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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레거시 반도체에 ‘몰빵’하는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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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중국 수출통제에 막혀 첨단 반도체 생산 사실상 불가능

中, 기술자립 위해 과학기술예산 증가율 국방예산보다 높아

美 상무 “中, 몇년 안에 레거시 반도체 60%가량 제조“ 경고

中, 레거시 시장 장악해 저가공세 펴면 글로벌 시장엔 ‘재앙’

조 바이든(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2년 8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제조와 연구·개발( R&D), 인력양성 등을 위한 보조금·대출 지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반도체 과학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지난 4월 5일 벨기에 루뱅에서 열린 제6차 무역기술협의회(TTC) 장관회의에 참석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중국은 항상 반도체(칩) 수출통제를 우회할 방법을 찾는 만큼 미국과 동맹이 늘 경계해야 한다”며 “앞으로 몇년 간 시장에 나오는 모든 새 ‘레거시’(Legacy,범용·구형) 반도체의 60%가량이 중국에서 생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이 레거시 반도체 생산에 ‘올인’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통제가 강화되면서 첨단 칩 제조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할 수 없는 탓에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여전히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발 뒤처진 레거시 반도체 제조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물샐틈없는’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 정책을 펴지만, 중국의 반도체 생산은 지난 1분기에 전기차 등 신에너지차와 스마트폰의 강한 수요에 힘입어 전년 같은 기간보다 40%나 급증했다고 미 경제 전문지 포춘 등이 지난 6일 보도했다. 여기에다 지난 5월 매출도 지난해 5월보다 24.2%나 급증했다고 미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전했다.

영국계 투자은행(IB) 바클레이즈는 중국의 반도체 제조능력이 시장의 예상치를 뛰어넘어 5~7년 안에 2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TrendForce)에 따르면 28나노미터(㎚) 이상 레거시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 비중은 지난해 29%에서 2027년 33%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중신궈지(中芯國際·SMIC)는 1분기 17억 5000만 달러(약 2조 4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글로벌 시장점유율도 지난해 4분기보다 0.3%포인트 상승한 5.7%를 기록하며 파운드리 분야에서 처음으로 대만 타이완지티뎬루(臺灣積體電路·臺積電·TSMC)과 삼성전자에 이어 3위로 발돋움했다.

지난 1월 24일 중국 베이징의 한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이 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 뉴시스

2010년대 후반까지 24㎚ 이상의 레거시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던 중신궈지는 세계 1·2위인 TSMC와 삼성전자 등을 따라잡기 위해 첨단 7㎚ 칩 생산 계획을 세우고 베이징에 세번째 공장을 짓기로 했으나 아직 지지부진한 상태다.

나노(㎚)는 10억분의 1m를 가리키는 단위다. 1㎚는 성인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에 해당할 만큼 지극히 작은 크다. 반도체에서 각종 회로를 웨이퍼 원판에 그려넣는 선폭의 크기를 표기할 때 쓴다. 예컨대 28㎚에서 7㎚로 회로 선폭이 줄어들면 동일한 면적에 넣을 수 있는 데이터와 회로의 양이 그만큼 많아진다. 자연스레 생산성과 수익성의 증가로 이어지는 만큼 ㎚의 숫자가 작아진다.

28㎚의 레거시 반도체는 오래 된 후진적 기술이다. 지금 3㎚ 칩이 양산 가능하다. 애플의 최신 아이폰15에 3㎚ 반도체가 탑재된다. 최근에는 2㎚가 최첨단 공정이다. TSMC와 삼성전자가 이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미 상무부가 중국 반도체 규제를 14㎚ 이하 로직(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18㎚ 이하 공정의 D램 등으로 정한 이유다. 더욱이 SMIC는 28㎚ 노드((반도체 회로를 구성하는 트랜지스터의 선폭) 회로를 그릴 수 있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를 자체 개발해 직접 레거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관건은 7㎚ 칩 생산에 필수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중신궈지는 2018년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로부터 EUV 노광장비 11대를 구입계약을 맺었다. 이를 감지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2020년 12월 중신궈지 계열사 등 59개 중국 기업을 수출통제 목록에 올리면서 중국이 ASML로부터 EUV 노광장비를 확보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중신궈지(SMIC)의 로고. ⓒ 뉴시스

2021년 출범한 조 바이든 미 행정부도 제재를 한층 강화했다. 2022년 10월 18㎚ D램과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14㎚ 이하 로직 반도체 등에 대해 기술은 물론 인력·장비수출까지 금지했다. 미국뿐 아니라 미국과 반도체 공급망이 연결된 모든 국가가 이 제재에 참여하도록 강제했다. 바이든 정부는 이후에도 대중 반도체 제재의 고삐를 죄고 있다.

