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는 ‘괴짜’ 기후 활동가가 있다. 이 유난스러운 70대 할아버지는 이 동네 언론계 종사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름은 ‘박 선생’으로 칭하겠다. 박 선생은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에 이따금 주전부리 들고 찾아온다. 편집국장 혹은 사회부장을 앉혀놓고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설파한다. 그 말을 엿듣고 있노라면 당장 지구가 멸망할 것만 같다.
무수한 말을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다. ‘지구 평균 온도 1.5도 상승을 막아야 한다’는 것. 골든타임은 2025년이라고 한다. 2025년부터 탄소 배출량을 마이너스 추세로 만들지 못하면 1.5도 상승을 막지 못한다는 의미다. 박 선생께 귀동냥으로 들은 기초지식이다.
괴짜 행적은 경남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론에만 갖혀 있지 않는 그는 창원과 김해 등지에 기후위기를 알리는 펼침막을 걸고 다녔다. ‘기후 위기’, ‘1.5도 상승 7년’ 등 글귀가 쓰인 이 펼침막은 창원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데 모두 박 선생 작품이다. 지금까지 남긴 작품이 3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기행의 정점은 한 터널에서 찍었다. 경남도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 선생은 2021년 12월 붉은색과 하얀색 페인트로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터널과 진전터널, 해안도로 등에 ‘기후위기’ 네 글자를 새겼다. 이로써 재판에 넘겨진 박 선생은 1심 재판에서 벌금 10만 원 형을 받았다. 박 선생은 항소했고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해 기후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힘을 달라”고 호소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으나 12일 상고가 기각되면서 1심 형이 확정됐다. 박 선생은 굴하지 않고 그다운 말을 남겼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내 몸으로 항변할 것이다. 벌금을 내지 않고 노역을 살겠다.”
그 곧은 심지에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영화 <돈룩업> 주인공 랜들 민디 교수(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다. 천문학 박사인 랜들 교수는 어느날 에베레스트 크기의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다. 랜들 교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널리 알리려고 하지만 시민들은 그 불편한 소식에 애써 눈을 감는다. 정치인들은 더 가관이다. 눈앞의 선거에만 신경쓰고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만 몰두한다.
한국 현실도 일면 비슷하다. 기후환경단체가 4·10 총선에 출마했던 후보 696명의 공약을 분석했더니 ‘기후 공약’은 극히 적었다고 한다. 특히 거대 양당인 국민의힘은 출마자 15%, 더불어민주당은 39%만이 기후 공약을 제시했다. 후보 중 절반이 넘는 342명은 주차장 확대 공약을, 196명은 그린벨트와 상수원·고밀도 개발 등의 규제 완화안을 내놨다고 한다. 더불어 기후 공약을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한 녹색정의당은 지역구, 비례대표 모두 한 석도 얻지 못한 채 원외로 밀려났다. 결국은 유권자에게 어필하는 건 반기후 개발정책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가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경고하지만, 대중도 정치인도 이에 둔감하다. 인간이 방심하는 사이에 대자연은 점점 더 강력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수박 최대 산지인 경남 함안에서는 올해 2~3월 밭을 갈아엎는 일이 있었고, 사과는 지난해 길게 내린 비의 영향으로 제대로 익지 못해 공급량이 줄면서 이른바 ‘금사과’ 대란을 일으켰다. 이뿐인가? 온난화로 인해 토양 수분이 증발되면서 산불의 빈도가 더 잦아지고 그 규모도 더 커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UN은 2030년까지 전세계에서 거대한 산불이 14% 증가하고, 2050년까지 30%, 세기말에는 50% 증가할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최근 총선 방송을 보다가 박 선생이 떠올랐다. 동네에 뭘 자꾸 만들어주겠다는 공약을 건 거대 양당 후보들이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박 선생은 또 무슨 궁리를 하고 있을까.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직면하게 될 어두운 미래에 모두가 눈 감고 있을 때 ‘당장 행동해야 한다’며 몸부림 치는 연로하고 외소한 박 선생을 떠올리고 있자니, 썩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눈 뜬 자가 이방인인 법이니까.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