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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미국서 ‘한국형 리더십’ 통했다… 박아형 UCLA 공대 학장 “소통이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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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형 UCLA 공대 학장. 탄소 포집 관련 최전선의 기후 변화 전문가다. / 사진=채승우
박아형 UCLA 공대 학장. 탄소 포집 관련 최전선의 기후 변화 전문가다. / 사진=채승우

모든 물질에는 에너지가 고여 있다. 지구가 고열에 시달리지 않도록 수소는 잘 빼내고 탄소는 잘 묻는 것이, 환경공학자들의 고민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의미 있는 시간을 살기 위해 꿈의 불씨는 키우고 스트레스는 잘 묻는 것이 모든 개인의 바람이다.

결국은 에너지 싸움이다. 인생도 경제도.

지치지 않고 오래 이어지는 삶, 지속가능성에 특별한 출구가 있을까. 작년 9월 한국인 여성 최초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 공과대학 학장으로 부임한 화학공학자 박아형은 최적의 에너지 효율을 ‘소통’에서 찾았다.

“혼자 연구하면 작은 질문에만 답할 수 있었다. 질문이 커질수록 더 많은 전문가, 더 다양한 글로벌 기업과 연합할 수 있었다. 도움을 청하고 협력하면 더 나은 해결책이 나왔다”고 그는 말한다.

‘문송(문과라서 죄송)’ 기자가 공대 학장을 만났다. ‘탄소는 죄가 없다. 단지 모여있는 장소가 문제될 뿐’이라며 ‘앞으로 정유 회사는 화석연료 아닌 곳에서 탄소를 빼내 에너지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설명하는 친절한 과학자. 박아형은 탄소 포집, 저장, 활용(CCUS)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영어를 못해서 한국 입시에 낙방했던 그는 캐나다로 떠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밟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화학 생체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구환경공학과의 유일한 여성 교수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16년간 가르치는 동안, 기후 위기와 저탄소 분야 최전선의 연구자로 우뚝 섰다.

─한국인 여성 최초 UCLA 공대 학장으로 취임한 지 7개월 정도가 지났습니다. UCLA 공대는 반도체 부문에 핵심 역량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반색하며)맞습니다. 그래서 한국 방문 전에 세계 최대의 반도체 제조 기업인 대만의 TSMC에 다녀왔어요. 우리 학교에서 TSMC의 자문과 교육을 맡고 있는데, 지금 규모가 계속 커져서 매년 1만 명씩 뽑아야 한답니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요.”

1만 명 고용이라니, 놀라운 숫자였다.

“올 1월에 UCLA는 엄청난 규모의 쇼핑몰을 사서 리서치 센터로 만들었어요” / 사진=채승우

“한국에도 반도체학과가 있지만 규모가 작다고 들었어요. 인공지능은 AI 칩이 필요하고 반도체 수요는 더 늘어만 갈 겁니다. TSMC는 삼성전자, 인텔과 반도체 주도권 경쟁을 벌이며 치고 나가고 있어요.”

─AI 반도체와 저탄소 공법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기술 산업인데, UCLA 공대가 그 두 분야에서 치고 나가는군요.

“올 1월에 UCLA는 엄청난 규모의 쇼핑몰을 사서 리서치 센터로 만들었어요. 정부 자금도 많이 유치했습니다. 공학자에게는 연구가 산업이 되고 그 산업이 학생들의 직장이 되죠. 그걸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과학 연구 예산이 삭감되고 이공계가 의대에 밀려 위축되는 한국과는 정말 분위기가 다른 듯했다.

─전공이 화학공학이지요? 미국 공대에서 화학공학은 어떤 포지션입니까?

“공대는 물리학과 수학이 기본입니다. 기계공학이나 로봇산업도 다 물리학, 수학이 기본이죠. 화학공학은 달라요. 물리학, 수학에 화학이 결합해 있죠. 그래서 화학이 거점이 되면 공대 안에 환경공학이나 생명공학도 자리 잡을 수 있어요”

과거엔 화학공학을 전공 하면 바로 정유회사로 가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환경 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고 했다. UCLA 공대 학장으로 오기 전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16년 동안 공대 교수로 있었다.

