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취임 2주년을 맞으며 4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이 총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엔데믹(endemic·감염병의 풍토병화) 후 시작된 세계적인 고금리 기조에 맞서 선제적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이런 결정 덕분에 한국은 주요국에 비해 물가가 빠르게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임기 후반전을 앞두고 불거진 중동 갈등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취임 2년 만에 1400원대 환율을 두 번이나 경험한 총재가 됐다. 이 총재 취임 5개월만인 2022년 9월에도 환율은 레고랜드발(發) 회사채 경색 문제가 확대되면서 1450원까지 오른 바 있다. 고(高)환율 위험이 재현되면서 이창용호의 남은 후반기도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취임 후 1년 만에 금리 3.5%로 인상… 물가 빠르게 안정
이 총재는 취임 후 1년간 역사상 최단기간에 최대 폭의 기준금리 인상을 이끈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던 빅스텝(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을 처음으로 단행하면서 신속한 통화긴축에 나섰고, 코로나19 후 1.5%였던 기준금리를 3.5%로 올려놨다. 이는 1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이후 물가는 빠르게 안정됐다. 2022년 7월 6.3%까지 올랐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은 작년 6월 2.7%로 낮아지면서 2021년 9월(2.4%) 이후 1년 9개월 만에 물가안정목표인 2%대로 돌아왔다. 유로지역 물가(HICP 기준) 상승률이 작년 11월(2.4%)에야 2%대로 진입했고, 미국은 여전히 3%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시장과 소통하면서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을 불식시키려 한 점도 호평을 받는다. 2022년 11월 도입한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지침)가 대표적이다. 3개월 후 금리 수준에 대한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 위원의 전망을 취합한 것으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점도표(dot plot·향후 금리에 대한 연준 위원들의 전망치를 취합한 것)를 본떠 만들었다.
포워드 가이던스는 기준금리에 대한 시장의 예측력을 다소 높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이 국제결제은행(BIS) 방법론을 차용해 지난 1년 6개월간 정책 경험을 평가한 결과, 시장의 기준금리 3개월 경로에 대한 예측력과 반응도가 오랜 기간 포워드 가이던스를 실시해 온 주요 선진국과 비슷했다. 해당 분석을 제안한 서영경 전 금통위원은 이를 근거로 “경제주체의 기대 관리에 도움이 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글로벌 금융전문지 더뱅커로부터 ‘아시아·태평양 지역 올해의 중앙은행장’으로 선정됐다. 더뱅커는 이 총재에 대해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로 세계경제가 고전하는 가운데 한국 경제를 강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더 뱅커는 또 “이 총재는 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고수했다”면서 “한국의 물가상승률 둔화 속도는 다른 선진국보다 빨랐다”고 평가했다.
◇ 임기 2년 만에 ‘환율 쇼크’ 두번 경험… “총재로서 뼈아픈 실책”
그러나 임기 후반전을 앞둔 지난 16일 환율이 1400원으로 오르는 상황을 맞으면서 이창용호에는 위기감이 드리워졌다. 올해 초부터 불안했던 중동 정세는 이란이 지난 13일(현지 시각) 밤 이스라엘 본토를 향해 미사일과 드론을 200번 넘게 발사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로 번졌다. 전쟁 위기가 불거지자 안전자산인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환율은 요동쳤다.
환율은 물가와의 연관성이 커 중앙은행이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지표다. 환율이 상승하면 원자잿값이 오르면서 생산자물가가 오르고, 소비자물가도 자극할 수 있어서다. 한은이 지난 22년 6월 공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 따르면 환율의 물가 전가율(원·달러 환율이 1% 변동 시 물가상승률 변동 폭)은 2022년 1분기 기준 0.06%포인트(p)를 기록했다.
이 총재가 1400원대 환율을 맞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취임 후 5개월 뒤인 2022년 9월에도 환율은 레고랜드 채무불이행 사태로 인해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1450원까지 치솟은 바 있다. 근본적으로는 미국 연준이 금리를 가파르게 올리면서 불거진 사태였지만, 정부와 한은이 한 달 뒤인 10월에야 대책을 내놓으면서 환율이 급등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번 환율 급등기까지 더해지면서 이 총재는 임기 2년 동안 1400원대 환율을 두 번이나 맞이한 총재가 됐다. 우리나라가 변동환율제를 도입한 1997년 이후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것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1997~1998년)와 글로벌 금융위기(2008~2009년)를 포함해 단 네 차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뼈아픈 대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시장 관계자는 “자의든 타의든 환율이 급등한 것은 물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면서 “물가 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이 총재로서는 임기 2년 동안 환율이 두 번이나 1400원대로 급등한 것이 뼈아플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증권시장 관계자는 “총재는 적절한 메시지를 적기에 내야 하는 자리”라면서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고 했다.
◇ 임기 후반기도 ‘물가와의 싸움’ 될 것… “포워드 가이던스 효과 기대”
전문가들은 이 총재의 임기 후반전도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환율과 유가가 급등하면서 물가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물가가 2%대로 내려오지 않으면 한은의 금리 인하 시기도 늦춰질 수 있다. 앞서 이 총재는 지난 12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월별 CPI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이 연말 기준 2.3%보다 높으면 하반기 금리인하가 어려울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고금리는 가뜩이나 부진한 내수를 더욱 위축시킬 수 있다. 고금리가 지속되면 가계의 처분가능소득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올해 들어 2월까지 평균 소매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 감소했다. 3월 소비자심리지수도 전월(101.9)보다 낮은 100.7을 기록했다.
신관호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고환율은 수입물가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어 향후 여건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면서 “물가를 너무 높은 수준으로 방치하면 기대수준도 높아져 물가를 제어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 물가가 너무 오르지 않도록 대응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했다.
신 교수는 또 “이 총재가 도입한 포워드 가이던스가 물가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데 유효한 정책수단이 될 수 있다”면서 “경제 주체의 기대는 통화정책이 어떻게 될지에 따라 형성된다. 한은이 향후 금리 수준을 미리 알려줘서 물가에 지속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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