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싸고 10년 동안 둘로 갈라져 싸운 이른바 ‘양극화된 프랑스’의 모습을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다. 한 독자분이 메일을 주셨다. 작가 에밀 졸라와 그의 논설 ‘나는 고발한다’를 실었던 <로로르> 신문 편집국장 조르주 클레망소(훗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총리)는 유대인에 호감을 가졌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이 두 사람뿐 아니라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어떤 눈길로 바라봤을까.
반유대 감정,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구 왕정체제로의 복귀를 바라는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계, 그리고 보수 언론들은 “유대인인 드레퓌스가 프랑스 민족에 속한다는 거냐? 유대인은 프랑스의 적(敵)이다!”라며 폭력을 부추겼다. 반 드레퓌스 진영의 선동에 휩쓸려 유대인 상점들을 약탈했던 사람들은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폭민'(暴民, mob)들이었다.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졸라에겐 ‘이탈리아계라서 반역자 드레퓌스를 감싼다’는 인신공격이 쏟아졌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도 에밀 졸라는 ‘반유대주의 선동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범죄행위’라고 맞섰다. 프랑스 공화파 가운데서도 급진적 성향을 지닌 조르주 클레망소도 졸라와 마찬가지로 반 드레퓌스파의 반유대주의를 ‘맹목적’이라 비판했다. 이들 보수 반동세력은 (드레퓌스가 무죄임이 드러났는데도) 프랑스 유대인들을 겨냥한 폭력 선동으로 혼란을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태도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졸라와 클레망소를 두고 ‘친유대주의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논의의 핵심을 벗어난다. 같은 맥락에서, 드레퓌스가 무죄라 주장했던 공화파 성향의 사람들이 친유대주의자였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드레퓌스의 유무죄 판단과 공화정을 보는 정치적 시각, 그리고 개인적으로 유대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호불호를 따지는 것은 서로 다른 얘기이기 때문이다. 드레퓌스 옹호파에 속했던 프랑스 사람들도 유대인을 좋지 않게 바라봐 왔던 유럽 백인 사회의 오랜 반유대 정서를 어느 정도는 지녔을 것이다.
드레퓌스가 무죄를 받았다고 해서 프랑스의 반유대정서가 힘을 잃었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인들의 반유대 감정은 △유대인 드레퓌스가 독일 스파이였다는 데 대한 분노 △보불전쟁에서 패한 굴욕감에 더해 그 전쟁 배상금을 조율한 유대인 금융자본에 대한 반감 △파나마 회사 파산으로 50만 명의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입었는데도 대출 중개 수수료로 한몫 챙긴 유대인들에 대한 분노 등이 복합적으로 뒤엉켰다. 거리에서 ‘유대인을 죽여라!’고 외쳤던 사람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드레퓌스가 풀려난 뒤로도 프랑스의 반유대 정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사례 하나를 보자. 1902년 가스 중독사고로 죽은 에밀 졸라의 유골이 1908년 빵떼옹(Panthéon)으로 옮겨지게 됐다(빵떼옹은 존경 받는 위대한 인물들이 묻히는 명예의 전당이다). 졸라의 이장식을 지켜보던 드레퓌스는 한 반유대계 기자가 쏜 총알에 팔을 다쳤다. 배심원들은 “순간적인 격정에 사로잡혀 그런 짓을 했으니 죄가 없다”고 했고 총격범은 무죄로 풀려났다. 폭민들이 유대인을 공격한다고 떼 지어 다닐 때 팔짱 끼고 바라만 봤던 경찰이나 사법부를 비롯, 프랑스 곳곳에 뿌리 깊게 내린 반유대 정서를 짐작할 수 있다.
독일보다 강했던 프랑스의 반유대 정서
폴란드 유대인 출신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영국 리즈대, 사회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영국으로 떠났던 홀로코스트 연구자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덩달아 피해를 입었다”며 흘겨보는 폴란드의 반유대인 정서 때문이었다. 그는 20세기 전반기 독일과 프랑스의 반유대인 정서에 대해 말하면서 “프랑스의 경우는 독일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봤다. 그가 쓴 책(원서명은 Modernity and Holocaust, 1989)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가장 뛰어난 홀로코스트 역사가 중 한사람인 해리 페인골드는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인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 반유대주의 태도를 측정하는 여론조사를 했더라면, 아마도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혐오감은 프랑스인들보다 더 낮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결론지었다.](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새물결, 2013, 74쪽)
위 인용문에 나오는 해리 페인골드(Harry Feingold)는 뉴욕시립대의 하나인 버룩 칼리지(Baruch College)에서 역사학을 가르쳤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인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미 루스벨트 행정부의 유대인 난민 수용정책이 어떠했는가를 다룬 역작 <구출의 정치>(The Politics of Rescue: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and the Holocaust, 1938-1945)를 낸 홀로코스트 연구자다.