─컬럼비아대학교와 UCLA는 기반이 많이 다르죠?

“달라요. 컬럼비아 대학은 뉴욕에 있는 아이비리그 사립학교예요. 유엔 가까이 있어서 생각의 스케일 자체가 큽니다. 기후 변화, 저탄소 문제도 공대 혼자 고민하지 않고 처음부터 상대, 정경대 등이 함께 공동 연구해요. 전 세계를 기준으로 기술을 사고하죠.

그래서 작년 1월에 UCLA 공대 학장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을 좀 했어요. 사립에서 공립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너무 큰 변화니까. 규모 차이도 커요. 컬럼비아는 공대 교수가 250명인데 UCLA 공대는 195명이에요. 대신 학생 수가 많아요. 학부생만 4000명, 대학원생도 2500명 정도죠. 교수 숫자를 더 늘리면 얼마나 더 재미난 일이 벌어질까, 거기서 제가 꿀 수 있는 꿈들이 보였어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풍경.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풍경.

─저탄소 분야에서의 꿈인가요?

“네. 처음엔 사소한 궁금증에서 시작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사회에 어떤 의미지? 지구에 어떤 의미지?’ 질문이 커져요. 그런 큰 질문은 혼자 해결을 못 해요. 다른 학자에게 손 내밀면서 계속 연합해야 해요. 200명 넘는 교수들과 앞으로 얼마나 큰 꿈을 꾸고, 큰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요.”

꿈을 품은 공학자의 얼굴은 정치가나 사회혁신가와는 또 다른 맑은 기운을 뿜어냈다.

─한국과도 공동 연구를 했지요? 음식물 쓰레기로 건축 자재를 만든다면서요?

“그 연구는 저희 엄마 때문에 시작했어요. 어느 날 엄마가 그러세요. 한국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걸로 부부가 맨날 부부싸움을 한다고. “저 집 남편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데, 이 집 남편은 나 몰라라 해서 아파트에서 부부싸움이 나. 네가 여러 가족 살리는 셈 치고 음식물 쓰레기 좀 어떻게 해봐라.”

그 고민을 제가 10년을 했어요. 음식물 찌꺼기로 뭘 할 수 있을까? 찌꺼기로 수소를 만들 수는 있지만, 공장에 보내서 고온 고압으로 처리하는 건 소용 없어요. 문제는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내려가는 걸 싫어하는 거잖아요. 그럼 전자레인지처럼 집에 두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걸 만들어야죠. 가정용으로 안전해지려면 압력도 온도도 낮아야 해요. 한쪽에선 수소가 나오고 부산물은 건축 자재용 머티리얼로 나와야죠.”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한 기술을 개발했죠. 그런데 아직 상용화를 못 했어요. 기술을 만든 건 화학공학이지만 전자레인지 같은 도구를 만드는 건 또 기계공학 분야예요. 그런 공정은 기업에서 더 잘하니까 앞으로 잘 이어가겠죠.”

나아가 그는 해조류, 미역으로 바이오 에너지를 만드는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 멕시코처럼 땅이 넓은 나라는 옥수수로 에탄올을 만들어 쓸 수 있지만, 땅이 좁은 한국은 불가하기에 땅 대신 바다로 눈을 돌렸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은 바이오 에너지 자원을 해조류에서 찾을 수 있다.
삼면이 바다인 한국은 바이오 에너지 자원을 해조류에서 찾을 수 있다.

─버려진 미역에서 수소를 뽑아내다니, 그 또한 생활적인 발상입니다!

“수소가 좋아요. 수소는 탄소가 없는 에너지 캐리어에요. 수소와 암모니아는 탄소가 없는 에너지 그릇입니다. 우리는 콩이나 옥수수나 혹은 나무토막이 바이오에너지가 되는 건 그 안에 탄소, 수소, 산소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물질에는 탄소, 수소, 산소가 있고, 거기에 에너지도 고여 있죠.

