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離散)를 겪은 불운한 민족이라 말한다. 로마제국에 맞서 3차에 걸친 반란(서기 66년, 115년, 132년)이 실패한 뒤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 유럽으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흩어졌다. 유대인들의 소망은 선조들이 살던 고향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갈루트(galut, 유배)를 끝내고 야훼의 뜻에 따라 ‘약속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알리야(aliyah, 귀환)를 꿈꾸었다.
특히 유럽 지역의 유대인들은 백인 기독교도들의 멸시와 차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유럽에서 차별받고 사느니 차라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조직화됐고, 이런 움직임을 유대인들은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라 이름 붙였다. ‘시온’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언덕 이름이다. 우리로 치면 서울 남산을 오르다 보면 만나는 작은 언덕쯤을 떠올리면 딱 맞다.
“시오니즘은 반대! 유대민족주의는 환영!”
유대인에게 ‘시온’은 크기나 넓이가 아니라 지리적 상징성으로 다가온다. 시온 언덕의 공간적 범위를 넓히면 예루살렘이고, 더 넓히면 팔레스타인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시오니즘 운동이란 결국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상징적 목표지인 예루살렘 시온 언덕으로 돌아가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유대민족주의 운동인 셈이다.
문제는 시오니즘 운동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인종주의이고, 심지어 ‘유대 파시즘’이라는 비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시오니즘 깃발을 내건 유대인들은 20세기 중반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그곳에 오래 전부터 살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폭력적으로 몰아냈다. 그 뒤로도 줄곧 주변 아랍국들과 전쟁을 벌여왔다. 21세기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의 학살 등이 보여주듯이, 나와 다른 타자(他者)의 생존권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이고 전투적 이데올로기라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 2000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intifada, 봉기)가 다시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무렵, 필자는 뉴욕에서 국제정치학을 늦깎이로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맨해튼 남쪽 유니온광장에서 벌어진 집회(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집회)에 갔더니, 몇몇 미 유대인 평화운동가들이 ‘Zionism No! Judaism Yes!'(시오니즘은 반대! 유대민족주의는 환영!)라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다.
2003년 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뉴욕과 워싱턴의 집회장에 갔을 때도 똑같은 팻말이 보였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민족자결주의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민족주의는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타민족의 생존권을 부정하는 국수주의적인 시오니즘은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들 유대인 평화주의자들은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존과는 거리가 먼 시오니즘은 거부돼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땅을 나눠 갖고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평화를 되찾는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이 중동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유대인들은 ‘시온’이란 단어를 아주 오래 전부터 입에 올려왔다. 구약성서 <시편> 137편에도 ‘시온’이 나온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로 살면서 듣기에도 서글픈 신세 한탄을 하는 장면에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중략)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표현이 한편으로 음울하고 다른 한편으로 살벌하다.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그만큼 슬픔과 원한에 사무친 유대인들의 마음이 담겼다.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이 지금의 이라크를 비롯한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차지한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망하면서, 유대인들은 이른바 ‘바빌론 유수'(幽囚)의 치욕을 겪었다. 그런 고단한 처지에 놓인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신전 재건을 도와주었던 나라가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이다.
<시편>에선 ‘복이 있으리로다’ 했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은 미국과 손잡고 원유 수출을 막는 등 혹독한 경제제재로 이란의 목줄을 비튼다. 몇 년 전 이란 테헤란대학교의 정치학 전공 교수들을 만나러 갔을 때 보니, 그곳 대학생들은 문과나 이과나 가릴 것 없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을 아예 접고 유럽 쪽 대학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 옛날 바빌로니아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보다는 낫겠지만, 유럽 땅에서 유대인들은 2000년 가까이 백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니 <시편>에 나오는 시온 언덕을 늘 그리워하기 마련이었다. 이는 자연스런 감정이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기에 멀리 북만주나 일본에서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던 ‘코리언 디아스포라’들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유럽 탈출(exodus) 꾀한 시오니즘 운동
논란이 되는 것은 나치 학살에 희생됐다고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600만 유대인들의 선조가 어디에서 살았느냐는 것이다. 본 연재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나치 학살 희생자의 다수는 2000년 전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가 흩어졌던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들(셰파라딤)이 아니라, 20세기 전반기 유럽 유대인의 다수를 차지하던 아쉬케나짐이었다(연재 74 참조).
