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뒤 포로교환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1953년 9월6일 북한과 중국은 마지막으로 남은 미군 전쟁포로를 풀어주었다. 그날 아침 베이징 라디오에서는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폈다고 자백을 했던 미군 장교 25명의 이름을 밝혔다.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넘은 첫 번 째 지프차에는 프랭크 슈와블 대령(미 제1해병 항공비행단장)과 앤드류 에반스 대령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어색하게 웃는 사진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풀려난 포로들, “강요·협박으로 거짓 진술서 썼다”
이 두 대령이 왜 카메라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띠었을까. 긴장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들이 각오하고 있던 것은 엄한 심문이었다. “세균전이 있었다”고 밝힌 이력 탓에 자칫 ‘반역죄’로 기소될 수도 있고, 불명예 제대 조치가 내려질 것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훗날 ‘밤마다 장래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 했다’고 털어놓았다.
모든 포로 송환자들은 ‘입원환자’로 분류돼 철저한 통제가 이뤄졌다. 미 국방부 특수작전실과 미 공군 감찰관 산하 특수조사실(OSI)에서 조사관은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질문 목록표에 따라 조사관이 만족할 때까지 답변을 쓰고 또 써야 했다. 조사관들이 “당신이 포로로 있을 때 했던 진술을 뒤집으라”고 윽박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균전은 없었다’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 어긋나는 자술서를 포로로 있을 때 써냈던 만큼, 송환자들이 느꼈을 심리적 압박감이 어떠했을까는 짐작이 갈 만하다. 삼엄했던 그 무렵의 분위기를 보자.
[(송환 포로들은) 진술서를 쓰기 시작했고 ‘이 진술서 전체 또는 일부 내용이 군법회의 재판에서 나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인정했다. 진술서를 작성한 뒤 그들은 군법 31조에 따라 약식재판소 관리들과 법무관실 대령, 또는 공군 특별조사실 상급장교들이나 요원들 앞에서 작성내용이 진실임을 선서했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조차도 이처럼 잘 조직된 공공연한 압력 아래서 행해진 철회가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받을지 우려를 나타냈다](스티븐 엔디콧, 에드워드 해거먼,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중심, 2003, 283-284쪽).
미군 포로가 모두 풀려난 6주 뒤인 1952년 10월, 뉴욕 유엔본부에 미국 대표 헨리 로지 2세가 송환포로들이 작성한 진술서 10개를 들고 나타났다.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을 했다”는 에반스 대령이 진술서도 들어있었다. 슈와블 대령은 진술서에서 세균전 범죄사실을 털어놓으라는 ‘협박’과 정신적 학대, 그리고 신체적 권리 박탈을 겪었다고 했다. 독방에 갇혀 ‘터무니없는 자술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는 주장이었다. ‘전쟁범죄’ 사실을 털어놓으면 관대한 처분을 받을 것이란 얘길 들었다고도 했다(중국 저우언라이 총리는 1952년 3월8일 ‘세균무기를 사용한 미 공군 요원은 생포될 경우 전쟁범죄자로 다뤄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미 합참이 한반도 세균전의 지휘부였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실제로 세균전을 폈는가는 전쟁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껏 논란으로 남아 있다. 연구자들도 둘로 나뉘어져 세균전 ‘설’을 다투어 왔다. 세균전이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연구자는 스티븐 엔디콧과 에드워드 해거먼이다. 둘 다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 교수로 동아시아역사학 전공자들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파헤친 끝에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원서 제목은 The United States and the Biological Warfare, 1998)이란 역작을 냈다.
엔디콧과 해거먼, 이 두 연구자는 (지난 글에서 살펴본) ‘국제과학위원단'(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ISC)의 보고서가 고발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이 대부분 사실이라 못 박았다. 높은 학문적 명성을 지닌 영국인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케임브리지대 교수)이 중심이 돼 만든 670쪽 분량의 두툼한 보고서(이른바 ‘니덤 보고서’)가 가리키는 손길은 미국의 세균전 전쟁범죄 쪽이라는 얘기다.
일반적인 연구자의 시선으로 엔디콧과 해거먼을 바라보면, 그들은 매우 성실한 사람들로 비쳐질 것이다. ‘니덤 보고서’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 미국의 여러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들을 뒤졌다. 그렇게 얻어낸 여러 정황 증거들에 바탕, 미국의 세균전 ‘설’이 단순히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라 주장했다. 두 연구자가 찾아낸 미 합동참모본부의 극비문서(1993년에 기밀 해제된 문서)는 워싱턴의 합참이 한반도 세균전의 지휘부였음을 말해준다.