나무를 태우면 따뜻해지는 건 그 안에 에너지가 있다는 증거예요. 해조류도 나무랑 똑같아요. 버려진 미역 안에서 수소만 뽑아서 에너지로 몰아주고, 탄소는 따로 끄집어내서 저장한 후 건축자재 같은 걸 만드는 거죠.”

─탄소 얘기를 해보지요. 최근에 저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쓴 엘리자베스 콜버트 인터뷰를 하면서 공기 중 탄소를 포집해서 지하의 암석에 묻는 아이슬란드 기업 클라임웍스를 알게 됐어요. 이미 루프트한자, 레고 등 많은 기업과 계약해서 가입자의 몫만큼 탄소를 제거해 주면서 기후 산업의 최전선에 섰더군요.

“맞아요. 그런데 그게 비용과 스케일 면에서 한국에 적용하기는 어려워요.”

─어떤 면에서 어렵죠?

“일단 기술은 충분합니다.”

─기술이 충분하다면 한국이 반도체를 치고 나가서 주도권을 잡았던 것처럼 수소 경제, 저탄소 공법 기술 분야에서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말씀하셨듯이 암석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탄소저장소예요. 지구는 수백수천 년에 걸쳐 CO2를 돌로 만들어요. 우리는 이 공정을 단기간에 하려는 거고요. 문제는 우리나라에는 탄소 없는 돌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한국에 많이 있는 석회암은 이미 탄소를 머금은 돌이에요.

그러니까 한국은 탄소 포집 기술이 있어도 저장 공간이 없다는 거죠. 우리가 CO2를 땅에 묻으려면 구멍을 뚫어야 하고 광산 개발을 해야 돼요. 광물을 채집해서 반응을 봐야 하는데, 한국은 그럴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SK이노베이션의 그룹 리더가 제게 질문을 하더라고요. ‘교수님, 우리 회사는 글로벌 회사입니다. 범위가 달라지면 대답이 달라질까요?’”

암석은 지구상에 가장 큰 탄소저장소다.
암석은 지구상에 가장 큰 탄소저장소다.

─달라지나요?

“달라집니다. 탄소를 한국에 못 묻으면 미국이나 중국에 묻을 수도 있어요. 물론 협상을 해야겠죠. 한국은 자원이 없는 나라라서 어차피 수입해서 공정을 팔고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에너지를 수입할 때 애초에 탄소 없는 연료를 수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천연가스는 탄소가 많은 에너지원이에요. 그런데 천연가스를 수소로 전환하고 수소를 암모니아로 전환한 상태로 수입하면? 암모니아는 탄소가 안 나와요. 탄소는 미국에 두고 에너지만 수입하는 거죠. 한전에서 지금 그 고민을 하고 있어요.”

─탄소를 미국에 버려두고 온다? 그런 상상도 할 수 있군요.

“그렇죠. 우리가 수입하고 싶은 게 에너지라면, 굳이 탄소 있는 에너지를 수입할 필요가 없는 거죠. 우리는 탄소는 말고 에너지만 달라고. 상상력을 펼치면 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탈탄소는 가능한 얘기인가요?

“저는 탈탄소(decarbonization) 보다는 탈화석연료(defossillization)라는 말을 써요. 탄소를 안 쓰고 세상이 돌아갈 수는 없어요. 탄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있고 여기 쿠키에도 들어 있죠. 다만 탈탄소는 쿠키를 만드는 공정에서 화석연료가 아닌 곳에서 탄소를 가져오겠다는 얘깁니다.

대표적으로 식물은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먹고 태양열을 받아 자라잖아요. 우리도 공기 중에 탄소나 생물체에 있는 탄소를 가져다가 쓰면 그게 탈탄소, 탈화석연료가 되는 거죠.”