이들의 선조들이 살던 곳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방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남부의 카자르(Khazar) 왕국이었다. 선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카자르여야 했다(하지만 이 글에서 곧 살펴보듯이, 카자르는 당시 유대인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유대인을 학살하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였다. 따라서 유럽 유대인의 이주지로 생각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지금의 이스라엘 주류 역사학자들은 카자르에 대해선 쉬쉬 하며 입을 열지 않고 망각의 창고에 깊이 넣어놓고 잠그려 한다. 이스라엘 역사 교과서에서도 카자르에 대한 서술이 없다. 카자르 문제는 이스라엘 안에서 논의되는 것조차 금기로 삼는 주제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물론 이스라엘의 건국 정당성을 건드리는 예민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유럽 땅을 떠나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펴던 사람들(시오니스트, zionist)도 반드시 팔레스타인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시오니즘 운동의 중심인물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신문기자 출신 테어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이라면 가장 낫겠지만, (대영제국이 한때 유대인 이주안으로 검토했던) 아프리카 우간다 같은 곳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르츨을 비롯한 시오니즘 운동가들의 가장 주요한 관심은 차별 받는 유럽에서의 탈출(exodus)에 모아져 있었다. 결국에는 팔레스타인으로 최종 목표지로 정하긴 했지만, 처음엔 굳이 그곳이 아니어도 ‘유대 국가’를 세울 수만 있자면 좋다고 여겼다.
“유대인은 뚜쟁이와 고리대금업자”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이전에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곳이 러시아였다. 러시아의 반유대 정서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일화가 있다. 1903년 헤르츨은 러시아 유대인의 해외 이주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었다. 러시아 재정장관 세르게이 비테 백작은 헤르츨에게 빈정거리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저술가인 폴 존슨의 책(A History of the Jews, 1987)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유대인이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특유의 오만함이 있어요. 그들은 또한 뚜쟁이와 고리대금업처럼 온갖 추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을 변호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당신도 이해하게 될 것이오. 나는 돌아가신 황제 알렉산드르 3세(볼셰비키 혁명으로 죽은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에게 “폐하, 만일 600~700만 명의 유대인을 흑해에 익사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소신은 찬성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니 그들을 살려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곤 했소. 도대체 러시아 정부에 원하는 게 뭡니까?]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615-616쪽).
헤르츨이 러시아에 갔을 무렵 그곳엔 5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러시아에 머물고 있었다. 18세기 중반까지 러시아는 자국 땅에서 많은 유대인들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그러다 1772년부터 1795년 사이에 폴란드 동쪽 영토를 3차에 걸쳐 분할 점령하면서 약 100만 명의 그곳 유대인들을 다시 아우르게 됐다. 러시아는 러시아정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비토착민’으로 보고, 집단거주지(게토, 러시아 용어로는 ‘페일’) 안에서 머물도록 하고 이동의 자유를 막았다.
차르 러시아 제정은 19세기 동안 600개가 넘는 유대인 관련 법령을 만들었다. 이 법령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인 키이우(키에프)나 세바스토플 같은 대도시에 살던 유대인들을 도시 바깥으로 추방했다. 돈 강 유역도 유대인 거주 금지구역이 됐다. 러시아 경찰은 걸핏하면 유대인 사냥에 나섰다. 이를테면, 주식거래소를 둘러싸고 그곳 유대인들을 붙잡곤 경찰서로 데려가 거주허가증이 있는지를 심문했다. 사법부엔 판검사 가운데 유대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일반 러시아 학교에서도 유대인 교사나 대학교수가 없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포그롬'(pogrom)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유대인들(이른바 아쉬케나짐)의 언어는 이디시(Yiddish)였다. 이는 중세 독일어에 히브리어와 슬라브 언어가 뒤섞인 언어다(189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유대인 520만 명 중 510만 명이 이디시어를 사용했다). 러시아 정부는 ‘헤데르’라 불리던 유대인 초·중등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못 가르치게 했다. 유대인이 러시아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막기 위한 꼼수였다. 유대인 학생들은 유대인 고등 교육기관인 ‘예시바’에서 전통적인 유대교육을 받았다.
러시아 정부는 유대인이란 존재를 러시아 영토에서 지우고 싶어 했다. 그런 반유대적 분위기 아래에서도 유대인은 러시아 경제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19세기 후반 들어 유대인 금융자본가들이 철도, 광산 등 굵직한 국가 산업에 투자하는 모습을 보이자, 반발이 일었다. 슬라브주의를 내세우는 러시아 보수우익 언론들은 “유대인 놈들이 몰려온다”며 일반 국민들의 경계심을 높였다.
