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남 독립PD는 지난달 말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영화관을 찾았다. 10년 동안 세월호 참사 관련 영화를 보지 않다 이날 처음 마주했다. 연분홍치마와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가 제작한 옴니버스 3부작 다큐멘터리 <세 가지 안부>다. 그가 4·16기록단으로서 찍은 영상들이 영화에 담겼다. 주현숙 감독의 <그레이존>은 참사 현장에 있었던 언론인들 증언을 담았다. 박 PD는 4·16기록단의 한경수 프로듀서 요청으로 출연했다.
“편집자들은 이쯤에서 오디오 스니크 인(sneak-in·효과음이 서서히 들려오는 기법)이 있겠다는 걸 안다. 카메라가 빈 진도체육관을 쭉 밀고 들어간 다음부터 가슴이 울렁울렁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참사 현장) 소리가 쫙 올라오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때부터 울었다.”
10년 전 박정남 PD를 비롯한 4·16 기록단은 세월호 참사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기록했다.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이는 바지선에 매일같이 올랐다. 이들은 가족들의 싸움을 마지막까지 남아 기록한 이들이기도 하다. 가족들이 진도체육관에서 철수한 뒤엔 청와대와 국회, 거리에 있는 가족들을 찍었다.
15일 만난 박정남 PD는 4·16기록단을 결성하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MBC가 그가 만든 세월호 참사 다큐스페셜을 불방 결정한 뒤였다. “‘결국 (방송이) 꺾였다’는 MBC 선배 얘기를 듣고 서울에 올라왔다. 술을 마시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박봉남 선배(동료 PD)에게 전화가 왔다. ‘도저히 못 참겠다, 열불나서 못 참겠다. 이거 우리 다 기록하자’고 말하더라. 박 선배가 통장을 털고, 나도 독립PD들을 모았다.” 그는 첫 6개월 생업을 포기하고 기록에 뛰어들었다.
4·16기록단의 목표는 명확했다. 공적 기록 남기기다. “사유물이 아니라 (출처를) 밝히기만 한다면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건을 다시 해석하고 만들어내는 밑바탕, 재료가 되기를 원했다.” 4·16기록단은 찍고 수집한 영상기록물을 모두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 넘겼다. 계좌에 남아 있던 자금은 <세가지 안부> 제작에 기부했다.
“다큐에서 이름 빼달라고 했다…활동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박 PD는 참사를 ‘중근이 나온 날’ ‘전수영 선생님 나온 날’ ‘지현이 나온 날’ 로 떠올린다. 기록자로서의 고민과 트라우마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는 가족상황실에서 잠수사에게 전화해 수습된 희생자 정보를 듣고 유가족에게 중계를 했었다. “정보 하나 올 때마다 유가족들 운명이 쫙쫙 갈라진다. 여자애냐 남자애냐 묻고, 남자애라고 하니 여자아이 가족들은 싹 없어지고, 또 말하면 싹 없어지고…오른손에 카메라 들고 왼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그걸 했다. 손을 덜덜덜 떨면서. 마지막으로 허리띠를 확인하니 중근이였다. 아… 난 뭐지? 그런데 내가 왜 이걸 찍고 있지? 지금도 모르겠다. 지금도 고민이다. 지금도 미안하다.”
정부가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은 참사 현장은 ‘지옥보다 더 지옥’이었다. “지현이 부모님이 지현이를 찾고 나서 장례 치르러 안산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그 양반들이 떡을 해서 내려오더라. 딸이 죽었는데, 죽은 딸을 찾았다고 떡을 해오고 축하한다고 말한다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록단은 가족들과 섞여 먹고 잤다. 진도체육관 1층은 실종자 가족이 자리를 펴고 지냈고, 취재진은 2층에 머물렀던 때다. “‘밑에 좀 내려오시면 안 되냐’고 (가족들이) 그러시더라. (시신이 수습돼) 찾은 가족들은 떠나지 않나. 떠나고 난 자리에 생긴 구멍, 그 빈 공간을 보고 있기 너무 힘드신 거다. 가족들과 술을 많이 마셨다.”
세월호 참사 뒤 100일 특집으로 방영된 다큐스페셜은 박 PD 이름이 지워진 채 나갔다. 그가 이름을 빼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때 세월호를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모습들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활동하는 게 밖에 알려지는 것도 별로 원치 않았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는 언론과 정부의 가족에 대한 가해”
그는 세월호 참사를 ‘가족에 대한 가해’로 표현했다. ‘전원 구조’가 오보로 밝혀진 뒤, 세월호를 온 가족들은 첫날부터 기자들에게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구조를 하지 않는다’고 울부짖었다. 정부는 ‘구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정부 발표만 기사에 실었다. 정작 유가족의 목소리는 보도되지 않았다. 그는 “유가족들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그러나 언론이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지 않았다”고 했다. 유가족 활동을 이어온 이창현 군 어머니 최순화씨는 지난달 <세 가지 안부> 상영회에서 ‘언론에 하고 싶은 말’을 묻는 질문에 “기대하는 바가 없다”고 했다.
유가족들은 정치권과 언론에 의해 ‘빨리 정리하라’고 강요받았다. 여야는 수사권도, 특검 추천권도 없는 진상조사 특별법에 합의했다. 2015년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은 유가족들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만남을 거부한 것을 두고 ‘대한민국을 등지겠다는 건가’라고 사설을 냈다. 청와대를 찾아 진상규명을 요구할 때엔 참사가 ‘정치투쟁화’됐다며 비난했다. 2021년 특별수사단이 기무사·국정원의 세월호 유가족 사찰 의혹, 법무부의 수사 외압, 구조 방기 의혹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나오고, 유가족이 문재인 정부의 책임과 역할을 촉구하며 삭발할 때 보도는 미미했다.
“세월호 참사를 만든 언론인에 정면으로 입장 물어야”
세월호 참사를 다룬 방송 불방은 반복되고 있다. KBS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 제작 중단을 통보하며 제작진과 공정방송위원회 논의마저 무산시켰다. 박 PD는 “세월호 참사 방송을 불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될지를 모르는가”라고 되물었다.
박 PD는 참사를 만든 언론의 행위를 정리하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예 없잖나. 10년이 지난 마당이다. 정말 욕 먹어야 할 언론인들이 무엇을 했는지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 잘못한 언론을 다 만나고, 앰부시도 해야 한다. 그 기자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당하게 자기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이 보고 싶다. 당신이 보기에 당신의 기사가 지금도 정당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를 포함해, 기레기라 불린 미디어가 반성할 계기를 만들지 않을까. 그걸 정확하게 짚지 않으면, 똑같은 식의 보도가 나올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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