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임기 5년의 록사바(연방 하원) 의원 543명을 뽑는 총선이 오는 19일부터 6월 1일까지 44일 동안 실시된다. 개표는 6월 4일에 이뤄질 예정으로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BJP)이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14년 5월부터 임기를 시작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의 3연임은 확실시된다. 모디 총리가 2029년까지 총리직을 맡는다면 통치 기간은 총 15년에 달한다.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초대 총리(16년 9개월), 그의 딸 인디라 간디(15년 11개월) 이후 가장 길다.
모디 총리(73)는 사실상 인도 카스트 기준, 최하층 출신으로는 처음 인도 총리가 된 인물이다. 인도 카스트는 신분을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군인·정치인), 바이샤(평민), 수드라(수공업 등 공인) 네 개로 나눈다. 모디 총리 집안은 바이샤와 수드라의 중간 계급인 간치로 사실상 수드라에 가까운 최하층이다. 모디 총리는 1950년 구자라트주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차(茶) 상인 집안의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모디 총리는 어린 시절, 기차역 노점에서 차이(인도식 밀크티)를 팔았다. 모디는 자신을 ‘차이 왈라’(차 파는 장사꾼)라고 부르면서 비천한 출신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정치적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이런 모디 총리는 도시 출신으로 개인 교육을 받고, 영어를 사용하는 기존의 대다수 인도 정치인들과 상반된다. 그동안 인도 총리는 자와할랄 네루를 시작으로, 그의 딸 인디아 간디(3대 총리), 간디의 아들 라지브 간디(6대 총리) 등로 이어져 왔다. 인도 총리를 대표하는 이들 세 사람 모두 영국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반면 모디 총리는 인도 수도 뉴델리와 멀리 떨어진 구자라트주에서 자란 평범한 학생이었다. 여기다 모디 총리는 영국 유학은 물론 어학연수조차 하지 않았고 영어보다 주로 구자라트어와 힌디어를 사용한다. CNN은 “모디 총리의 성장 배경은 전국 수억 명의 사람이 공감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 茶 상인 아들, 힌두 근본주의 단체 가입하면서 정계 입문
CNN에 따르면 모디의 사생활은 홍보팀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되기에 모디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바가 없다. 대신 최하층 출신이 인도 총리에 올랐다는 신분 상승 이야기는 식민주의에서 해방돼 자신감 있고 안전하며 초강대국 지위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인도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디 총리는 독신이고 자녀가 없으며 단순하고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선호하는 것처럼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모리 총리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17세에 평범한 여성과 결혼했었다. 모디 총리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17세에 가족과 아내를 버리고 영적 깨달음을 찾아 인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모디 총리는 1971년 힌두 근본주의 단체 인도국민의용단(RSS)에 가입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RSS는 이탈리아 파시즘에 기반한 케샤브 발리람 헤지와르가 지난 1925년 설립한 단체로 핵심 사명은 ‘힌두 문화 육성’이다. RSS는 마하트마 간디 암살 배후로 지목받는 과격 단체이기도 하다. 모디 총리는 구자라트주에서 RSS 조직책을 맡고 회의와 공개 강연을 통해 RSS의 대의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2019년 인터뷰에서 모디 총리는 “RSS에 헌신했고, 재혼하지 않았으며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버리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후 모디 총리는 1987년 RSS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BJP에 입당했다. 당시 인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가 부상하면서 비주류 정당이 탄력을 받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모디 총리는 BJP의 요직을 거쳐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2001년 구자라트 주지사에 임명됐다. 모디 총리가 구자라트 주지사로 있으면서 규제 완화와 투자 유치 정책을 편 결과, 구자라트주는 인프라와 산업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켰다. 이후 인도에서 이른바 ‘구자라트 모델’은 ‘개발 및 정부 효율성’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하지만 구자라트 주지사 재임 당시에도 모디 총리는 힌두 민족주의에 대한 신념을 거두지 않아 문제를 일으켰다. 지난 2002년 구자라트주 고드리에서 힌두교도가 무슬림 소유의 집과 상점을 파괴하는 등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당시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사망자의 다수는 이슬람교도였다. 일각에선 당시 주지자였던 모디 총리가 폭력 사태에 연루됐다며, 모디 총리가 소요 사태를 예방하거나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여파로 미국은 인권 침해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며 수년 동안 모디 총리의 입국을 금지했다. 하지만 모디 총리는 잘못이 없다고 부인했고, 인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오히려 폭력 사태 발생 몇 달 후, 모디 총리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재선에 성공한다.
당시 사건은 모디 총리에 대한 추종자를 낳았다. 반면 지금까지도 인도에서 무슬림을 탄압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여기다 모디가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 배경이기도 하다. 2007년 언론인 카란 타파르(Karan Thapar)가 모디 총리에게 구자라트 유혈 사태에 대한 책임론을 제기하자, 모디 총리는 인터뷰 도중 퇴장했다. 그가 총리가 된 이후 단독 기자회견을 한 번도 하지 않은데는 과거 인터뷰와 관련된 해프닝이 발단이 됐다는 분석이 있다.
◇ 경제적 불평등, 이슬람 탄압에도 경제 성장이 지지 원동력
모디 총리의 힌두 민족주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지사 시절 보여준 ‘구자라트 모델’은 인도의 청사진이 됐고, 2014년 BJP가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모디는 총리에 취임한다.
모디 총리는 취임 이후, 작은 마을과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해 인도의 노후한 교통망을 개선했다. 새로운 발전소, 해양 프로젝트도 추진했고, 군사력도 강화했다. 이렇듯 모디 정부 출범 이후 인도의 경제 규모는 급격하게 올라섰다. 2014년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1위였던 인도 경제 규모는 지난해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로 올라섰다.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014년 361억 달러(약 49조 원)에서 2023년 710억 달러(약 97억 원)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인도는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했고, 야당과 언론을 탄압했으며 힌두 민족주의 아래 이슬람을 탄압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세계불평등연구소(WIL)에 따르면 인도는 상위 1% 부유층이 인도 전체 자산의 40% 이상을 갖고 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인도가 180개국 중 161위로 언론 탄압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여기다 모디 총리는 인도 북부 야요디아의 힌두교 최고 성지인 람 만디르 사원 개관식에 참석하면서 힌두 민족주의를 강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인의 모디 총리에 대한 지지는 엄청나다. 퓨리서치센터가 2023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도 성인 10명 중 8명은 모디 총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중 55%는 ‘매우 호의적’이라고 평가했다. 퓨리서치센터는 당시 결과를 발표하면서 “모디 총리는 인도 정치 역사상 이전 총리들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해냈다”며 “모디 총리는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숭배를 창조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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