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에 도달한 것은 1997년 ‘자율환율 변동제’를 도입한 이후 네 번째다. 앞선 세 차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1997~1998년), 글로벌 금융위기(2008~2009년), 2022년 하반기 미국의 고(高)금리 기조로 인한 회사채 시장 경색 시기였다.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후에는 경제 불황이 닥쳤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에 맞먹는 위기에 직면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환율 급등이 경제위기로 번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판단 근거로는 세 가지가 꼽힌다. 주변국 통화 약세로 우리나라의 자본유출 위험이 희석됐고, 대외순자산이 늘었으며, 경상수지 흑자 폭이 과거에 비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①주변국 통화 약세로 자본유출 위험 희석
환율이 급등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국내 금융시장을 받쳐주고 있는 외국인 자금의 이탈이다. 앞선 경제위기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자 환율 변동 위험을 떠안게 된 외국인이 원화로 표시된 채권이나 국내 주식을 대거 팔아치웠다. 외환위기 시기인 1997년 9~12월에는 181억(국내총생산의 5.1%) 달러 규모 외국자금이 빠져나갔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9~12월에는 695억달러(국내총생산의 10.2%)가 빠져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국 통화도 약세를 보이고 있어 상대적으로 자본유출 우려가 희석됐다. 외국인이 국내 채권이나 주식을 팔고 구입할 대체재가 없다는 의미다. 달러·엔 환율은 34년 만에 가장 높은 154엔 중반까지 올랐고, 달러·위안 환율도 심리적 저항선인 7.2위안을 뚫고 7.3위안을 넘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엔화 가치가 오르는 가운데 원화 가치만 급락(환율은 급등)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금은 작년 11월(45억달러)을 시작으로 올해 3월까지 5개월째 순유입(유출보다 유입이 많은 것)을 지속했다. 채권은 지난 1일부터 9일까지 7거래일간 외국인의 장외 순매수액(1조7917억원)이 10일부터 18일까지의 순매수액(1조2091억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주식은 환율이 급등했던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는 외국인이 3거래일 연속 ‘팔자’ 기조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18일부터 다시 매수세로 전환됐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비(非)달러 통화가치가 동반 하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원·달러 환율의 급등 현상을 과도한 위험으로 해석하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면서 “특히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이 며칠간 순매도를 보이고 있지만, 외국인 셀 코리아(한국의 주식을 처분하는 현상)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외국인 역시 원화의 약세가 한국만의 고유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②한국 정부·국민의 대외순자산 확대
과거와 달리 우리나라 외화자금시장이 부채보다 자산이 많은 선진국형 구조로 바뀌었다는 점도 희소식이다. 해외 투자자산이 적고 대외부채가 많은 상태에서는 환율이 오를 때 대외부채 상환 부담이 커져 신용 위험이 커진다. 반면 해외 투자자산이 더 많을 경우 환율이 오르면 대외순자산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어 오히려 외화자금시장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14년부터 자국민이 해외에 투자한 금융자산이 금융부채보다 많은 ‘순대외금융자산국’으로 전환됐다. 2022년 말 기준 순대외금융자산은 7799억달러(약 1076조원)로 집계됐다. 이는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달한다. IMF가 집계한 국가별 순대외금융자산 순위에서도 한국은 2012년 133위에 그쳤지만 2021년엔 10위로 올라섰다.
우리나라의 대외 지불능력을 나타내는 지표인 외환보유액도 꾸준히 증가세다. 외환보유액이란 유동성과 시장성이 높은 외화금융자산을 의미한다. 2008년 말 기준 2012억달러 수준이었던 외환보유액은 2018년 말(4036억9000만달러) 4000억달러를 넘어선 후 지난달 말 4192억5000만달러로 증가했다. 2022년 주요국 중에서는 중국과 일본, 스위스 등에 이어 9위 수준이다.
대외채무구조도 장기채 위주로 개선됐다. 단기채 비중이 적으면 대출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가 적어 부도 위험이 낮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은 작년 말 32.4%로 집계됐다. 1997년(286.1%), 2008년(72.4%) 대비 대폭 축소됐다. 작년 7월 IMF가 한국의 외채구조 등을 고려해 위기상황을 가정하고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에서도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외부충격과 무질서한 시장상황에 대응해 상당한 완충을 제공”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③경상수지 흑자 지속
외화조달 창구인 경상수지(상품·서비스 등의 수출과 수입의 차이)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앞선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우리나라의 경상수지는 적자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발생 전 연간 경상수지는 3년 연속 적자(1994년 -47억9400만달러, 1995년 -102억3000만달러, 1996년 -244억6100만달러)였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에도 경상수지는 1~8월 중 3월만 제외하고 내리 적자였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 경상수지는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5일 한은이 발표한 국제수지 잠정통계에 따르면 올해 2월 경상수지는 68억8000만달러(9조2747억원) 흑자로 집계됐다. 작년 5월부터 10개월 연속 흑자다. 흑자 규모도 1월(30억5000만달러)의 두 배 수준으로 확대됐다.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되면 수입대금으로 지불할 외화보다 수출대금으로 받은 외화가 더 늘어나 달러화 부족 현상이 해소된다.
이정훈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외환 시장의 수급이 안정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최근 경상수지도 흑자 규모가 크게 늘었고 해외직접 투자자금 유입은 1분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면서 “현재 환율 상승은 기본적으로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원화 가치가 하락한 영향이 큰 상황으로 자본유출의 위험이 높은 환경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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