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유명 화가 쿠사마 야요이의 2001년 작품 ‘호박’의 가격은 12억3200만원이다. 보통 사람은 선뜻 구매하기 힘든 수준이다. 그런데 대학생 A씨는 이 그림의 소유주가 될 수 있었다. 작년 말 공동 투자자 1만88명이 각자 10만원씩 내서 지분을 나눠 갖는 ‘조각 투자’ 방식으로 그림을 함께 사들인 것이다.
이 작품 매입은 자본시장법 시행 이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투자계약증권’이 발행된 사례로 주목을 받았다. 조각 투자 방식에 따른 지분 취득과 매각 등에 대한 법적 안전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이를 위한 법률 자문은 법무법인 세종의 황현일(변호사시험 2회) 변호사, 오재청(변호사시험 4회) 변호사, 허준범(변호사시험 4회) 변호사와 한상환 변호사(사법연수원 45기)가 담당했다. 네 변호사는 “그동안 자산가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미술품 투자를 일반 투자자들도 소액으로 안전하게 투자할 방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 미술품 조각 투자에 ‘투자계약증권’ 첫 발행…법적 안전장치 마련돼
투자계약증권은 공동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 결과에 따른 손익을 분배받는 계약상 권리를 문서로 나타낸 것이다. 상장사나 금융사를 중심으로 발행되는 주식, 채권 등에 해당하지 않는 증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투자계약증권의 범위를 넓히면 투자자를 폭넓게 보호할 수 있다.
투자계약증권은 지난 2009년 2월 자본시장법 제정 당시 도입됐지만 실제 발행 사례가 나오지 않았다. 주식, 채권 등 기존 증권을 통해 기업의 자금 조달이나 투자를 받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자계약증권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 시기에 ‘조각 투자’ 방식이 유행하면서부터다. 당시 음악 저작권에 조각 투자를 하는 ‘뮤직카우’, 한우 소유권에 조각 투자를 하는 ‘뱅카우’ 등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새로운 투자 방식에 법적 안전장치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투자 대상이나 투자를 주관한 업체에 문제가 생길 경우 투자자들이 구제받을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는 지난 2022년 11월 ‘조각 투자’에 대해 자본시장법상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하는 구조로 사업을 진행하도록 했다. 투자자 보호를 위한 법적 안전장치를 요구한 것이다.
◇ 12억짜리 작품 조각 투자에 72억 투자금 몰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호박’에 대한 투자계약증권은 미술품 투자 플랫폼 열매컴퍼니가 발행했다. 조각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에서 투자계약증권이라는 법적 안전장치가 더해지면서 청약 경쟁률이 6.5대 1까지 치솟았다. 12억3200만원짜리 그림에 대한 조각 투자에 72억원의 자금이 몰린 것이다.
법무법인 세종이 국내 최초로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하기 위한 법률 자문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본시장법 시행 이후 14년 동안 투자계약증권이 단 한 번도 발행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선례 자체가 없었다.
법률적으로 동산(動産)에 해당하는 그림에 대한 조각 투자에 있어서 공동 소유권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지가 핵심 과제였다. 동산 소유권은 점유를 통해 취득되는데 그림 한 점을 투자자 1만여명이 자신의 지분만큼 나눠서 점유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법무법인 세종의 황현일 변호사는 “투자계약증권을 우리 법제상 허용되는 ‘채권적 유가증권’으로 발행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했다. 우선 미술품 투자 플랫폼이 투자자들과 맺은 투자계약에 ‘투자자가 투자계약증권을 양도하는 경우 동산에 대한 목적물 반환청구권이 함께 양도된다’는 취지의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와 함께 ‘투자자가 투자계약증권을 양도할 때, 증권 양도 및 공유지분 양도 사실을 미술품 투자 플랫폼에 통지하거나 이에 대해 승락을 받아야만 양도의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조항도 넣었다.
황 변호사는 “이런 방식으로 하면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한 미술품 투자 플랫폼과 조각 투자를 한 투자자 모두 지분 취득과 변동에 따른 권리관계를 명확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국내에서 진행된 다른 미술품 조각 투자를 위해 발행된 투자계약증권도 모두 법무법인 세종이 고안한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 가짜 미술품, 뻥튀기 가격에 속은 경우 손해배상 받을 수 있어
미술품 조각 투자를 투자계약증권 발행 방식으로 진행하면 가짜 미술품에 속아 투자를 한 투자자들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한 업체 측이 그림 가격을 부풀려 투자자들이 손해를 입은 경우에도 자본시장법에 따라 업체 측이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된다.
자본시장법은 증권신고서나 투자설명서에 거짓 기재가 있거나 중요 사항이 누락돼 투자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 회사에서 손해에 관한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한 업체 측이 자신에게 고의나 과실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황 변호사는 “투자계약증권으로 인정되기 전에는 미술품이 위작이라 손해를 입을 경우 투자자들이 자신의 손해를 직접 입증해야 했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면서 “미술품 조각 투자를 투자계약증권 방식을 하게 되면 자본시장법에 근거해 손해배상액을 추정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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