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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은 인천 일본 조계지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
1883년 강화도조약에 따라 원산과 부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인천이 개항하면서 제물포를 방문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 당시 서울까지 가는 교통이 불편해 인천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숙박료도 일본식 호텔의 2배 이상이었다고 한다. 서울의 일본식 여관의 숙박료는 1박에 75전에서 1원 내외로 알려졌다. 반면 인천에서 서양식 여관 숙박료는 2원으로 알려진 것으로 고려하면 적지 않은 비용인 셈이다.
이는 조선을 오가던 선교사들의 회고록에서도 이 같은 대불호텔이 거론된다. 1885년 인천항을 방문한 아펜젤러 목사는 비망록에서 “끝없이 지껄이고 고함치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 한복판에서 짐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대불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모시고 있었다. 서양 음식이 잘 마련되어 있었고, 입에도 맞았다”고 전했다.
대불호텔 초기에는 2층 목조 가옥으로 운영되다가 1887년 벽돌조의 서양식 3층 가옥으로 확장됐다. ‘하퍼즈 위클리’라는 외국 잡지에 대불호텔 모습이 그림으로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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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은 개장 30년 만에 중국인에게 매각되고 1919년부터는 중화루(中華樓)라는 중국 음식점으로 바뀐다.
중화루는 한때 공화춘, 동흥루와 함께 인천의 3대 중국 요릿집으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런 중화루도 1960년대 이후 경영난을 겪으면서 1970년대 초 폐업했다. 이후 1978년 7월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 건물은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대불호텔의 폐업은 교통발전이 만든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경인철도 개통이 그 이유다. 1899년 경인철도 개통 이후 인천에서 서울까지 이동 시간이 1시간 40분 내외로 단축되면서 대불호텔을 찾는 투숙객도 줄었다고 한다.
대불호텔이 다시 대중에게 소개된 것은 2011년 상가 건물 터파기 진행 중 호텔 지하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벽돌 구조물이 발견되면 서다.
문화재청은 대불호텔 터 보존을 권고했고, 해당 행정기관인 인천 중구는 56억 원을 들여 해당 부지에 3층 규모 호텔 건물을 복원해 2018년 3월 ‘대불호텔 전시관’을 개관했다. 전시관 1층 투명 유리창으로 130년이 넘은 대불호텔 지하 구조 흔적을 볼 수 있다. 대불호텔 객실 모습을 재현한 2층에는 서양식 침대와 의자, 찻잔과 커피메이커 등을 갖춰 놨다. 하지만 복원된 대불호텔은 건물 외관이 실제 모습과 다르고 전시 자료도 잘못돼 부실 지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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