 따름이죠. 다들 무대를 아기처럼 순수하게 좋아하고 사랑하세요. 그 마음으로 뭉치신 것 같아요. 다들 베테랑 배우들이신데도 ‘우리 졸보라 미리 준비하는 거야’라면서 사전 연습을 하시는데요. 그만큼 늘 긴장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20년, 30년 경력이 쌓이게 되면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해이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조금도 그러지 않으시거든요. 먼저 같이 맞춰보자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고요. 변함없이 성실하게 임하시는 태도가 정말 아름답고 존경스럽습니다.”
매체 연기를 주로 선보여 온 고보결이지만 무대 연기에 대한 사랑도 남다르다. 연극 <꽃, 별이 지나>를 하면서 그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는 선배 배우들을 포함해 전도연, 엄기준, 박해수 등 매체와 무대 연기를 병행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깊이 있는 성장을 향한 열망 또한 커졌다. 그런 그를 응원해 주러 공연장을 찾은 선배, 동료 배우들도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했다.
“두 현장은 공기부터 달라요. 정말 많이 다릅니다. 저는 영화를 참 좋아하는데요. 영화는 마치 책처럼 볼 때마다 매번 달라요.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봐도 그렇고 10대, 20대, 30대에 들어서서 봐도 보는 대로 다 다르죠. 봤던 것을 또 보면서 다른 것을 찾는 묘미가 있어요. 영화를 찍는 현장을 예로 들면 촬영할 때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잖아요. 공간 제약도 있고요. 손끝, 눈빛까지 카메라에 아주 세세한 부분을 하나하나 다 담아주시는데 만약 배우가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어도 보는 사람은 그가 울고 있는지조차 모를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들이 재미있어요. 카메라에 맞춰 연기를 하다 보면 카메라 움직임에 대한 이해도 더 필요하고요. 선배들은 워낙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계셔서 제가 기술적으로 더 배워나가야 할 점이 많다고 여깁니다. 무대에서 필요한 기술은 또 다른데요. 발성부터 시작해 많은 것들이 필요하죠. 무대에는 계속 배우가 나와 있다 보니 연기하는 순간을 모두가 봐주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그 모든 게 이뤄지는데, 연속성을 가지고 감정선이 쌓여가요. 그래서 공연은 매 순간 다릅니다. 상대 배우나 제 컨디션, 그날 오신 관객분들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죠.”
그는 특히 무대 예술이 가진 특수성에 주목했다. 일정 시간 동안 제한된 공간에서 행해지는 연극은 배우와 관객 간 상호작용이 무척 중요하다. 학창 시절 전공 수업을 통해 배운 내용을 다시금 체감하는 순간, 온몸으로 직접 깨달은 차이점은 각기 다른 장르의 연기를 새삼 더 소중히 여길 계기가 됐다. 이어 고보결은 <꽃, 별이 지나>를 꼭 봐야만 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작품 속 이야기들은 전부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담은 이야기에 진심이 많이 담겨있어요.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인 거죠. 아픔을 감출 필요 없다고, 외면하지 말고 아픔을 바라봐 주라고 말하면서요. 아픈 추억이 생각났을 때 ‘또 찾아왔네’하고 반겨주기를 바라요. 우울조차 내 감정이니까요. 건강한 방향으로 모든 감정을 수용하고 인정해 준다면 존재만으로도 훨씬 더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삶의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우에게 직접 들은 작품 이야기는 훨씬 더 깊이 있고 따뜻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등장인물의 심리 변화를 토대로 한 감정 수용 방식이 성숙한 자아로 거듭나기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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