이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기술자립을 핵심 목표로 정했다. 첨단 반도체 기술자립을 통해 미국을 뛰어넘자는 것이다. 중국은 올해 과학기술 분야 국가예산 증가율을 국방예산 증가율(7.2%)보다 높은 10%로 설정하는 등 총력전 펴는 모양새다.

그렇지만 중국이 한국과 대만, 미국 등의 반도체 기술을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국은 최첨단 반도체 기술을 따라잡는 ‘추격전략’을 잠시 미뤄두고 레거시 반도체에 집중 투자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 기술력도 보유하고 있고 양적 승부가 가능한 레거시 반도체에 집중하면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축적하는 전략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첨단 반도체는 부가가치가 높지만 사용처가 적은 반면 레거시 반도체는 부가가치는 낮아도 자동차 등 사용처가 많은 데다 반도체 기술을 연마하고 인력을 확보하기도 쉬운 편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레거시 반도체 제조능력을 제고에 ‘몰빵’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레거시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짓는 기업에 최대 10년 법인세 면제 혜택을 준다. 중신궈지는 2022년 상하이(上海)에 28㎚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며 89억 달러를 투자하고, 창안(長安)자동차는 지난해 87억 위안(약 1조 6000억원)을 충칭(重慶)에 투자해 12㎚ 차량용 칩 공장을 짓는다. 국제 반도체 장비·재료 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새로 문을 여는 세계 반도체 팹(공장) 42개 가운데 18개가 중국 공장이다. 한국 1개, 일본 4개, 대만이 5개인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다.

ⓒ 자료: 대만 트렌드포스

이와 함께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지난해 칩 제조기계를 대량 구매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중국 해관총서(海關總署·관세청)는 지난해 기준 컴퓨터용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장비수입액은 전년보다 14%가 증가한 400억 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유럽 메모리 부품기업 뉴몬다의 마르코 메츠거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이 같은 현상은 미국이 더욱 제재를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려할 만한 일은 레거시 반도체는 이미 기술적으로 성숙한 부품이라는 점이다. 즉 기술우위보다는 가격우위가 시장에 더 큰 파급력을 미친다는 뜻이다. 전기차와 배터리, 철강 등에서 이미 이뤄진 ‘중국산 저가공세’가 레거시 반도체에서도 재현된다면 28㎚ 이상 칩 대다수가 중국산으로 뒤덮이는 것도 시간문제다. 보조금을 앞세운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과잉생산을 통해 이를 글로벌 시장에 헐값으로 밀어내기 수출을 한 결과 전례 없는 시장교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용어설명

레거시 반도체는 가전제품부터 전기차에 이르는 다양한 전자기기에 쓰이는 범용 또는 덜 발전된 칩이다. 사실상 우리 일상을 이루는 모든 공산품에 탑재된다. 산업용 로봇은 물론 자동차, 가전제품, 전력계통 설비, 심지어 지하철의 신호 수신용 아날로그 칩도 레거시 반도체의 하나다. 방위산업용 반도체로도 주류다. 보통 미사일과 로켓, 군사무전기 등에 쓰이는 파워 반도체나 통신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 치명타를 날린 2021년 반도체 수급난도 최첨단 칩이 아닌 레거시 반도체 부족으로 생긴 일이다. 당시에는 20~28㎚ 칩이 부족했다. 주로 차량용 고성능 마이크로컨트롤러(MC) 제품에 쓰이는 반도체다.

미국의 대중 수출통제는 레거시 반도체를 ‘16~14㎚’ 세대보다 큰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도 크기의 칩은 10년 조금 넘은 기술이다. TSMC는 내년 애플의 스마트폰이나 엔비디아(Nvidia) 프로세서 같은 최고급 2㎚ 반도체의 대량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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