─지금 탄소가 필요하다는 얘긴데요. 그런데 탄소 때문에 기후 변화가 심각해지는 것 아닌가요?

“맞아요. 이산화탄소가 공기 중에 많아서 위험한 거죠. 문제는 탄소 그 자체가 아니에요. 탄소가 있는 장소죠. 탄소가 이 카펫에 많은 건 문제가 안 돼요. 공기 중에 있으니까 문제죠.”

미국에서는 공기 중 탄소를 포집하면 톤당 185달러에 달하는 세금 크레딧을 준다.
미국에서는 공기 중 탄소를 포집하면 톤당 185달러에 달하는 세금 크레딧을 준다.

─그럼, 공기 중의 탄소를 포집해서 쓰면 되지 않나요?

“맞습니다. 그런데 농도가 문제예요.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410ppm인데, 그 농도는 기후 변화에는 큰 양이지만, 포집하기엔 너무 적은 양이예요. 공기의 볼륨이 너무 크니까요. 가령 물고기 1만 마리 사는 한강과 두 마리 사는 샛강이 있다면 어디에 그물을 던질까요? 1만 마리 있는데 던지잖아요. 그거랑 같아요. 이산화탄소 포집은 그래서 공장 지대에서 해야 의미가 있어요.

보통 공기 중에서 탄소를 포집하는 건 주로 식물이 해요.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먹고 햇빛을 받아서 몸을 키우잖아요. 그리고 탄소 포집은 공기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미래의 정유 회사는 이런 고민을 해요. 화석연료가 아닌 다른 물질에서 탄소를 꺼내서 에너지를 만들어야겠다… 풍력이나 태양열을 사용해서 이산화탄소를 어떤 형태의 연료로 만들 수 있을까.”

─평소 나무가 하는 일을 우리가 화학적으로 하게 될 거라는 거죠?

“그렇죠. 아까 말했듯이 이산화탄소는 에너지가 별로 없어요. 에너지가 많은 건 수소예요. 만약 에너지가 있을까 없을까 궁금하면, 그 물질을 태웠을 때 열이 날까를 상상하면 돼요. 나무를 태우면 열이 나니까 나무는 에너지가 있는 거죠. 수소는 태우면 물이 되면서 열을 내요. 그 에너지 원리로 수소 자동차가 가능한 거고요.”

─항상 그 안에 보유한 에너지의 총량을 보는군요. 당신 안에는 어떤 물질이 에너지가 되고 있나요?

“글쎄요. 제 에너지 원료는 꿈인 것 같아요. 가령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저는 걸으면서 상상하고 꿈을 꿨어요. 박사 학위 받을 때가 가장 어려웠는데 그 힘겨운 마라톤을 뛸 때도 그랬어요. 연구에 실패할 때마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 저렇게 되지 않을까…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약간 그런 성향이 있으셨어요. 남동생 둘까지 가족이 다섯이었는데,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에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나 길을 잃어도 늘 여유가 있으셨어요. ‘신기한 데 왔네, 어차피 휴가 온 거니까, 여기서 더 신나게 놀자!’ 계획과 달라져도 당황하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했달까요.”

타고난 머리보다 유연성과 상상력이 성장의 연료가 된다.
타고난 머리보다 유연성과 상상력이 성장의 연료가 된다.

자식이 에너지를 잘 쓰고 살려면 초기에 부모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부모의 용기라니요?

“부모님께서 저를 잘 관찰한 후에 떠나보내셨어요.”

한국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 오직 대학 입시에 맞춰져 있던 시간을 그는 끔찍하게 기억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4당5락이라고, 4시간 자면 떨어지고 5시간 자면 붙는다고 했잖아요. 잠도 못 자고 멍하니 고2 고3을 보내고 입시에 떨어졌어요. 저는 화학을 좋아해서 화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영어, 불어, 한자를 너무 못했어요.