이 책에서 페인골드는 미 루스벨트 행정부가 유럽 유대인 구출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눈에 띄게 심해가는 데도) 유대인 이민 쿼터를 넓히지 않고 난민 수용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지적했다. 미국 눈치를 보던 중남미 국가들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유대인 이민자’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을 포함한 세계는 홀로코스트 위기를 앞둔 유대인을 제때 구출하지 못했다. 600만 유대인의 죽음을 가져온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유대인 절멸 의지가 세계의 유대인 구출의지보다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페인골드가 내린 결론이다(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유대인 난민 수용책을 어떻게 폈는지는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헤르츨 “유대인에게 평등 권리란 없다”
유대인 출신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드레퓌스 사건이 낳은 유일하게 가시적인 성과는 시온주의 운동의 탄생”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1891년부터 오스트리아 신문의 파리 특파원으로 있던 테오도르 헤르츨은 러시아 포그롬(pogrom)을 피해 서유럽으로 밀려드는 유대인 난민 위기(연재 77 참조)와 드레퓌스 공방을 바로 현장에서 취재하며 지켜봤다. 헤르츨은 원래 시오니스트가 아니었다. 이주보다는 유럽인들과 동화돼 살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 포그롬과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유럽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을 보면서 ‘유럽은 살 곳이 못 된다’는 판단을 굳혔다.
드레퓌스 유죄가 확정된 6개월 뒤인 1895년 여름 헤르츨은 <유대 국가>(Der Judenstaat) 초고를 마쳤고, 해를 넘긴 1896년 2월 독일 라이프치히와 오스트리아 빈에서 책을 펴냈다. 독일어판 원서 두께는 70쪽으로 얇은 편이지만, 유럽 유대인들에게 준 울림만큼은 결코 작지 않다. 헤르츨의 책을 구해 읽은 유대인 지식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어려운 형편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박해받고 있다. 평등한 권리는 비록 법률에서는 있다 할지라도 거의 모든 곳에서 사실상 폐지돼 있다. (중략)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마을들이 약탈당하고, 루마니아에서는 사람들이 맞아죽고, 독일에서는 때때로 실컷 두들겨 맞으며, 오스트리아에선 반유대주의자들이 온갖 테러를 가하고, 파리에서는 이른바 고급 사교모임이 유대인에겐 문을 걸어 잠근다.](테오도르 헤르츨, <유대 국가>, 도서출판b, 2012, 35-36쪽)
<유대 국가> 책에서 헤르츨이 내놓은 ‘유대 국가’의 청사진은 이러했다. △어디론가 떠날 이주 후보지를 정하고 △도덕적 권위를 지닌 유대인협회가 나서서 이주 실무(유럽 현지의 유대인 부동산 처리와 이주지의 토지 매입 등)를 맡게 될 유대인 회사를 만들고 △런던에 본부를 둔 유대인 회사의 주도 아래 은행과 주식 청약 등을 통해 이주비용을 마련하고 △집단 이주를 한 뒤 궁극적으로는 군대와 국기를 지닌 유대 국가를 세운다.
헤르츨이 머릿속에 그린 유대인 신생국가의 정치체계는 ‘귀족주의적 공화정’이었다. 그는 군중을 무식하다고 여기고 그들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투표는 불완전하다고 여겼다. 21세기 민주주의 잣대로 헤르츨을 보면 한계가 있지만, 그 무렵 그가 살았던 오스트리아 체제는 절대왕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듯하다.
“나는 오늘 바젤에서 유대 국가를 세웠다”
헤르츨은 새로운 토지를 어디서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를 가장 어려운 문제로 봤다. 책에서는 아르헨티나와 팔레스타인, 이렇게 두 곳을 꼽았다. 아르헨티나는 (헤르츨의 표현대로라면) ‘땅은 넓은데 인구가 적고 온화한 기후를 지닌, 지구상에 자연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나라 가운데 하나’이고,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잊을 수 없는 역사적 고향이자, 그 이름만으로 유대인에게 강력한 감동을 주는 집합 구호’다(테오도르 헤르츨, 48쪽). 그 어느 쪽으로든 선택은 유대인들의 여론에 따라 유대인협회가 결정할 것이라 했다.
