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 새 미국과 유럽 사법부가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노력 부족이 국민이 건강하게 살 권리를 침해한다는 판단을 내놓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판단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헌재는 23일 ▲청소년 기후 행동 활동가 19명 ▲시민 (시민사회단체 및 정당) 123명 ▲영유아 62명 ▲시민 51명 등이 “탄소중립 기본법이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낸 헌법소원 사건의 첫 공개 변론을 연다. 2020년 3월 청소년들이 기후소송을 제기한 지 4년 만이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현행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는지를 둘러싸고 헌재에서 공개 변론이 열리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헌재가 심리할 조항은 탄소중립 기본법과 옛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이다. 옛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은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과 녹색성장을 위해 목표나 계획을 설정하고 필요 조치를 강구하도록 규정한다. 2022년 재·개정된 탄소중립 기본법 시행령에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줄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청구인들은 법률에 따라 정부가 마련한 계획이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에 포함되는 ‘안정된 기후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이라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또 우리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주요 선진국 국가(40~60%)보다 현저하게 낮고, 2030년 이후를 살아갈 세대에게 감축 부담을 줘 피해를 전가했다고 주장한다. 청구인 측 관계자는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닌 국가의 대응을 요구하는 의미의 소송”이라며 “기후 변화는 법이 지켜지지 않아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법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반면 정부는 지금 온실가스 감축 계획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환경부는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에 “현행 온실가스 감출 목표만으로도 산업계에 상당한 부담을 야기한다”는 의견서를 냈다. 환경부는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의견을 인용하며 “탄소중립 이행 과정에서 산업 경쟁력 약화, 일자리 감소 등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라고도 언급했다. 주요 7개국(G7)의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018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35~45% 수준으로, 40%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이번 헌법소원의 쟁점은 ▲기후 변화를 기본권으로 볼 수 있을지 ▲기후 변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적절한지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와 입법부의 재량을 인정할지 여부 등이다.
해외에선 정부의 기후 정책이 국민의 기본권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지난 2019년 네덜란드 대법원은 환경단체 우르헨다가 네덜란드 정부의 ‘1990년 대비 2020년까지 온실가스를 14~17% 감축’ 목표를 상향 조정하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환경단체 손을 들어줬다. 네덜란드 대법원은 정부의 감축 목표가 유럽 인권 협약에 규정된 생명권, 사생활에 대한 권리를 위반했다면서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최소 25% 감축하라고 판결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 ‘우르헨다 판결’을 정책에 반영한 뒤 감축 목표를 달성했다.
2021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 정부 기후변화대응법에 대해 일부 위헌 결정을 내렸다. 독일 헌재는 “2030년 이후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규정하지 않아 미래 세대 자유권이 침해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 몬태나주 법원은 2023년 어린이 및 청소년 16명이 몬태나주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1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들은 1972년 주 헌법 개정을 통해 주 정부가 환경보호 및 개선 의무를 지게 됐지만 관련 활동을 하지 않아 자신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갈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주정부가 화석연료 정책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살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한편 이번 헌법소원에는 이병주 법무법인 디엘지(옛 디라이트) 대표 변호사와 미국과 일본 등의 변호사들이 참여한다. 공동 대리인단에 이름을 올린 윤세종 변호사는 “우리는 미래세대의 권리를 끌어다 소진하고 있다”며 “마지막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헌재 판단으로 본격적인 기후 대응이 시작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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