‘폭력적인 엄청난 박해’를 뜻하는 ‘포그롬'(pogrom)이란 단어의 출생지는 러시아다. 포그롬은 홀로코스트보다는 피해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연구자들은 1938년 9월9일 밤 독일 전국에서 벌어졌던 길거리 폭력과 살육도 ‘포그롬’에 포함시킨다. 많은 유대인 상점과 유대교회당 유리창이 깨졌기에 독일에선 그날 밤을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고 일컫는다. 간토(關東)대지진 뒤의 조선인 학살(1923), 중일전쟁에서의 난징 학살(1937)은 일본판(版) 포그롬이다.
러시아를 지배하던 반유대 정서는 1881년 포르롬으로 폭발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일단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던진 폭탄에 맞아 죽는 사건이 터지면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연구자들은 러시아에서 모두 4차에 걸친 포그롬이 있었다고 본다. 최아영(이화여자대학교)의 논문에서 관련 부분을 옮겨본다.
[1881년 이전에 (오데사 같은 곳에서) 발생했던 포그롬을 제1차 포그롬으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1881-1884년에 발생한 포그롬을 2차 포그롬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1903년 베사라비아(현재의 몰도바) 키시뇨프에서 발생한 포그롬(1903)과 1905년 1차 혁명기에 오데사를 비롯한 제국의 전역에서 이어진 포그롬을 3차 포그롬, 1917년 혁명 이후부터 내전기에 발생한 포그롬을 4차 포그롬이라 이른다](최아영,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1880년대 초 남부지역 포그롬을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 2012, no.23).
‘예수를 죽인 자’와 ‘차르의 암살범’
1881년 러시아 포그롬은 한 작은 술집에서 일어난 싸움에서 비롯됐다. 러시아 남부 엘리자벳그라드의 한 선술집에서 한 남자가 술을 마시며 소란을 피우자 유대인 주인이 그를 밀쳐내면서부터였다. 러시아 군중들이 “유대 놈들이 기독교인들을 때렸다”고 외치면서 유대인 집과 상점들을 공격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자가 유대인이란 소문이 퍼졌다. 이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에 ‘차르의 암살범’라는 죄목이 더해졌다.
‘황제 암살자가 유대인이므로 유대인을 구타해도 좋다는 정부의 칙령이 있었다’는 헛소문이 폭동을 더욱 부추겼다. 러시아 폭도들은 거리에서 ‘유대인을 죽여라’하고 소리치며 다녔다. 언론도 자극적인 기사로 학살을 부추겼다. 폭동은 우크라이나 지역인 키이우(키예프), 오데사와 같은 러시아 남부 지역으로 번졌다. 이를 가리켜 ‘남부의 폭풍’이라 일컫기도 한다.
1881년 4월부터 12월까지 모두 200여 건의 포그롬이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사망자 규모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집을 잃은 유대인은 약 2만 명에 이르렀다. 유대교회당인 시너고그도 토라(모세5경) 두루마리가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그런 유혈사태를 저질렀던 폭도들을 붙잡아 벌을 주기는커녕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을 옥죄는 법안들이 더 강화됐다. 경찰과 군인들은 폭도 진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때로는 그들이 유대인 학대를 거들기도 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 정부가 뒤에서 폭도들을 조종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황제를 암살하는 등 혁명의 기운이 달아오르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욕구 불만을 이질집단인 유대인에게 터트리도록 만드는 것도 ‘통치술’이라 여겼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유대인은 선민(選民) 아냐’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제2차 포그롬(1881년 4월)이 터지기 3개월 앞서 타계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젊은 시절에 그는 4년 동안 시베리아 유형생활(1950-1954)을 하면서 유대인 죄수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었다. 그런 시베리아 경험은 소설(<죽음의 집의 기록>,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유대인들 속으로 녹아들었다.
유대인을 바라보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눈길은 곱지 못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자 조혜경(대구대, 러시아문학)에 따르면, 자신들만이 신에게 선택됐다며 러시아인을 깔보는 유대인들의 오만한 선민의식과 더불어 다른 이웃 사람들과 늘 불협화음을 내는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친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인들은 근시안적인 태도, 외고집, 이기주의, 어리석은 열정을 지녔다”고 비판했다(조혜경, ‘도스토예프스키와 유대인 문제’, <노어노문학>, 2015, 제27권 제3호 참조).