헤르츨은 책에서 팔레스타인을 고집하지 않았다. 핵심은 유럽을 벗어나 어딘가에 유대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헤르츨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던 ‘술탄 폐하'(오스만 튀르크 지배자)가 이주를 허락해준다면 유대인들이 오스만 튀르크의 재정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 줄 것이라 약속했다. 아르헨티나 정부에도 같은 약속을 했다. 유대인의 풍부한 자금이라는 나름의 당근을 내민 셈이었다.
헤르츨은 동조자들을 모아 1897년 8월29일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를 열었다. 독일과 러시아 등 유럽 각지에서 온 200명가량의 유대인들은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하고자 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가난했기에 헤르츨은 사비를 들여 대회 비용을 메웠다. 참석자들이 똑같이 입은 검은 정장과 흰 넥타이도 헤르츨이 마련해 줬다.
대회를 마친 뒤 헤르츨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나는 오늘 바젤에서 유대 국가를 건설했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5년이나 50년이 지난 뒤에는 그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 사람들에게는 상서롭지 못한 예언이었지만, 51년 뒤인 1948년 5월14일 헤르츨의 바람대로 유대 국가가 중동 땅에 현실로 나타났다.
헤르츨은 이주 후보지로 남미 아르헨티나, 아프리카 우간다 같은 곳도 검토를 했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곳은 팔레스타인이었다.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현지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기도 했다. 1904년 죽기 앞서 헤르츨이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1903년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그는 이런 말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팔레스타인이야말로 우리 유대인 민족이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이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678쪽).
“유대놈들, 이주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유럽의 백인들은 (늘 혐오스럽게 바라보던, 마주치면 불편한) 유대인들이 어디론가 떠나주길 바랐다. 러시아 유대인 학살에 나름의 책임이 있는 러시아 내무장관 벤젤 폰 플레베는 “우리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수용할 수 있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립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헤르츨에게 말했다. 1888년 독일 국왕(Keiser)에 오른 빌헬름 2세도 유대인 집단이주를 두 팔 벌려 반겼다.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그는 오스만 튀르크의 군주인 술탄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유대 놈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나주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폴 존슨, 676쪽)
유대인이 떠나기를 바라는 것은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외무장관 랜즈다운 후작과 식민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처음엔 이주지 후보로 키프로스를 검토하다가 이집트 국경지역으로 수에즈 운하에서 멀지 않은 알아리시(지중해에 맞닿은, 지금의 시나이반도 북부 샤말 시나)를 검토했다. 헤르츨은 이들 두 사람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자, 논란이 일만한 문서를 하나 그들에게 보냈다.
[(알아리시로 유대인 집단 이주가 이뤄진다면) “영국은 전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는 1000만의 신민(臣民),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충성스런 신민 1000만 명을 단번에 얻게 될 것입니다”](폴 존슨, 677쪽).
영국 외무장관과 식민장관이 유대인 집단 이주지로 알아리시 지역을 검토한 근본적인 이유는 대영제국의 이익이었다. 수에즈 운하(1869년 개통)는 아시아 식민지인 인도-동남아시아를 잇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다. 그 가까이에 대영제국이 믿을 수 있는 동맹세력이 자리 잡는다면, 든든한 방어막이 생겨난다. 하지만 알아리시로의 이주 검토는 이집트 쪽의 강력한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바이츠만, “우리가 수에즈운하 지켜드리겠다”
헤르츨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03년 그가 대영제국 지도자들과의 접촉을 위해 로비스트로 고용했던 변호사는 로이드 조지(1863-1945,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영국 총리는 아서 밸푸어(1848-1930)였다. 조지와 밸푸어,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영국 외무장관 렌즈다운 후작, 식민장관 체임벌린의 공통점은 유대인을 앞세워 대영제국의 세력범위(정치학 용어로는 ‘패권’)을 넓히고 궁극적으로 그 지역을 기독교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이라 일컫기도 한다.
1904년 심장마비로 죽은 헤르츨에 이어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 1874-1952,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다. 옛 러시아제국의 벨라루스 지역 출신인 바이츠만은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폭약을 만드는 기본 원료인 아세톤의 대체 원료를 개발해 영국군과 정부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이런 일로 바이츠만은 대영제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얼굴을 알렸고, 그 인맥을 바탕으로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훗날 그에겐 ‘아세톤으로 대통령이 된 과학자’란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헤르츨이 팔레스타인 말고도 아르헨티나, 우간다 등을 이주지로 저울질했던 것과는 달리, 바이츠만은 오로지 팔레스타인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대영제국이 유대인의 알리야(aliyah, 귀환)을 이끌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라 여겼다. 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식민지를 꾸려가는 패권국가인 대영제국의 도움을 받는다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라는 시오니즘의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봤다(훗날 아랍인들에겐 불행을 가져왔지만, 유대인들에겐 현실적으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바이츠만도 대영제국이 수에즈운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중동에 유대 국가를 세우면 수에즈운하를 지키는 훌륭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강조하곤 했다. 바로 앞에서 본 것처럼, 중동지역으로 유대인들의 집단이주가 이뤄지면 ‘충성스런 1000만 신민’으로 대영제국의 이익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는 뜻을 비친 헤르츨의 서신도 같은 맥락이다.
