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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바뀌었고 정부 역할이 진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는 구식 보호주의나 고립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경쟁입니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이달 11일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메이드 인 호주를 위한 미래 법안(Future Made in Australia Act)’을 발표하며 ‘새로운 경쟁’에 따른 진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새 법안의 골자는 정부가 약 15억 호주달러(약 13조 원) 규모의 기금을 마련해 그린 에너지 전환 가속화와 제조업 일자리 창출을 위해 직접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앨버니지 총리는 세계무역과 시장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경제 현실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며 “이제 정부는 오랜 관찰자, 방관자 역할에서 벗어나 호주의 비교우위를 뒷받침하고 국가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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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산업정책(Industrial Policy)이 부활하고 있다. 반도체·2차전지와 같은 첨단전략산업을 육성해 공급망 불안과 기후변화 등에 대응하고 국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정부가 보조금 지급과 세제 혜택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하는 사례들이 줄을 잇고 있다. 글로벌 자유 무역 시스템에 의존해온 호주는 미래 산업 경쟁이 국가 대항전 성격으로 변모한 ‘새로운 경제 현실’을 “더는 방관할 수 없다”며 산업정책 노선으로의 극적인 전환을 선언했다. 유럽연합(EU) 정상들은 이달 18일 공동성명을 통해 자본시장 동맹을 기반으로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치는 ‘유럽 경쟁력 계획’을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이달 8일 회동한 프랑스·독일·이탈리아 3국 경제장관들은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경제 전략을 갖고 있다”며 “유럽이 이빨을 드러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부가 특정 산업을 육성·정비하고 기업 활동에 직접 개입하는 산업정책은 1990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 기구들이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모델로 미국식 시장경제 체제를 제시한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 이후 금기시돼 왔다. 세계화와 자유무역·경제를 시장과 민간에 맡기는 ‘작은 정부’가 각광 받았다. 2000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뒤로는 특정 기업·품목에 대한 정부 지원이 국제규범으로 금지됐다.
수십 년 동안 사장되다시피했던 산업정책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이 첨단전략산업에서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급부상한 반면 미국의 제조업은 워싱턴 컨센서스 이후 공백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코로나19 사태와 지정학적 긴장 고조로 공급망 위기에 직면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중국 견제와 미국 내 제조업 회생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자국 제조 기반 육성을 위한 직접 개입을 선포했다. 중국 상품에 대해 고율 관세를 부과한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보다 한발 더 나아간 조치다. 미국 내 반도체 공장 유치를 위해 530억 달러의 보조금 지급을 내건 미국의 반도체지원법과 총 370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앞세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첨단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글로벌 보조금 전쟁과 산업정책 경쟁의 신호탄이 됐다.
사실 국가 주도 산업정책의 뿌리는 깊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에서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미국의 제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영국산 수입 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철도와 항만, 기술 개발에 지원금을 제공했다. 영국에서는 15세기 무렵부터 양모 산업 보호·육성을 위해 정부가 시장을 통제했다. 20세기 들어 대공황 극복을 위한 미국의 뉴딜 정책, 국가 주도로 철강·조선·전자·자동차 산업을 일군 일본의 ‘메이드 인 재팬’ 신화,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뒷받침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등으로 이어졌다. 조재한 산업연구원(KIET) 산업혁신정책실장은 “산업정책은 자유무역 질서에서도 늘 존재했다”면서 “다만 산업 기반에 대한 간접적 지원이 아닌 특정 업종·기술 분야에 대한 경쟁적 직접 개입을 촉발한 것은 바이든 행정부”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과 IRA는 국가 대항전으로 전개되는 글로벌 공급망 구축 경쟁과 기술 패권 전쟁을 가속화했다. 그 뒤로 주요국들은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특정 산업 육성을 위한 직접 개입을 서슴지 않고 있다. 주요 타깃은 경제안보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과 그린에너지 분야다. 일본은 2021년 6월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 발표와 2022년 경제안전보장추진법 제정을 착착 진행하며 무너졌던 반도체 생태계를 빠르게 복원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장 투자금의 최대 50%를 돌려주는 파격적인 보조금 편성이 큰 몫을 했다.
