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의언론=박상현 기자]
원희룡 후보는 지난 11일 국힘당 대표 2차 TV토론에서 한동훈 후보의 이모부를 언급하며 “민청학련 주동자인 이모부 계시지 않느냐. 통일혁명당 신영복 추모사와 기념사에 앞장섰고 ‘좌파 언론’ 본거지 프레시안 설립자이면서 이해찬 전 총리와 함께 민청학련 세대의 대부 역할을 하는 부분 등”이라고 주장했다.
원 후보가 언급한 것은 지난 9일 문화일보 칼럼의 아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한동훈의) 알려진 조언자로는 사회 원로 가운데에는 진보언론 프레시안 창업자인 이근성 전 대표와 진형구 전 대전고검장 등이 꼽힌다. 이 전 대표는 민청학련 사건(1974년) 주모자였고, 진 전 고검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고속 승진한 후 17대 총선 때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까지 준비했던 인물이다.”
한동훈의 ‘좌파 인맥 연루설’은 인터넷과 SNS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이에 대해 한동훈 이모부인 이근성 씨와 직접 인연이 있는 주대환 씨(조봉암기념사업회 이사장)가 페이스북에 ‘이근성 형의 추억’이라는 글을 올렸다. (편집자)
*다음은 주대환씨 글 전문이다.
1974년 봄 방학동에는 텅빈 논밭 속에 띄엄띄엄 동네가 있었다. 거기서 석진, 채수, 동훈 세 친구들과 함께 밤새 등사를 했다. 민청학련의 선언문, 유신독재를 타도하자는 격문 따위 여러 종류의 유인물을 등사해놓으면 우리가 잘 모르는 선배들이 긴장된 얼굴로 와서 가지고 갔다.
그 비밀 인쇄소의 책임자는 국사학과 대학원생 이근성이었다. 며칠 되지 않는 짧은 시간 함께 일했지만, 참 따뜻한 형이고 인간과 문화 예술에 대한 사랑이 깊은 휴머니스트라고 느꼈다.
이 초라한 비밀 인쇄소에서 빠져나온 1974년 4월 3일 저녁, 동숭동 하숙집에서 저녁 TV 뉴스에서 ‘반국가단체’ 민청학련에 가담한 자는 수일 내로 자수하지 않으면 최하 징역 5년부터 사형까지 중형으로 다스리겠다는 중앙정보부의 발표를 듣고 아직 만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너무 황당해서인지 이상하게도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서야 취조하는 경찰관들에게서 근성 형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지난 50년 세월, 근성 형과 조우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언론인이 되어 중앙일보, 프레시안 등에서 활동하고 문화운동에도 관여한다는 소식을 간혹 들었다.
요 며칠 사이에 어떤 정당의 당 대표 선거 때문에 근성 형의 이름이 자주 들린다. 그런데 그 형을 친북 좌파 또는 공산주의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참 황당하다. 정말 참으로 무식한 사람들이다. 지식이 모자란다는 뜻이 아니라 태도가 반(反) 지성적이라는 이야기다. 아니 (역사)지식도 모자란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우리나라 민주헌정이 중단, 혹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상당히 큰 부상을 입거나 손발이 묶여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기간이 있었다. 그 15년이 우리가 아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기간이다.
그런데 친북 주사파 혹은 공산주의자들이 평화운동이나 통일운동이라는 미명 하에 분탕질을 치고 오히려 민주화운동의 대의를 훼손한 시기는 주로 1987년 이후였다. 전대협, 한총련 등이 당시의 단체들이다. 그 둘을 잘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자풍의 온건한 휴머니스트 근성 형으로 하여금 분노하여 데모에 가담하게 한 것은 1972년 10월 유신이었다.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 감옥에서 나와서 겨우 중앙일보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류근일 선생까지 모두가 가담하고 지원했던, 김대중 계, 김영삼 계 어른들도 도와준 민청학련과, 전대협이나 한총련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식하다. 나는 이런 무식한 사람들과는 아무리 민주공화국의 동료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되도록 자주 만나고 싶지 않다.
#한동훈좌파, #이근성, #민청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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