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핵심 기술에 대한 ‘법적 보호망’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배경에는 ‘자칫 국가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반도체 등 국가 산업기술을 겨냥한 범죄는 해마다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이 해외 기술 유출 사건에 대해 확정한 역대 최대 처벌 수위는 징역 5년에 불과하다. 국내 산업기술을 겨냥한 범죄로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나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법조계 안팎에서 해외 기술 유출을 ‘간첩 행위’로 처벌하는 등 법적 보호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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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건수는 23건에 달한다. 이들 가운데는 국가 핵심 기술도 5건이나 포함됐다. 국내 산업기술이 해외로 빼돌려지다 적발된 사례만 96건으로 3분의 1(33건)이 국가 핵심 기술이었다.
특히 기술 유출 시도는 반도체 분야에 집중됐다. 지난해의 경우 해외 산업기술 유출 적발 사건 전체의 65%(15건)가량이 반도체에서 발생할 정도다. 5년 동안 해외 산업기술 유출 적발 사례 중에도 반도체 분야만 38건으로 40%에 육박했다. 국가 핵심 기술도 10건이나 포함돼 있었다. 기술 유출 사건이 끊이지 않으면서 해마다 재판에 넘겨지는 피고인도 30명을 웃돌고 있다. 지난해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은 31명이다. 2021년 39명과 2022년 34명에 이어 30명대 수준을 기록 중이다.
문제는 해외로 국내 핵심 기술을 빼돌리는 국부 유출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처벌 수위는 높지 않다는 점이다. 산업기술보호법에서는 국가 핵심 기술을 사용할 목적으로 해외로 빼돌린 경우 3년 이상(15억 원 이하 벌금)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산업기술을 외국에서 사용하려고 유출한 때에도 15년 이하(15억 원 이하 벌금)에 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대법원에서 확정된 역대 최고 처벌 수위는 징역 5년에 불과하다. 1심 기준으로도 징역 6년이 가장 높은 수준의 처벌이었다. 국가 핵심 기술의 경우 최대 18년까지 처벌하게 한 새 양형 기준이 이달부터 시행 중으로 법원 내에서도 ‘엄벌’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간첩죄 적용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탈(脫)냉전 등 시대 변화로 이미 유명무실해 진 간첩죄를 적용해 ‘기술 보호 우산’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법 제98조(간첩)는 ‘적국을 위해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군사상의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도 동일하게 처벌하고 있으나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적국’이라는 개념이 글로벌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 시대에 맞지 않는 탓이다. 실제로 지난해 간첩죄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은 단 2명에 불과했다. 2021년 10명을 제외하고는 최근 5년 동안 대부분 1~5명 수준이다. 게다가 정보의 수준에 따라 간첩 행위가 인정되지 않는 사례마저 등장하고 있다. 청주지법 형사11부(김승주 부장판사)는 앞서 2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충북동지회 소속 A(60) 씨와 B(53) 씨, C(50) 씨 등 3명에게 각각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이들이 2017년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아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결성한 뒤 미화 2만 달러 상당의 공작금을 수수하는 등의 혐의는 유죄로 판단했다. 반면 이들이 탐지·수집한 정보는 가치가 낮아 국가 기밀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죄가 없다’고 봤다.
기술 발달에 따라 정보의 질이 달라지고 있는 데다 시대 변화로 적국을 딱히 지칭할 수 없는 만큼 미국 등 해외와 같이 기술 유출을 사실상 간첩죄로 적용·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경제스파이법(EEA)과 영업비밀보호법(DTSA)으로 피해 규모에 따라 징역 30년 이상으로 가중처벌하고 있다. 영국도 지난해 국가안보법을 제정했다. 대만은 2022년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경제·산업 분야 기술 유출을 간첩 행위로 규정했다.
이근우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현재 형법은 일본 법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측면이 많다”며 “국내 간첩죄는 자국에 피해를 입히면 처벌한다는 외국과 달리 적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산업 스파이 등이 굳이 적국일 필요가 없다”며 “적국이 아닌 외국을 위한 간첩을 형법에 규정하는 자체가 국내 산업 기밀을 보호하는 데 상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70년 넘게 변화 없는 형법상 간첩죄에서 적국을 외국으로 고치는 것만으로도 산업기술 유출을 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있다. 국가 성장의 지렛대로 작용하는 중요 산업기술을 보호하자는 데는 동의하나 실제 입증이 쉽지 않아 재판 지연만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다. 오히려 처벌 강화와 동시에 재판부 전문성을 강화해 재판이 장기간 진행되는 문제점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태엽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간첩죄로 처벌하자는 건 기술 유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국가전략산업을 보호하자는 취지이지만 자칫 기술자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국가 핵심 기술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하나 실제 수사·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검찰과 달리 전담 재판부가 없는 등 법원의 전문성을 높이는 게 우선”이라며 “그래야 기술 유출 사건이 지닌 재판 장기화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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