영어를 못하니 좋은 대학 가기는 글렀고, 이참에 한국을 떠나서 더 넓은 세상을 보라고 하셨어요. ‘부모로서 자식에게 한번은 기회를 주고 싶다’고.”

미국보다 좀 덜 무섭고 싸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캐나다로 떠난 때가 1992년. 유학원의 도움을 받아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 정착했다. 영어를 못해서 유학을 갔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못하던 영어가 1년 만에 트였다는 것은 더 큰 반전이었다. 대체 그의 뇌에 어떤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걸까?

─영어 못하던 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거죠?

“캐나다에서는 저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저로 봐줬어요. 그곳에서는 저를 꾸밀 필요가 없었고, 정직해질 수 있었어요. 잘해야지, 잘 보여야지, 창피하다… 이런 마음 없이 부딪혔어요. 아기처럼 영어를 배우다 보니까, 확확 늘었어요. 6개월 만에 듣는 게 되고, 1년 되니까 지금 정도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자전거 배우기와 같다고 했다.

“가령 자전거를 매일 5분씩 타면 평생 못 배울 수도 있어요. 매일 리셋이 되니까요. 그런데 일주일을 내리 넘어져도 계속 타면 ‘이거 뭐지?’하고 확 늘거든요. 언어도 그런 것 같아요. 영어를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어요. 완벽해지려는 고민보다, 내가 왜 영어를 배우고 싶은지를 고민했어요.

결국 소통을 하고 싶은 거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걸 저 친구한테 알려주고, 교수님께 얘기하고 싶은 거잖아요. 그래서 계속 시도를 했어요. 이렇게 하면 알아듣나, 저렇게 하면 알아듣나. 그러다 보니 눈뜨게 된 건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문화였어요. 발음이 아무리 완벽하고 문법이 정확해도 문화를 모르면 소용이 없었어요. 그렇게 문화가 궁금해서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 소통도 빨리할 수 있게 됐어요.”

“기다리지 말고 원하는 걸 먼저 얘기하세요” / 사진=채승우

─상대를 궁금해하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로군요.

“그렇죠. 영어를 잘해야 인정을 받고 좋은 직장도 얻는다…? 이 마음이 앞서면 오히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요. 언어를 공부로만 접근하면 꼬이는 거죠. 생각해 보면 사회 나와도 공부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힘든 상황에서 추스르고 일어나는 힘… 생활력의 중요성을 저는 부모님께 배웠어요.

‘저 사람은 사막에서도 살아남을 거야’라는 말이 얼마나 힘이 세요. 난관에 부닥쳤을 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죠.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하고, 주변 사람과 협력해서 풀어가고. 그게 전부 같아요.”

─아시아 여성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마주한 편견에는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컬럼비아 대학에서 16년 동안 혼자 학과의 여교수였다고 들었어요.

“늘 조심하고 고민했어요. 눈에 잘 띄니까 좋은 점도 있지만,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쉽게 낙인이 찍히기도 해요. 합니다. 성공을 해도 ‘네가 여자니까 더 주목받은 거 아니냐’는 시선에 변명해야 했고요.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은 미묘하게 굳건합니다. 가령 행정 직원도 남자 교수가 내린 지시는 바로 실행하지만, 여자 교수가 다가가면 개인적인 하소연을 한참 쏟아낸 후에야, 일 얘기를 합니다. 심지어 그 지시를 가장 나중에 처리하죠. 그래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학회에서 일을 배당할 때도 여자 교수에겐 교육 파트를 남자 교수에겐 기술 파트를 맡겨요. 나중에 제가 웃으며 건의했어요. ‘나는 아이가 없어서 교육 파트는 관심이 없고, 저쪽 기술 파트에 남자 교수님은 아이가 셋이라 교육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바꿔주면 어떻겠느냐?’