도스토예프스키는 월간지 <작가 일기>를 1876년부터 1981년 그가 죽기 직전까지 (몸이 아파 1877년 잠시 쉴 때는 빼고는) 꾸준히 펴냈다. 대문호가 ‘일상적이고 사회사상과 관련된 것이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일들’을 다룬 글을 달마다 싣자, 사람들의 눈길이 쏠렸다. 1877년 3월호 글에서는 ‘유대인들이 거만하고 타민족을 무시하는 태도를 지녔다’고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유대민족은 ‘신이 선택한 민족’이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 자본가들은 러시아인 지주로부터 임대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재임대해 수익을 올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를 농민 착취라고 분개하면서 가난한 러시아 농민들의 반유대 정서에 공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유대인을 겨냥한 폭력을 반대했다. 러시아인-유대인 사이의 갈등은 종교적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유대인들이 습관적으로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 들이대는 이분법 잣대(반유대주의자냐 아니냐)로 도스토예프스키를 따지는 것은 무례할 뿐더러 부질없는 일로 보인다.
“동유럽 포그롬, 나치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1881년의 포그롬 뒤로도 유대인을 겨냥한 약탈과 폭력이 그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1881년 이후 해마다 평균 5만 명에서 6만 명의 유대인이 러시아를 떠났다. 1891년 모스크바에서는 1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도시에서 쫓겨났다. 그해 11만 명이, 그 다음해(1892)에 14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떠났다.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포그롬이 또 벌어졌다. 그 무렵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뿐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에선 1881년부터 1914년 사이에 35만 명의 유대인이 현지 백인들의 폭력을 피해 떠났다.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유대인이 루마니아를 떠났다. 이들 유럽(러시아, 루마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오스트리아 등) 유대인 이주민들 가운데 200만 명이 미국으로 옮겨갔고 일부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폴 존슨, 618-619쪽 참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포그롬은 20세기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서로 맞물린다. 러시아 포그롬은 나치 홀로코소트의 음울한 전주곡이나 다름 없다. 부모가 나치 학살 때 살아남아 1948년 이스라엘에 닿은 폴란드계 유대인의 아들 슐로모 산드(텔아비브대, 역사학)는 △동유럽 백인들은 ‘이디시어를 쓰며 눈에 띄는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유대인 공동체’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동유럽 중심부에서 쫓아내고자 했고, △그런 반유대 감정에 따른 동유럽에서의 거듭된 포그롬이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고 풀이한다. 그의 역작 <만들어진 유대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2009)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1880년대에 집단학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고 서쪽으로의 대량 이주를 서둘렀다. 1880-1914년 사이에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동유럽 유대인 약 250만 명이 독일을 통과해 그들을 받아주는 서구국가로 갔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미국에 발을 디뎠고, 3%가 채 되지 않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이 대규모 인구이동이 낳은 부산물의 하나는, 이동시 통과했던 독일에서 표면 아래 끓고 있던 전통적인 적대감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 그 맹렬한 증오감은 20세기에 와서 가장 참혹했던 집단학살(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사월의책, 2022, 459쪽).
서유럽으로 밀려드는 동유럽 유대인 난민들을 지켜본 언론인들 가운데 유대인 출신의 오스트리아 신문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이 있었다.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빈에 발행되던 한 진보 성향 일간지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우리말로 옮기자면 ‘신자유언론’) 소속으로, 1891년부터 파리 특파원으로 일했다. 19세기 유럽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오니즘 운동은 여러 갈래로 일어났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오니즘 운동’ 하면 헤르츨을 떠올린다.
헤르츨은 유대인 랍비처럼 근엄하기는커녕 매우 세속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시오니즘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유럽 백인사회로의 동화(同化)가 우선이라 여겼다. 그런 헤르츨이 직업적인 시오니즘 운동가로 나서게 된 계기는 두 가지로 꼽힌다. 하나는 지금껏 살펴본 러시아 포그롬, 다른 하나는 독일 간첩으로 내몰린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 육군대위 드레퓌스(Dreyfus) 사건이다.
러시아에서 밀려드는 유대인 난민 물결을 보면서, 또한 에밀 졸라의 논설 ‘나는 고발한다'(J’accuse, 1898년 1월13일)로 더욱 뜨거운 논란이 된 드레퓌스 진실 공방을 취재하면서, 헤르츨은 유대인은 유럽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다음 주에 드레퓌스 사건과 헤르츨의 시오니즘 운동이 지닌 의미와 문제점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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