EU는 청정 산업에 총 2500억 유로(약 367조 원) 규모의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제공하는 그린딜 산업 계획을 내놓았다. 반도체 산업 지원에 430억 유로를 투입한다는 내용의 ‘EU 반도체지원법’ 제정도 뒤따랐다. 인도 역시 2021년 12월 반도체 기업 유치를 위한 1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반도체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줄곧 국가 주도로 첨단산업을 육성해온 중국은 2015년부터 핵심 기술 및 부품·소재 자급을 위한 ‘중국 제조 2025’ 정책을 이행하고 있다. 반도체 기술 자립을 위해 역대 최대 규모인 270억 달러 이상의 펀드도 조성할 계획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쏟아진 산업정책은 2500개가 넘는다.
경쟁적으로 쏟아지는 산업정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IMF는 최근 보고서에서 “산업정책은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는 데 도움을 주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부패, 잘못된 자원 배분 등 정부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조금이나 세금 감면에 의존하는 대다수 산업정책이 재정 악화와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국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별 정책이 외국의 보복 조치를 초래하고 지경학적(geoeconomic) 파편화를 악화시킬 가능성도 크다. IMF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각국의 산업정책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자유무역을 왜곡해 다른 나라의 상업적 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차별적 정책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하고 지정학적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한 정부 개입은 새로운 글로벌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지금은 기술과 산업의 변화로 인해 첨단 미래 핵심 분야에서 글로벌 챔피언이 시장을 독식하는 구조”라며 “경제안보와 직결되는 전략산업은 정부가 나서서 보호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보조금 지급과 감세, 무역 규제 등의 정책 수단을 동원해 전략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주요국의 경쟁은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며 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조재한 KIET 실장은 “지금 주요국들의 산업정책은 반도체·2차전지 등에 집중돼 있지만 앞으로 바이오, AI 기술과 양자컴퓨팅 등의 분야로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2022년 미국 내 바이오 산업 육성을 위한 ‘국가 생명공학·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에 서명한 데 이어 중국 바이오 기업과의 거래를 제한하는 생물보안법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 새로운 경제 질서 흐름에서 소외되고 있다. 산업 경쟁력 강화와 주력 산업 대전환 등을 목표로 하는 ‘신산업 정책 2.0’ 전략 등을 수립하며 뒤늦게 산업정책 대열에 합류했지만 실질적 지원은 경쟁국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반도체 패권을 노리는 주요국들의 보조금 경쟁에 불이 붙었는데도 우리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정책 카드라고는 투자세액공제 일몰 연장과 국가산업단지 조성, 인력 양성 정도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미국 정부로부터 64억 달러를 지원받고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는 와중에 우리는 보조금 지급 논의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다.
경쟁국에 비해 높은 법인세 부담과 경직된 노동 시장 규제, 복잡한 인허가 절차 등 장애물은 여전하다. SK하이닉스는 2019년 2월 총 120조 원 이상을 투자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 계획을 발표했지만 공장 인허가와 토지 보상 문제 등으로 시간이 지연돼 내년 3월에야 생산라인 4기 중 1기를 착공할 예정이다. TSMC의 일본 구마모토 공장이 2021년 10월 건설 계획 발표로부터 2년 4개월 만에 완공된 것과 비교하면 하세월이다. 김재구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은 글로벌 혁신 생태계에서 소외돼왔다”면서 “기업 발목을 잡는 규제 해소와 연구개발(R&D) 지원, 보조금 지급 등 적어도 다른 나라들만큼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대로 가면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의 생산기지가 줄줄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전략산업의 글로벌 선도 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공격적인 정책 경쟁에 하루빨리 합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허 교수는 “우리나라는 WTO의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국제 여건에서는 국제규범 위반을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보호무역과 자국 우선주의 확산 속에 자유무역의 첨병인 WTO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보조금 등 적극적 산업정책을 가로막는 ‘대기업 특혜’ 프레임에서도 조속히 벗어나야 한다. 조 실장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기업들이 국내에 투자하게 만들려면 보조금 지급, 법인세 감면을 통해 투자 리스크를 낮추고 인허가 절차를 단축시키는 등 종합 정책을 펴야 한다”면서 “대기업·중소기업을 따지기보다는 우리 기업들을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육성하는 데 집중해야 할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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