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인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이 18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그가 후원회장과 고문을 맡았던 노동당 등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 암 진단을 받고 최근까지 투병생활을 하다 이날 오후 12시께 영면했다.
홍세화는 1947년 12월10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재학시절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됐다 복학해 8년 만인 1977년에 졸업했다. 이후 무역회사 대봉산업에서 일했다.
고인은 1970년 전태일의 죽음과 1975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을 접한 뒤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에서 활동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에서 망명했고, 택시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망명 중 출간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한국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글은 ‘톨레랑스’라는 개념을 한국사회에 통용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2006년 톨레랑스 개념을 차이를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용인’의 뜻이라고 이 책 개정판을 내며 강조했다. 1999년에는 문화비평집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한겨레출판)로 다시 이름을 알렸다.
귀국 뒤 홍세화는 언론운동과 진보정당운동, 사회운동을 오가며 활동했다. 2002년 한겨레 기획위원과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을 지냈고,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학벌없는사회’ 공동대표를 지냈다. 2010년 한겨레가 발행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을 지냈다.
2008년엔 진보신당을 창당했고 2011년 진보신당 대표를 지냈다. 19대 총선에서 진보신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후보에 나섰다. 2022년 20대 대통령선거 당시 노동당 이백윤 후보의 후원회장을 지냈다. 학습공동체 가장자리가 펴내는 격월간 ‘말과활’ 편집인을 지냈고, 최근까지 학습공동체 소박한자유인 대표를 지냈다.
홍세화는 2015년 5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언론 운동이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었던 것은 정권과의 연계, 이를 테면 참여정부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언론 노동자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이러한 흐름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우리가 딛고 있는 함정이 얼마나 깊은지 본격적으로 성찰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신자유주의라는 거대 흐름 속에서 지식인과 언론인 모두 ‘의식의 신자유주의화’했고, 이 문제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했다”며 “소유 문제에 갇혀 버린 언론인들이 소비주의라는 틀 속에 갇혀 버린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신문 칼럼은 지난해 1월12일 한겨레에 기고한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이다. 그는 이 칼럼에서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 말할 수 있는 것도 특권에 속하는데, 적잖은 입이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삶은 신자유주의를 산다. 대부분은 부자이기도 하다”고 썼다. 그는 이 시기 한겨레 편집국 간부가 대장동 의혹 핵심인 김만배씨에게 9억원 받은 사건에 내부 성찰을 요구하며 한겨레 사옥 앞 1인 시위를 했다.
그는 칼럼에서 “각자의 삶은 각자가 맺는 사회적 관계의 총화라고 했는데, 오늘 닥친 기후위기는 우리 모두에게 자연과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의 지배, 정복, 소유, 추출의 대상일 때, 인간도 다른 인간의 지배, 정복, 수탈, 착취의 대상이었다. 자유를 지향하는 인간이 최악의 날들을 끝내기 위해 자발적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켰지만 결국은 모두 실패로 귀결됐다”며 “소유주의가 끝없이 밀어붙인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썼다.
홍세화는 2020년 사회비평 모음집 <결 : 거침에 대하여>(한겨레출판)를 썼다. 2022년 이송희일 영화감독과의 대담집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 홍세화와 이송희일의 대화>(후마니타스연구소)를 공저했다.
고인은 암 발병 뒤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활동을 이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만선씨와 자녀 수현·용빈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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