처음엔 노교수들이 깜짝 놀라더니, 제가 워낙 해맑게 합당한 말을 하니까, 들어주더라고요(웃음). 결과도 좋았고요. 그래서 저는 여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요. 기다리지 말고 원하는 걸 미리 얘기하라고.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미리 얘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적극적인 사람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공학자의 꿈꾸는 눈. / 사진=채승우
공학자의 꿈꾸는 눈. / 사진=채승우

─언제 큰 위기를 느꼈습니까?

“IMF 시절이요. 유학 시절 내내 돈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때는 정말 답이 없었어요. 부모님 경제 사정은 나빠졌는데 환율 때문에 등록금은 세 배를 내야 했어요. 은행에도 물어보고 아는 사람에게 다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라가 흔들리던 시절이라 도움 받기 힘들었어요.

예정된 대학원도 못 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강의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교수님 한 분이 불쑥 들어왔어요. ‘어두컴컴한 데서 혼자 뭐하니? 그러고 보니, 너 한국 애지? 요즘 괜찮니?’ 사정을 다 듣더니 그분이 자기 이름으로 대출받아서 학비를 대주셨어요. 그 교수님 덕에 학교를 다녔어요. 나중에 환율 내려가고 갚았습니다.”

불운을 상쇄할 행운은 그렇게 사람에게서 왔다고 했다.

─또 잊지 못할 은인은 누구였나요?

“저는 늘 멘토가 많았어요. 누구 한 명 특정할 수가 없어요. 가령 제가 이만큼 연구하고 있으면, 누군가 와서 ‘넌 이만큼 할 수 있어’라고 제안해주셨어요. 너무 높이도 아니고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렇게 때마다 나타난 여러 멘토들이 약간 불편하더라도 새로운 도전과제를 내준 덕에 여기까지 온 셈이죠. 절대 혼자 올 수 없어요.”

─돕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군요!

“어찌 보면 교수님들이 제 멘토가 되는 걸 즐겨 하셨던 것 같아요. 그 단서가 제 질문이었어요. ‘넌 학부 때도 박사 때도 질문이 달랐어’라는 말을 종종 들어요.

‘교수님, 어떻게 하면 제가 A를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이거저거 공부해라’ 하면 끝이에요. 그런데 ‘교수님, 기후 위기에 대해 우리 세대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화학 말고 다른 학문으로도 가능할까요?’ 이렇게 물으면 교수가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해요.

끝을 열어둔 질문이잖아요. 찾아온 학생을 관찰하고, 그 아이의 미래 커리어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좋은 기회나 전문가가 나오면 연결해 주죠. ‘이런 워크숍 있는 데 관심 있니??’ 물어도 보고.

끝을 열어둔 질문이 중요하다.
끝을 열어둔 질문이 중요하다.

저는 늘 물었던 것 같아요. ‘교수님은 이 연구 왜 하셨어요? 뭐가 힘드셨어요?’ 자꾸 궁금해하니까 제가 박사 끝나고 교수 지원한다고 할 때 추천사 써주시겠다는 분들만 일곱이었어요(웃음).”

끝을 열어둔 순수한 질문이 쌓여 선택의 순간마다 도움을 주는 강력한 멘토 집단이 만들어졌다. 요즘도 고민되는 일은 3명의 멘토에게 동시 이메일을 보내 의견을 듣는다고 했다.

─다들 왜 그렇게 진심으로 도와주는 걸까요?

“그런 멘토들이 하루아침에 생기진 않아요. 저는 그들에게 저의 모든 걸 보여줬어요. 좋은 점, 부족한 점, 힘든 점,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멘토는 완벽한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내 도움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죠. 경험 많은 어른 눈에는 잔꾀 쓰는 게 다 보인다잖아요. 숨기지 않고 전체를 드러내는 사람, 진심으로 소통하려는 사람은 눈에 띄게 돼 있어요.

반면 너무 똑똑한 아이들은 잘해야 한다는 프레셔에 갇혀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질문을 꺼내지 못해요. 안타깝죠. 모든 연결이 그렇듯 전체를 보여주지 않으면 전체를 조망해 줄 수 없어요.”