[1951년 2월 미 합동참모본부는 ‘전술적 사용을 위한 병원체가 정말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병원체 개발을 우선순위에 두라고 (데트릭기지에) 요청했다](Joint Chiefs of Staff, 1837/50, RG 218. 엔디콧·해거먼,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중심, 2003, 283-284쪽에서 재인용).
[1952년 2월25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지체 없는, 강력하고 공격적인 생물학전 능력’과 ‘이전의 사용 유무에 관계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모든 효과적인 수단의 개발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합참은 이를 하나의 명령으로 시행하기 위해 참모들에게 ‘각 군에 내리는 지령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그 뒤 한국전 기간 동안의 생물학전에 대한 실무정책이었다](Joint Chiefs of Staff, ‘Decisions on JCS 1836/29’ 1952년 2월26일, 307쪽. 엔디콧·해거먼, 282-283쪽에서 재인용).
미 화학부대, 6.25전쟁 터지자말자 한반도行
한국전쟁 당시 미 데트릭기지의 생화학전 무기 개발의 책임자는 에그버트 블린 육군소장(미 육군 화학부대장)이었다. 1952년 그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시립대학인 헌터 칼리지에서 이례적으로 많은 청중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그 자리에서 블린 소장은 한국전쟁에서 자신의 부대가 하는 역할을 소개하면서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2주도 안 돼 미 화학부대가 한반도에 상륙했고 그 뒤 꾸준히 부대 전력이 강화됐다”고 밝혔다.
블린 소장은 자신의 부대가 갖고 있던 독가스 화학무기(겨자가스, 포스겐가스, 사린가스 등)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도 몇 가지 과감한(?) 발언으로 청중들을 놀라게 했다. “독가스전에 대한 현재의 무관심이 빠른 속도로 극복돼야 한다”고 했다. “일부 소수의 과장된 두려움을 날려버리고, 독극물을 사용하는 전쟁에 대한 무지를 없애기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도 했다(엔디콧·해거먼, 104쪽).
블린 소장의 직속 부하로 데트릭기지에서 생물학전(세균전) 프로그램을 총괄하던 인물은 윌리엄 크리시 준장이었다. 그는 1951년 12월 데트릭기지에서 멀지 않은 메릴랜드대학에서 강연을 가졌다. 그는 강연에서 생물학전의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막연한 공포에 휩싸여 있거나 다른 나라(소련)보다 생문학전 지식과 준비 작업에 앞서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엔디콧·해거먼, 104쪽).
크리시 준장이 말하는 ‘준비 작업’이란 세균무기 개발과 보유를 뜻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미 <성조지>(Stars and Stripes) 1952년 1월25일자는 크리시 준장이 메릴랜드대학에서 했던 강연을 보도하면서 “경제를 파괴시키지 않고 적의 저항을 약화시키면서 아군의 희생을 점에서 세균전의 이점들을 변호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미국의 생화학전 지휘부가 잇달아 대학에서 강연을 가졌던 데엔 나름 까닭이 있었다. 대학생들에게 데트릭기지를 소개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것을 권유하기 위한, 일종의 취업설명회 자리였다. 다시 말해서, 젊은이들에게 생화학전 물질과 장비를 개발 제조 조달 공급하는 일을 평생직업으로 삼아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자리에서 죽음이나 전쟁 같은 어둡고 무거운 말을 껴내진 않았을 것 같다.
한국전쟁 전부터 세균전 준비
한국전쟁이 터지기 1년 전(1949년) 미 국방부에 임시기구로 스티븐슨위원회가 조직됐다. 이 위원회는 화학전, 생물학전(세균전), 방사능전 등 비재래식 살상무기 전반을 검토하는 특별위원회였다. 1950년 2월 이 위원회에 출석한 크리시 준장은 “비상시에 3개월만 주어지만 데트릭기지의 연구원들이 세균전 공격능력을 내놓을 수 있다”고 증언했다.
한국전쟁 무렵 크리시 준장의 지휘 아래 데트릭기지의 세균학박사급 연구자들이 만든 가장 성공적인 세균무기는 500파운드 짜리 M16-A1 전단폭탄(propaganda leaflet bomb)으로 알려진다. 이 폭탄은 내부에 칸막이가 쳐있고, 각 칸막이에는 E73RA라 이름 붙여진 세균깃털 폭탄이 들어있었다. 깃털은 바람에 쉽게 날리기에 무차별적으로 뿌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캐나다의 두 연구자가 쓴 글을 보자.
