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의언론=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
트럼프가 ‘힐빌리의 노래’ 주인공 J.D. 밴스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올해 39세다.
난 트럼프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가 ‘민심을 읽는 데는’ 칼같이 예리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미국’은 어디로 가는가……? 4년 전(2020년 11월 29일) 게시했던 페북 글 ‘트럼피즘과 힐빌리의 노래’를 다시 읽어본다.
때론 영화 한편이나 자전(自傳) 한 권이 정교한 사회과학적 설명보다 역사 현상을 더 잘 설명한다. 베스트셀러 ‘힐빌리의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애팔라치안 산맥 러스트벨트 지역 백인 흙수저들(힐빌리-레드넥-화이트 트래시로 불리는 빈민, 저소득층)의 구조적으로 파괴된 삶을 다룬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연동된 미국 제조업 붕괴로 빈곤의 문화가 암종처럼 퍼진 켄터키, 오하이오 백인 지역이 무대다. 가정해체, 실업, 가정폭력, 마약, 음주, 총기사고, 범죄가 삶의 일상사다. 여기서 희망과 꿈은 공허한 단어다.
필자 J. D. Vance도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진 가정을 버렸고 약물중독자 엄마는 수시로 남자를 바꿔댄다. 외조부도 알콜중독자며 동네 전체가 그런 스산한 분위기다. 밴스의 대가족, 친인척과 동네 친구들 통틀어 대학 진학자 자체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밴스는 오하이오 주립대를 거쳐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성공한 사업가가 된다. 필사의 노력으로 폐허의 고향을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힐빌리의 노래’는 성공 찬가가 아니다. 애증의 가족과 절망에 잠긴 고향을 그린 통절한 비가(悲歌)다. 제목 자체가 ‘힐빌리의 비가’로 옮겨져야 할 이유다.
트럼프 현상이 미국을 강타한 까닭을 ‘힐빌리의 노래’가 웅변한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세계자유무역과 이민자들을 공격하고 인종차별적 망언을 일삼는 트럼프에 환호하는 백인들이 그렇게도 많은 이유가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저소득 – 저학력 백인들은 ‘백인의 나라’였던 미국에서 갑자기 일자리가 썰물처럼 사라지고 빈곤이 자신들을 잠식하는 것에 분노한다.
고교생 밴스가 2주간 알바비를 모아 겨우 스테이크 한 점을 사먹을 때 이웃집 평생 백수는 실업급여로 매주 스테이크를 즐긴다.
여기서 우린 엘리트 – 고학력 – 고소득 백인들(주로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끈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와 연계된 사회복지제도의 위선과 허점에 대한 백인 저소득층의 적개심을 읽는다.
트럼피즘은 바로 이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연료 삼아 횃불처럼 타올랐다. 미국 대선이 재현한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은 지역별 산업구조의 차이가 초래한 지역별 – 도농 간 빈부 양극화와 직결된다. 결국 트럼프 현상의 근원엔 미국시민들의 계급적 이해관계 충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격발한 포퓰리즘의 발호와 미국 민주주의의 쇠락 저변엔 빈부격차와 계층적 대결구도의 심화가 있다. 트럼프가 패배했어도 트럼피즘이 장기지속될 가능성이 큰 건 이 때문이다.
내가 2000년대 초 연구년으로 미시간에 체재할 때 디트로이트를 갈 때마다 섬찟섬찟 놀란 건 미국 자동차산업의 메카였던 디트로이트 시내의 망가진 모습이었다. 자동차산업 붕괴가 도시경제 붕괴를 불러 디트로이트 시 정부가 파산하고 도심이 급속히 폐허화한 광경이 충격적이었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이런 구조적 – 거시적 분석보다는 개인적 – 미시적 묘사에 공을 들였다. 실족 직전의 주인공 밴스의 손을 벼랑 끝에서 잡아준 인물은 ‘할모'(외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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