유럽 시오니즘 운동을 이끌었던 두 지도자(헤르츨과 바이츠만)의 말은 헛된 소리가 아니었다. 훗날 현실로 나타났다. 아랍민족주의를 내걸었던 걸출한 혁명가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가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려들자, 이스라엘 군은 영국-프랑스 군과 한패가 돼 이집트 군에 맞섰다(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미지북스, 2021년 개정증보판, 239-240쪽 참조).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 튀르크 군의 공세에 맞서 수에즈 운하를 지키느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1915년 1월과 1916년 8월 오스만 튀르크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수에즈를 거의 점령할 뻔했다. 그러자 영국은 지키지 못할 공수표를 아랍 부족들에게 내밀었다. 1915년 10월 이집트의 영국 총독 격인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은 아랍 하시미테 족장 셰리프 후세인에게 “영국을 도와주면 전쟁 뒤 중동 지역 아랍인의 독립을 인정·지지하겠다”는 양해각서 형식의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이른바 ‘맥마흔-후세인’ 협정이다.
‘신사의 나라’ 대영제국의 약속을 믿고 2만 명의 아랍 무장세력이 오스만 튀르크를 후방에서 괴롭히는 게릴라전을 폈다(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배우 피터 오톨이 나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고고학을 전공했고 아랍어에 능통한 영국군 장교 토머스 로렌스가 아랍 게릴라와 함께 싸웠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하지만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중삼중의 밀약으로 아랍인들을 배신했다.
사이크스-피코 밀약,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은 맥마흔-후세인 협정을 맺은 7개월 뒤 이와는 모순되는 밀약을 프랑스와 맺었다. 1916년 5월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조르주 피코는 전쟁 뒤 두 나라가 중동 지역을 나눠 갖기로 했다. ‘사이크스-피코 밀약’은 △팔레스타인을 아우르는 지중해변, 이라크, 요르단은 영국이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이었던 러시아에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동부 지역(아르메니아)을 떼어준다는 내용이었다. 아랍인들 눈에 ‘배신자들의 밀실 담합’으로 비쳐질 이 밀약은 러시아의 폭로로 세상에 드러났다.
[영국이 이미 아랍 지도자 후세인에게 독립을 약속한 뒤에 이뤄진 이 비밀협정은 아랍 민족에게는 속임수나 다름없는 이중 외교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뒤였다.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우리 사회주의공화국은 일체의 제국주의적 영토 야욕과 밀실 담합을 배격한다”면서 비밀협정의 내용을 폭로했다. 이 폭로가 나오자 당시 유럽사회에는 “영국은 당황했고 아랍은 경악했고 터키는 기뻐했다”는 얘기가 널리 퍼졌다.]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미지북스, 2021년 개정증보판, 237-238쪽)
사이크스-피코 밀약보다 11년 앞서 맺어졌던 가쓰라-태프트밀약(1905년 7월)은 사이크스-피코의 아시아판(版)인 셈이다. 일본 가쓰라 다로 총리와 미국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이 도쿄에서 만나 ‘일본은 한반도, 미국은 필리핀’에서의 독점적 지배권을 갖기로 합의한 것은 (사이크스-피코 밀약이 중동 현지인들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듯이) 한반도와 필리핀 사람들의 자주적인 의사결정권을 깡그리 무시한 제국주의적 행태였다.
후세인-맥마흔 협정, 사이크스-피코 밀약에 이어 대영제국이 중동지역에서의 패권 확장을 위해 이중삼중의 줄타기의 마지막 퍼즐이 ‘밸푸어 선언'(1917년 11월)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전쟁자금이 딸린 영국은 유대인 금융재벌 로스차일드가 전쟁 채권(war bond)를 대량 구매해주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세우는 걸 돕겠다고 했다. 대영제국과 유대인 금융자본의 유착은 지난 2000년 동안 그곳에서 살아온 아랍 원주민들에게 대재앙을 안겨주었다. 다음 주엔 밸푸어 선언으로 봇물을 이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낳은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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