[미 공군은 1950년까지 M16-A1 전단 집속폭탄 7만 개를 무기 격납고에 채웠다. 비밀·무력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데트릭기지에서 만든 특수작전부대가 작물용 세균을 살포하기 위해 처음 깃털폭탄을 개발했다. 깃털을 적의 병참 시스템, 즉 보급과 장비를 전술적으로 오염시킬 수 있는 운반수단으로 고려했음을 보여준다] (엔디콧·해거먼, 116쪽)
엔디콧과 해거먼에 따르면, 미군 폭격기들은 M16-A1를 비롯한 집속폭탄을 떨어트릴 때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공습하던 영·미 연합군 폭격기들이 썼던 채프 디스펜서(chaff dispenser)를 이용했다. 채프 디스펜서는 상공을 날면서 적의 탐지기 레이더를 교란함으로써 대공포 사격을 피할 요량으로 비행기에서 흩뿌려대는 금속 조각이다. 두 연구자는 채프 디스펜서와 함께 세균에 오염된 볏짚이나 나뭇잎을 살포하거나, 선전용 전단지를 담은 집속폭탄 안에다 세균 곤충들을 넣어 떨어뜨렸다고 주장했다.
엔디콧과 해거먼은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 있던 406의무부대에도 의심의 눈길을 던진다. 1946년 요코하마에서 출범한 이 부대의 원래 목적은 일본과 한국에 주둔한 미군에 대한 통상적인 의료서비스 제공이었다. 하지만 두 연구자에 따르면, 1949년과 한국전쟁 내내 406부대는 매달마다 흰쥐 2만 마리를 비롯해 기니피그, 개구리 등 많은 소형동물을 들여왔다. 생물학무기 실험과 제조를 위해서 쓸 실험용이었다. 1951년 406부대 지휘관 리처드 메이슨 대령(군의관)은 소속 부대원들에게 화학·세균·방사능전 과정을 공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엔디콧·해거먼, 219-221쪽 참조).
‘결정적 증거’ 없는 까닭
미국이 세균전을 폈을 것이란 정황 증거는 넘치지만, 빼도 박도 못하는 ‘결정적 증거’가 있느냐다. 두 연구자는 “한국전쟁 때 미국이 생물학무기를 실험했다는 확실하고 확인 가능한 직접적인 증거는 현재 남아 있는 형태의 미국 문서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 여러 정황증거와 관련 문서 발굴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폈음을 보여주는 심증만 있을 뿐 ‘결정적 증거’를 내놓기 어렵다는 것이다.
엔디콧과 해거먼은 그 이유로 네 가지를 꼽았다. △당시 생물학전(세균전)에 관련된 많은 미국 문서들이 파기됐거나 분실됐으며, △파기되지 않은 문서들은 아직 비밀로 묶여있고, △기밀이 해제된 문서라도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에 일부 내용이 수정됐고 △미국 정부와 군부 차원에서의 조직적 은폐 탓으로 본다. 두 연구자는 특히 미 극동사령부와 미국 정부 사이의 조직적 은폐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비밀로 취급되고 있다. 이런 은폐의 가장 적나라한 보기는 한국전쟁 뒤 생물학전에 관한 그들의 기록과 문서들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미 극동사령부의 두 번에 걸친 요청일 것이다. 우리는 화학부대(데트릭기지)의 기록들이 1969년 미 국립문서보관소로 최종 넘겨지지 전에, 1952년 극동사령부와 생물학전을 담당한 미국 내 정부조직 사이에 주고받은 최소 19개의 비밀급 통신기록이 누락된 사실을 확인했다](엔디콧·해거먼, 283쪽).
따라서 엔디콧과 해거먼, 이 두 연구자가 내린 결론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생물학무기를 실험했다는 확실하고 확인 가능한 직접적인 증거를 담은 문서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잘 개발된 생물학전(세균전) 비밀 프로그램이 존재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강정구, “민족사에서 가장 반인륜적 범죄”
한국에서 미국의 세균전 의혹을 강하게 내세운 연구자 한 사람을 꼽는다면 강정구(동국대 명예교수, 사회학)다. 그는 앞에서 살펴본 캐나다의 두 연구자(엔디콧·해거먼)와 기본적으로 같은 시각을 지녔다. 국제과학위원단(ISC)의 활동과 보고서(니덤 보고서)를 높이 평가하면서 한국전쟁 중에 미국이 세균전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믿는다.
[(미국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1950년 말 미국이 중국군의 참전으로 수세에 직면하였을 때 북한인민군과 중국군에 사용할 목적으로 미국은 엄청난 수량의 신경가스를 개발하였다. 가스탄인 화학전을 구사할 것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면, 세균전이라 해서 미국이 수행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년, 266쪽).
강정구 교수는 ‘집중추적: 미국의 한국전쟁 세균전 의혹’이란 제목으로 월간 <말>지(1992년 8월호)에 쓴 글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반인륜적이고 비인도적인 세균전 범죄가 미국에 의해 자행되었고, 우리의 민족 구성원(북한)이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엔디콧·해거먼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여러 ‘논리적인 정황 근거’를 제시하면서도 ‘결정적 증거’를 내놓질 못했다. 그 까닭을 이렇게 풀이한다.
