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20여년 만에 지폐 도안을 바꾸고 새 화폐 유통에 나섰다. 현금 사용이 많은 나라인 만큼 화폐 유통으로 기대되는 경제 효과는 14조원에 달한다. 일본 고령층이 은행에 맡기지 않고 보관 중인 ‘장롱 예금’이 시중에 나올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일본이 새로운 화폐를 내놓자 일각에서는 한국도 화폐 교체를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도안을 바꾼 지 15년이 지나다 보니 위조지폐가 늘어난 만큼, 디자인을 바꾸고 보안 기술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현금 사용량이 줄어들고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아 시기상조라는 반박도 있다.
◇ 日, 새 지폐 유통… 경제효과 1.6조円 이상
13일 NHK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지난 3일 도쿄 치요다구(區) 본점에서 새 지폐 발행 기념식을 열고 도안을 바꾼 1000엔(円)권과 5000엔권, 1만엔권의 유통을 시작했다. 첫날에 유통된 금액은 1조6000억엔. 우리나라 돈으로 약 13조7205억원(11일 원·엔 재정환율 기준, 100엔당 857.53원)에 달하는 규모다.
새 1만엔권에는 일본 메이지 시대 경제 관료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5000엔권에는 일본 여성 교육 선구자 ‘쓰다 우메코(津田梅子)’, 1000엔권엔 일본 근대의학의 기초를 만든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 초상이 들어갔다. 새 지폐에는 위조를 막기 위해 최첨단 홀로그램 기술이 적용돼 지폐 인물의 얼굴이 입체적으로 움직인다.
일본은행이 지폐 도안을 바꾼 것은 권종별로 최소 20년~최대 40년 만이다. 가장 오랜만에 도안이 바뀐 것은 1만엔권이다. 1만엔권에는 1984년부터 메이지유신 시기 계몽운동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들어갔는데, 40년 만에 교체됐다. 1000엔권에 있던 세균학자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와 5000엔권에 있던 일본 여성 근대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는 20년 만에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지폐 교체로 경제 부양 효과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감이 확산하고 있다. 노무라종합연구소에 따르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교체 등에 약 1조6000억엔이 들어갈 전망이다. 지난해 일본 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 591조4820억엔(한화 약 5072조)의 약 0.27%에 해당하는 규모다.
고령층 등 개인이 은행에 맡기지 않고 집에 쌓아둔 현금인 ‘장롱 예금’이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고령층이 구지폐를 갖고 나와 새 지폐로 바꾸면서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일본은 현재 120조엔의 지폐를 발행했지만, 이 가운데 절반인 60조엔가량이 집에 보관돼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韓, 15년째 교체無… “신권 발행해 위폐 줄여야”
한국은 지난 2006~2009년 지폐 도안을 교체하고 5만원권을 신설한 후 15년 넘게 같은 은행권을 사용하고 있다. 신사임당(5만원권, 2006년 발행)을 제외하면 이황(1000원권)과 이이(5000원권), 세종대왕(1만원권) 등 1970년대에 들어간 인물들이 50년 넘게 바뀌지 않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한국도 은행권 교체를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열린 한국은행·한국조폐공사 업무보고에서 박성훈 국민의힘 의원은 “각 국가의 평균 교체주기보다 뒤처져있는 우리나라 화폐도 지금부터 미리 교체를 준비하고 국민적인 합의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은행권 교체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화폐 교체 주기가 길어지면서 위조지폐 제작 사례가 증가하는 점을 이유로 꼽는다. 지난 5월 경북 구미에서 5만원권 위조지폐 6374장(3억1870만원 상당)을 제조해 사회관계서비스망(SNS)에서 판매한 일당이 검거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동안 적발된 위조지폐 사건 가운데 최대 규모였는데, 범죄 수법이 고도화·전문화된 것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지폐 도안에 들어가는 인물을 국민적 정서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우선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100원짜리 동전이 아닌 고액권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또 김구나 유관순 같은 근·현대사 인물을 지폐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금은 500년 전인 15~16세기 조선시대 위인만 지폐에 들어가는데, 이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새 지폐 발행으로 경제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5만원권이 발행됐던 2009년 언론 보도에 따르면 관련 업계에서는 ATM 교체 비용을 4000억원으로 추산한 바 있다. 2009년 정부 예산 217조4612억원의 0.1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또 신권 유통으로 분실이나 도난, 위·변조 사고가 줄어 관련 비용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었다.
◇ 일각선 “현금 없는 사회 가속… 신권 발행 불필요”
다만 신권 발행에 비판적인 시선도 있다. 먼저 현금 없는 사회가 가속화되면서 비용을 들여 지폐 도안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2021년 경제주체별 현금사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지출액에서 현금 사용 비율은 2015년 38.8%에서 2021년 21.6%로 감소했다. 반면 카드 사용 비중은 37.4%에서 58.3%로 증가했다.
최근에는 실물 화폐를 대체하는 디지털 화폐까지 개발되면서 지폐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지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미국, 유럽 등 주요국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인 ‘CBDC’ 개발에 한창이다. CBDC가 자리를 잡으면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현금을 사용하는 인프라도 위축돼 새로운 지폐를 만들 필요성이 더욱 줄어든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2009년 5만원권을 발행할 때는 고액권을 발행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국회 의결까지 거쳐 한은에 신권 발행 요청이 들어왔다”면서 “그러나 최근에는 현금 사용이 줄어드는 추세고, CBDC도 연구하는 단계여서 현재로서는 새은행권 발행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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