─기후 위기가 심각한 요즘에는 어떤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그게 지금 세대를 괴롭혀서 하는 거라면 맞는 길일까?”

─답을 찾았나요?

“계속 고민 중이에요. 지금 기후 변화는 심각합니다. 캘리포니아는 산불, 가뭄, 홍수가 이미 위험도를 넘어섰어요. 앞으로 키울 수 있는 작물도 달라질 테고, 강수량도 달라질 거예요. 탄소 절감과 동시에 달라진 환경에도 적응해야 합니다. 바닷가엔 더 높이 둑을 쌓고 극지의 해빙으로 유입될지 모르는 신종 바이러스 전염병에도 대처해야죠.

재생 에너지는 좋지만, 지속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면 모든 게 더 비싸져요. 환경은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돈을 써서 안전을 기하는 일이니까요.”

재생 에너지는 좋지만, 지속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면 모든 게 더 비싸진다.
재생 에너지는 좋지만, 지속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면 모든 게 더 비싸진다.

─결국은 돈 문제지요. 누가 그 비용을 감당하느냐?

“맞아요. 에너지는 생존과 밀접해요. 가난할수록 열사병에 걸리고 추위로 동사할 수도 있어요. 부자들은 절전 설비로 에너지 효율에 쉽게 대처할 수 있지만, 미국도 빈민촌 아파트는 설계가 옛날식이라 에너지 효율이 너무 낮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탄소 절감은 기술과 정부 정책과 시장이 동시에 발맞춰 가야 합니다.

누군가는 탄소 가격에 100원을 낼 수도 있고 누군가는 1만 원이나 100만 원을 낼 수도 있어요. 미국, 한국, 대만, 아프리카가 내는 탄소 가격이 다 같을 수는 없어요. 그 사회의 생산력을 고려해야 하는데, 신자유주의식 공정 잣대를 들이대면 어려워져요. 논의를 통해서 적정 가격 합의를 끌어내야 합니다.”

탄소 이야기를 할 때도 인생 이야기를 할 때도 핵심은 경청과 소통이었다. 그는 학내 소수 인종, 전 세계 연구자들, 다국적 기업, 미국내 정책 관료들과의 협업에 활짝 열려있다고 했다.

─어디에 에너지를 쓸 때 가장 행복한가요?

“(미소 지으며)세상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죠. 부모님은 제가 의사가 되길 바라셨어요. 고소득의 안정된 직업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서요. 지금은 제가 기후 변화 연구하는 걸 너무 좋아하세요. 진짜 세상을 살리는 일이라고. 다만 저를 만병통치약으로 아셔서, 막 던지세요. 이런 거 네가 좀 해결해 봐라, 저것도 고민해 봐라…(웃음).”

UCLA가 다양성과 포용성을 기준으로 박아형을 학장으로 초빙한 것은 영리한 결정이었다. / 사진=채승우
UCLA가 다양성과 포용성을 기준으로 박아형을 학장으로 초빙한 것은 영리한 결정이었다. / 사진=채승우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리더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제가 주류 사회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보니, 가장 좋은 에너지는 칭찬과 연결이었어요. 권위자의 칭찬과 격려로 기회에 눈뜨는 아이들이 정말 많아요. 서로서로 멘토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학회에 가서 제가 하는 일은, 소극적으로 모여 있는 한국 교수님들 손 잡고 가서 외국인 교수에게 소개하는 일이에요.

이 연구는 이 사람이 잘합니다, 컬래버레이션 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올 겁니다… 연결해 주고 기회를 만들어주는 거죠.

리더들이 나서서 격려하고 소통하세요. 한국은 자원이 부족한 나라지만, 글로벌 정체성을 활용할수록 기회는 더 많아집니다. 리튬 추출하는 포스코처럼 글로벌 자원을 가져다 재수출해도 되고, 협상을 통해 탄소 없는 연료도 수입할 수 있어요. 정해진 건 없어요. 크게 질문하고 한계없이 상상하길 바랍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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