[세균전에 대한 입증은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고 은폐되기 쉬운 특징을 가진다. 더구나 이것은 당시로서는 무소불위의 패권을 행사한 미국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을 은폐할 정보통제와 여론조작으로 쉽사리 ‘먼저 부인하고 보는 원칙’이 먹혀들기 마련이다](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년, 272-273쪽).
여기서 ‘먼저 부인하고 보는 원칙'(doctrine of plausible denial)이란 미국의 외교원칙을 비판하는 진영에서 자주 꼽는 대목이다. ‘어떤 비밀공작이 드러날 경우 워싱턴의 당국자들은 일단은 부인하고 본다’는 이 원칙은 그동안 많은 논란과 더불어 비판을 불러왔다. 결정적인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단계에선 ‘아니오, 그런 일 없었어요’라고 손사래 치다가 나중에 큰 역풍을 맞기 일쑤다.
이를테면, 베트남전쟁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개입 명분을 쌓을 의도 아래 조작했던 통킹만 사건(1964년 8월2일)이 그러했다. 미국 정부는 통킹만에서 미 해군 구축함 매독스가 북베트남 어뢰정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북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돌리는 무차별 공습이 벌어졌다. 하지만 미국은 ‘북베트남을 우리가 먼저 침공한 것은 아니다’라 주장했다.
진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1971년 다니엘 엘스버그(국방부 자문위원)가 ‘최고 기밀’로 분류된 국방부(펜타곤) 기밀문서를 복사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건넸다. 그러면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둘러싼 ‘더러운 비밀’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로 말미암아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에 의문을 지닌 많은 이들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전데모를 벌였다(이즈음 넷플릭스가 올린 <더 포스트>가 이를 주제로 한 영화다).
‘먼저 부인하고 보는 원칙’은 세균전 관련 대목에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년을 넘긴 지금도 미국의 입장은 ‘한반도에서의 세균전은 없었다’이다. 다니엘 엘스버그(2023년 타계)와 같은 ‘내부 고발자’가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사실을 담은 결정적 문서를 폭로하는 일은 아직까진 일어나지 않았다.
개발비용 5억 달러 쓰고 그냥 놔뒀다?
미국은 정말로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펴지 않았을까. 미국이 731부대의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세균전 정보에 그토록 매달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강한 의심이 들기 마련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바로 뒤에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에서 미군이 중공군에 밀리면서 전선이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굳어져 가자, 이시이 시로가 건네준 세균전 정보를 실전에 써보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반도 세균전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은 개발비용과도 관련된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그런 거금을 들여 개발해놓고 쓰질 않는다면 ‘헛돈을 썼다’는 비판을 받고 감사 대상에 오를 수도 있다. 전쟁터에서 자식을 잃은 유권자들의 반발을 부르기 십상이기에 선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윗선은 그런 심리적 부담을 가졌고 알려진다. 마찬가지로 세균전 프로젝트에 거금이 들어간 상황에서 ‘뭔가 실적’을 보여줄 필요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1952년 미국은 생물학전(세균전) 프로그램에 5억 달러를 집행했다. 투자자들이 그 돈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잡고 싶지 않았을까. 상황과 동기를 종합해보면 이같은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의문이 제기된다](엔디콧·해거먼, 165쪽).
북한이 세균전을 비난할 무렵은 전선이 한반도 허리에서 거의 굳어진 상황이라 세균전을 편다 해도 미군이나 한국군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조심스럽지만 이런 추정이 가능할 듯하다.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으로 사망한 희생자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뤄, 미국이 아주 소규모로 세균전을 실험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균전 덜미를 잡히더라도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를 벗어날 정도의 소량으로 말이다. 그럴 경우 적군은 자연적인 질병과 세균전에 따른 질병을 구별해내기가 어렵다.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미국의 세균전 ‘설’은 의혹으로 남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의혹을 말끔히 풀고 싶은 연구자들의 눈길이 쏠리는 것은 파기되지 않은 채 비공개로 묶여있는 문서들이다. ‘특급기밀'(top secret)로 분류된 미국의 생화학전 관련 문서들은 대부분 유타주 더그웨이 문서보관소에 있다. 이 문서들은 정보자유법 청구대상에서 빠져있기에, 연구자들의 접근이 막혀있다. ‘내부 고발자’가 잠자고 있는 그 문서들을 깨워 언젠가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면,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진상도 밝혀질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파견됐던 중국 인민지원군의 위생부장 우즈리(吴之理)가 남겼던 회고록을 바탕으로, “세균전은 없었다. 공산권의 선전에 지나지 않았다”는 밀튼 라이텐버그(메릴랜드대 국제안보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반론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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